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의 四端七情 논쟁과 朱子學의 한국적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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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退溪의 四端七情 論爭과 朱子學의 韓國的 展開
目 次
Ⅰ. 들어가는 말----------------------2
Ⅱ. 本論
1. 朝鮮 朱子學의 槪觀-----------------2
2. 退溪 李滉과 高峯 奇大升의 生涯-------4
3. 四端七情 論爭의 發端과 進行
1] 四端七情의 意味------------------6
2] 論爭의 發端---------------------7
3] 論爭의 進行---------------------7
4. 退溪와 高峯의 立論 根據------------12
5. 四端七情 論爭의 朱子學的 意義-------13
Ⅲ. 맺는 말------------------------14
Ⅰ. 들어가는 말
哲學史는 思惟體系가 歷史的으로 變化. 發展해 간 흐름을 말한다. 論爭은 그 過程에서 커다란 役割을 하고 있다. 따라서 논쟁이 豊富했던 哲學은 그만큼 발전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다. 철학은 자신의 사유체계를 다지기 위해 論理的 構成力을 갖추어야 하며, 論爭은 그러한 論理的 構成力의 깊이를 더하기 위한 必須 過程 이었다. 이제 논쟁이 哲學 發展에 끼친 役割을 살펴보자.
첫째, 論爭은 논쟁 주체들의 學問的 發展을 위한 디딤돌이었다. 學問的 意味에서의 논쟁은 단순히 서로 관점이 다른 思惟體系들의 대립이 아니다. 논쟁은 논쟁을 하는 당사자들에게 외적으로는 論爭 相對를 이기기 위한 排斥力의 强化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배척력은 단순히 정치적 힘을 가지고 있다든가 많은 세력을 확보한 학파라고 해서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이 같은 배척력은 내적으로 스스로의 論理 構成力을 강화하고 學問的 眞摯性을 確保함으로써 힘을 갖게 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논쟁이란 대립되는 學說과의 衝突인 동시에 自身과의 싸움일 수밖에 없다.
둘째, 각 論爭은 哲學史 속에 들어있는 結節點이며, 論爭 이전과 이후를 잇는 획기적인 轉換의 契機가 되었다. 물론 어떤 論爭이든지 消耗的인 방향으로 진행되어 서로 간의 격차를 더 벌려 놓은 경우도 있다. 그러나 大部分의 論爭은 논쟁 과정에서 서로의 입장을 理解하게 되었고, 아울러 상대의 이론 속에 浸透함으로써 더 나은 理論 定立을 可能하게 하였다.
本稿에서는 조선 朱子學 史上 큰 산봉우리의 하나를 이룬 退溪 李滉의 思想을 고찰함에 있어, ‘조선 중기 주자학의 歷史的 性格을 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哲學的 轉換’이라고 評價될 이황과 奇大升 사이의 四七理氣 論爭을 中心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朝鮮 초, 중기의 朱子學을 槪觀하여 살펴보고 논쟁 當事者들의 生涯를 고찰하며 四端七情 論爭의 發端과 進行, 그리고 立論의 根據와 논쟁의 朱子學的 意味에 대하여 敍述하고자 한다.
Ⅱ. 本 論
1. 朝鮮 朱子學의 槪觀
性理學, 곧 朱子學은 南宋의 儒學者 朱憙에 의해 集大成된 學問體系로서 그 발생 자체가 불교의 초세간적 傾向을 克復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었다. 그것의 기본 정신은 원시 유학과 마찬가지로 현실사회를 道德的으로 편제하려는 데에 있었다. 다만 원시 유학과 다른 점이 있다면 朱子學은 사람이 왜 현실 속에서 강상윤리라고 하는 주어진 道德規範에 따라서 살아야 하는가를 形而上學的 論理로 複雜하게 說明하고 있다는 점이다.
朝鮮이 건국과 함께 주자학을 統治理念으로 標榜하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주자학을 통치이념으로 표방하였던 만큼 조선은 朱子學 思想을 體系的으로 整理하고 傳播할 사명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朝鮮 初期의 현실에서 볼 때 이 사명을 담당한 것은 官學派 유학자 들이었다. 官學派 儒學者란 관학을 통해 學問的으로 성장하고, 중앙관계의 요직을 맡아 국가경영의 실무를 담당하였으며, 국가의 입장을 反影하여 學問活動을 진행하였던 일단의 학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후대의 士林派 儒學者 들과 對比되는 말이다.
