인심도심 논쟁과 주자학의 완성--栗谷 李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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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心道心 論爭과 朱子學의 完成-栗谷 李珥
1. 李珥의 生涯
栗谷 李珥는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조선의 대표적인 주자학자로 강원도 강릉의 외가에서 태어나 모친 신사임당의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났다. 13세에 초시에 급제하고 16세에 모친을 여의고 3년상을 마친 뒤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했으며, 23세에는 이황을 찾아 가르침을 청하기도 했다. 그해 겨울에 별시에 응시하여 장원급제 했는데 이때의 답안지가 유명한 <천도책>이다.
이이는 비교적 젊은 시절 중앙의 정치무대에 나간 이래 20여년 동안 이조좌랑, 호조판서, 부제학, 대제학 등 국가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아울러 임진왜란 발발 이전에 ‘십만양병론’을 주장하면서 각종 화약무기를 개발하고 전함을 건조하여 왜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에는 유성룡 등의 유학자들로부터 아무일도 없는데 병력을 양성하는 것은 그 자체가 화근이라고 비판을 받았지만 나중에 전쟁이 일어나자 선견지명을 가진 성인으로 찬양받기도 했다.
이이는 49세로 비교적 일찍 세상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 중에서도 <聖學輯要>와 <擊蒙要訣>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조선 성리학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지만 그 외에도 정치, 경제, 교육 등 다방면에 관심을 갖고 뛰어난 방책을 제시했다. 예컨대 1577년에 저술한 <擊蒙要訣>은 초학자들을 위한 성리학 지침서라 할 수 있는데 충실한 내용과 완성도 높은 체제를 갖추고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배우는 자들은 반드시 성현이 되겠다는 뜻을 세워야 한다는 立志章, 나쁜 습관을 버려야 한다는 革舊習章, 올바른 몸가짐을 강조한 持身章, 책을 읽는 방법을 논의한 讀書章, 어버이 섬기는 도리를 논한 事親章 등 모두 10장으로 구성되어 학문의 목적부터 구체적인 방법과 실천에 이르기 까지 자세히 논의하고 있어 조선시대 내내 초학자들의 필독서로 여겨졌다.
그는 이치를 따지지 않고 단지 스승의 설이라고 해서 믿고 따르는 독경주의를 비판하고 스스로 의미를 찾는 자주적인 학풍을 주장했다.
그는 이런 학풍에 입각하여 이황에게 다른 사람의 견해를 모방하는 경향이 있음을 비판하고 아울러 “朱子라 할지라도 정말 理와 氣가 상대해서 각각 출발한다고 생각했다면 주자 또한 잘못한 것”이라고 할 정도로 자주적인 학풍을 중시했다.
또 그의 벗이었던 성혼과 ‘人心道心 論爭’을 진행했는데, 이는 한국철학사상 이황과 기대승 사이에 일어난 ‘四端七情 論爭’과 버금갈 정도로 중요한 논쟁이다.
2. 人心道心 論爭의 發端
李珥와 성혼 사이에 일어난 인심도심 논쟁은 근본적으로 이황과 기대승 사이에 일어났던 四端七情 論爭과 동일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대로 ‘사칠논쟁’은 두 사람이 모두 동의하는 합의를 이루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고 기대승은 여전히 사단이 칠정 속에 포함된다는 입장을 지켰고 이황은 이와 기가 互發한다는 입장을 그대로 유지했다.
이는 본질적으로 理氣論과 心性論이 완전하게 결합하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논쟁은 언제라도 재연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황이 생존하고 있었을 때는 그런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그가 죽은지 2년이 지나서 성혼이라는 학자가 이이에게 인심과 도심에 관한 논의를 제기하면서 人心과 七情은 氣의 작용이고, 道心과 四端은 理의 작용으로 나누어보고 이황의 理氣互發說을 지지하면서 논쟁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애초에 성혼은 이황과 기대승 간에 四端七情 論爭이 진행되고 있었을 때는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부정했다가 주자의 <중용장구서문>을 읽다가 주자가 인심과 도심을 나누어 말하는 것을 보고 생각을 바꾸게 된다. 곧 하나의 마음을 인심과 도심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사단과 칠정 또한 둘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으므로 四端을 理發로, 七情을 氣發로 분류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견해를 제시한 것이다.