조선의 建國過程에서 絶對的 역할을 했고, 주자학의 이론에 의거한 佛敎 批判書인 <佛氏雜辨>을 著述한 鄭道傳과 <入學圖說> <周易淺見錄> 등의 著述로 王權이 강화된 조선 초기 사회의 代表的인 朱子學者인 權近 등이 官學派 儒學者였다.
한편 조선 초기의 統治秩序와 그것을 떠받치고 있던 官學派 유학사상은 성종대 이후 問題點을 드러내게 되었다. 통치 질서라는 측면에서 볼 때 가장 큰 문제는 권력이 중앙에 집중됨으로써 향촌의 自律性이 確保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반면 15세기에 이루어진 농업 생산력의 발달에 따라 향촌의 자율성에 대한 요구는 계속적으로 增大하고 있었다. 또 理 範疇보다는 心 범주를 重視하고, 朱子學의 이념에 充實하기 보다 불교와 같은 이단 사상과의 妥協을 摸索하였던 官學派 儒學思想도 問題點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주로 중앙의 고급 관료들, 관학파 유학자 자신의 부패화로 나타났다. 그들의 腐敗化는 권력의 集中에 따르는 당연한 현상이기도 하였지만, 批判者들은 그것이 주자학의 이념에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에 따라 비판자들은 중앙에 의한 他律的 統制 보다는 향촌사회의 자치적 질서를 중시하고, 엄격한 道德律에 의해 規律되는 새로운 社會秩序를 심고자 하였다.
주자학은 원래 자율적 道德律에 의해 統制되는 향촌 사회를 모델로 誕生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새로운 사회질서는 이미 주자학에 의해 제시된 것이었다. 이 비판자들이 바로 士林派 儒學者들인 것이다.
사림파 유학자들은 고급 관료의 부패성을 攻擊하면서 역사의 무대에 登場하였다. 하지만 더욱 根本的으로 그들은 향촌의 自律的 질서가 强調됨으로써 자신의 출신 기반인 향촌사회에서 중소지주로서의 자신들의 立地가 强化되기를 원하였다. 이러한 사림파 유학자들의 생각은 당연히 중앙의 權力者들의 이익과 衝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충돌의 결과 나타난 것이 士禍였다. 왕권 중심의 中央集權的 관료제 국가라는 당시의 기본적인 統治體制에 變化를 일으키려는 사림 출신의 관리들이 모두 犧牲당했다는 점에서 사화는 이전의 사륙신 사건과 類似하고, 아울러 희생당한 관리들이 모두 주자학의 이념을 標榜했다는 점에서 士禍와 사육신 사건은 유사한 思想史的 意味를 지닌다.
이들 사림파 유학자의 대표자로서 사화기 인물은 아니지만 士林派 儒學者의 선배격인 길재와 김숙자를 들수 있고, 士林派의 泰斗라 할 수 있는 金宗直, 그리고 사화기의 인물로서 金宏弼과 鄭汝昌, 趙光祖를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이른바 조선 성리학의 도통을 잇는 인물들로 평가 된다.
16세기 중반까지 계속된 사화는 사림파 유학자들을 다시 鄕村으로 내몰았다. 개인적으로 볼 때 학자들은 불우한 시기를 맞이하였으나, 思想史的으로 보면 이 시기는 오히려 발전의 기회였다. 공직에서 자유로워진 학자들은 鄕村에 隱居하면서 朱子學의 根本問題를 깊이 천착하였고, 자신의 視覺으로 朱子學을 再構成하여 朝鮮 주자학의 理論 體系를 定立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 때의 代表的 學者로는 宇宙의 本體를 太虛로 규정하면서 太虛를 氣로 把握하고, 그것은 時間과 空間의 制約을 벗어나 永遠히 어디에나 존재한다고 주장한 徐敬德과 주자학의 본체 槪念인 太極을 正確하게 규정한 李彦迪을 들 수 있다.
朝鮮 朱子學을 정립하는 데에는 위와 같은 思想家들의 노력이 前提가 되었지만, 그것을 더욱 深化시킨 이는 역시 李滉과 李珥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朱子學에 대한 깊은 理解를 基礎로 主體的인 哲學體系를 構築함으로써 조선 朱子學의 세계를 本格的으로 열어 놓았으며, 이들의 硏究 主題는 그대로 朝鮮 朱子學의 硏究主題가 되었다. 특히 李滉의 思想은 日本 에도(江戶) 時代 儒學에 커다란 影響을 주어 그 獨步性을 確認받기도 하였다.
李滉의 방대한 思想體系는 窮極的으로 理의 尊嚴性과 絶對性을 確保하는데 集中되었다. 이 思想體系는 李滉과 奇大升이 주고 받았던 이른바 四端七情 論爭을 통해 具體化되었다.