3. 人心道心 論爭의 進行
‘사칠논쟁’이 이황과 기대승의 치열한 고민과 분석 끝에 장장 8년이라는 시간을 끌면서 진행되었던 것과는 달리 이이와 성혼 간의 인심도심 논쟁은 비교적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진행되었다. 이이와 성혼은 각각 9차례에 걸쳐 편지를 보냈는데 대체로 성혼이 문제를 제기하고 이이가 대답하는 방식으로 논쟁이 진행 되었다.
논쟁을 통해 이이는 理와 氣의 不相離를 강조함으로써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부정하였다. 그는 “발동하는 것은 氣이고 발동케 하는 것은 理이다. 기가 아니면 발동할 수 없고, 이가 아니면 발할 바가 없다. 先後도 없고 離合도 없으므로 호발이라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인간의 마음이 움직일 때 움직이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氣이며 기 없는 발동은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못을 박고, 理는 발동의 주체는 아니지만 기의 근거로서 발동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이것이 바로 氣가 발하고 理가 타는 한 가지만 인정하는 ‘氣發理乘一途說’이다.
그의 이 같은 주장은 주자 理氣論의 기본명제인 不離不雜을 모순 없이 충실하게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치밀하면서도 독창적이다. 또 대부분의 朱子學者들이 인간의 욕망을 부정시 했던 것과는 다르게 육체적 욕구인 형색을 인정하는 한편 형색 자체가 악이 아니라 過不及 때문에 악으로 흐른 것이라고 규정함으로써 탁한 물도 물은 물 이라는 명제를 제시하여 선과 악이 원리적 대립물이 아니라 악은 선을 이루지 못한 부차적인 개념임을 분명히 했다는 점에서 탁월한 설명력을 가지는 논의를 진행 시켰다.
4. 인심도심 논쟁의 意義
이이는 인심도심 논쟁에서 이와 기를 각각 形而上과 形而下로 구분한 다음 이 두 가지는 서로 떨어질 수 없다고 규정함으로써 理氣不相離의 원칙을 먼저 강조한다. 이어서 그것을 기준으로 이와 기의 발동은 한가지 일뿐이라고 결론 짓는다. 곧 자신이 제기한 氣發理乘一途 이외에 理와 氣가 각각 발동한다는 호발설은 입론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못 박는다. 만약 이황의 경우처럼 이와 기가 상호 발동한다고 말하게 되면 이와 기의 불가분리성을 부정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이와 기의 공간적인 단절(離合)과 시간적 단절(先後)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렇게 되면 앞서 규정한 이와 기의 구분, 곧 형이상과 형이하의 층차적 구분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므로 오류라는 것이다.
아울러 이이는 성현들이 인간의 마음을 人心과 道心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게 된 것은 본래 다같이 理에 근원하여 순선했던 인간의 심이 기를 타고 유행하는 과정에서 선 또는 악으로 나누어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곧 발동 전의 상태와 발동 후의 상태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인식상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발동 전의 순선무악한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을 道心으로 규정하고 그 반대의 경우를 人心으로 규정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人心과 道心은 두 개의 각각 다른 마음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동일한 심의 두 가지 상태를 구분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편의상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인심 또한 처음에는 선하지 않음이 없다고 파악한다. 인심에서 악이 발생하는 것은 인심 자체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객관적인 상황과의 부조화, 곧 과불급 이라는 과정상의 문제 때문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미발 상태에는 인심과 도심의 구분이 무의미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 같은 견해는 심을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는 방식에 비해 논리적 정합성이 훨씬 뛰어나다는 점에서 설득력 있는 논리를 펼쳤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이는 이 논쟁을 통해서 주자학의 논리적 구조를 명확하게 설명하면서 그에 어긋나는 주장은 설사 주자 자신의 말이라 해도 옳지 않다는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논리적으로 대단히 치밀한 이론체계를 수립했다. 특히 기의 현실성에 주목하여 氣發理乘一途說을 제기한 것은 주자학의 난점을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 조선의 학문적 수준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參考文獻
김교빈외 <東洋哲學 散策> 방송대출판부, 2006.
김교빈 <韓國哲學에세이> 동녘,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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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판기님의 댓글
덕분에 공부합니다.노자, 공자는 관심을 두고 현지답사도 여러번 다녀오곤 했으나 정작 조선의 학문은 ,뜬 구름만 잡았으니 조상에 많이 미안했는데 정박사님에 기대어 조선을 들여다 보겠습니다. 창조원리를 이해 하는데도 커다란 도움이 될 것같아 괜시리 기분이 들떠집니다. 올리신 글 잘 갈무리 하고 복습하겠습니다.
정해관님의 댓글
먼저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의 구분은 학문적 경향을 가지고 나눈 개념으로서
성리학을 보는 관점이 대체로 영남쪽 선비들과 기호지방 선비들이 서로 구분되기 때문에 편의상 지역명칭을 가지고 부르는 이름입니다.
다음 동인과 서인은 학문과는 전혀 상관 없이 정치적 이해집단인 붕당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역시 대체로 동인은 영남쪽 인사가 대다수고 서인은 기호쪽 인사가 많아서 학파와 정파가 서로 일치한다고 보는 것일 뿐 영남학파=동인 이라는 개념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주자의 성리학이 고려말에 도입된후 조선시대에 이를 연구하는 성리학자들이 많이 나타났는데 성리학이란 성 = 리 라고 보는 학문입니다. 그런데 주자는 우주의 근원을 논하면서 이(리)와 기가 서로 다른 존재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서로 같기도 하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게 이기론입니다.
조선의 학자들이 이기론을 연구하다가 조선초, 중기에 와서 비로소 독자적인 연구업적을 남기기 시작했는데 영남의 이언적이 이와 기의 개념중 이(리)가 더 우선적이라 보는 견해를 남겼고 이를 받아들여 더 수준을 높인 사람이 퇴계 이황입니다. 즉 우주의 근원과 인간의 본성은 기가 아니라 이(리) 라고 본 것입니다. 이(리)는 원리,원칙,하느님,법칙,정신 등등 형이상학적 개념입니다. 이황이 리를 위주로 하는 성리학을 정립하면서 이황의 제자들이 이를 더욱 계승 발전시켰는데 이황은 안동사람이기 때문에(도산서원) 제자들이 자연히 영남선비들이었고 이 이론을 조선 말까지 유지해 와서 이 학파를 영남학파라고 부르고 또는 주리론이라 부릅니다.
동시대 같은 영남에 살았던 (진주) 남명 조식도 성리학에 대한 독자적인 견해를 발전시켜 많은 제자들을 키워냅니다. 딱히 주리론이라 부르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영남에 살았으니 이사람들도 영남학파라고 부르는 것이죠. 조선의 성리학은 이황과 조식에 의해 크게 발전하고 제자들도 끊임없이 이어져서 하나의 학파가 될수 있었죠. 이언적은 선구적 학자 였지만 제자를 많이 길러내 독자적인 학파를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서경덕은 개성사람인데 영남학파도 아니고 주리론도 아닙니다. 그는 주기론에 가깝습니다. 이와 기의 개념중 기는 실제적 현상, 물질, 기운 등등 을 나타내는데 서경덕은 우주와 인간의 근본을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인 기로 보았습니다. 서경덕은 토정비결을 쓴 이지함 같은 제자가 있긴 하지만 독자적인 학맥을 유지하지는 못했고 이 개념을 이어받은 사람이 바로 율곡 이이입니다. 이이는 이기론에서 실제로 작용하고 나타나는 것은 기이므로 기가 더 중요한 개념이라 보았습니다. 리는 단지 기를 나타나게 하는 이유라고 보았죠. 이이 역시 많은 동료와 제자들로 하나의 학파를 이루었는데 이이가 파주사람이고 제자들도 경기충청 사람이어서 기호학파로 불립니다. 동료인 성혼과 편지를 통한 논쟁으로 학문을 교환해서 성혼 역시 기호학파에 들어갑니다.
이 학파라는 것은 그 이론을 따르는 제자와 동료학자로 인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므로 칼로 자르듯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굳이 창시자를 따지자면 영남학파는 이황, 기호학파는 이이라고 하겠습니다.
제자들이 없으면 학파가 형성될 수 없습니다.
조선 선조때에 선비들이 정계에 대거 진출하는데 선비는 곧 학자이므로 학자관료가 됩니다.
이들중 학맥이 있는 사람들은 자연히 뭉치겠죠. 지금 연대줄신 고대출신 하는 것처럼. 그것이 바로 동인 서인입니다. 이황의 제자들이 동인이 되고 이이의 제자들이 서인이 되어 정파역시 학파처럼 나눠졌는데 동인=영남학파 라는 등식이 꼭 맞는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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