2. 退溪 李滉과 高峯 奇大升의 生涯
1] 退溪 李滉의 生涯
이황은 1501년,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에서 진성 이씨 집안 8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머니가 홀로 집안 살림을 꾸려가야 했다. 모친 박씨는 자녀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너희들을 寡婦의 자식이라서 배우지 못했다고 업신여기는데, 너희들이 백 배 努力하지 않는다면 어찌 이런 비난을 면할 수 있겠느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아마도 母親의 嚴格한 敎育이 李滉에게 어린 시절부터 誠實하게 공부하는 態度를 만들어 준 듯 하다. 1)
이황은 어려서 동네 노인에게서 <千字文>을 배워 글자를 익혔고 12세 때부터 숙부로부터 本格的인 공부를 배웠으며, 21세 무렵에는 침식을 잊을 정도로 <周易>에 몰두하기도 했다. 그러나 젊어서는 틈틈이 집안일을 도와야 했기 때문에 늦은 나이에야 벼슬에 나갈 수 있었다. 27세 때부터 과거시험을 보기시작 했지만 33세가 되어서야 最終 關門인 대과에 합격하여 그 이듬해부터 벼슬에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황의 벼슬길은 순탄치가 않았다. 당시 權力者인 김안로를 찾아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초기부터 미움을 사서 역사를 기록하는 史官의 직책에 推薦되었지만 임명받지 못한 적도 있다. 그 뒤 司諫阮이나 司憲府 등에서 벼슬을 지내기도 했고, 충청도와 강원도의 어사로 파견되기도 하였지만, 정계를 떠나는 49세 까지 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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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교빈, 「한국철학에세이」 ,서울, ; 동녘, 2006. P.132--133.
궁궐 안의 책들을 관리하고 임금의 發表文을 짓는 弘文館, 外交文書를 擔當하는 승문원, 國史編纂을 도맡는 春秋館, 임금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經筵官의 관리를 지냈다.
이황은 43세 무렵부터 機會만 생기면 벼슬에서 물러나 自然에 묻혀 지내려고 하였다. 여러 번 핑계를 들어 벼슬을 辭讓하였고, 고향 마을에 암자를 지어놓고 그 곳에 머물기도 하였다. 48세 때부터는 스스로 청하여 풍기와 단양의 군수를 맡고 있다가 職責上 上官인 경상감사에게 3번이나 辭職書를 올렸지만 답이 없자 허락도 받지 않은채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 온다. 이 일로 두 계급 降等 처분까지 받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가 자신의 호를 退溪라고 지은 것도 이 무렵이다. 퇴계는 복잡한 세상에서 물러나 시냇가에 머무른다는 뜻이다. 본래 그의 고향 마을에는 토끼 냇물이라는 뜻의 토계가 흐르고 있었는데, 이황은 이 냇물 이름을 退溪로 고치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고 한다.
이황은 지금의 國立大學 總長에 해당하는 成均館 大司成이나 弘文館과 예문관의 大提學, 禮曹判書, 吏曹判書 등을 지내기도 하였지만 틈만 나면 물러나와 자연에 묻혀 지냈으며, 제자들이 많이 몰려들자 장소를 도산으로 옮겨 서원을 짓고 그 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많은 글을 쓰면서 남은 생애를 보냈다. 특히 韓國 哲學史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기대승과의 四端七情 論爭이나 훌륭한 임금이 되기를 바라면서 선조에게 올린 <聖學十圖>등이 모두 이 무렵에 나온 것이다.
이황이 살던 조선 중기는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한 때였으며, 무오. 갑자. 기묘. 을사 등 4대 사화가 모두 이 무렵에 일어났다. 따라서 연산군 때 태어나 중종. 인종. 명종. 선조 다섯 임금의 통치기간에 걸쳐 살았던 이황의 생애가 사실 4대 사화와 직접 얽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태어나기 3년 전에 戊午士禍, 4살 무렵 甲子士禍, 19세 때에 己卯士禍, 45세 때 乙巳士禍가 벌어진다. 특히 乙巳士禍 때는 퇴계 자신도 관직에서 몰려났고, 감사를 지내기도 한 그의 형은 곤장을 맞고 귀양을 가다가 매맞은 후유증으로 도중에 죽고 말았다. 이 같은 시대상황이 그를 정치에 參與하기 보다는 물러나 산림에 묻히도록 하였을 것이고, 이황의 哲學에는 그러한 시대 상황에 대한 인식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이다.
퇴계의 저술 중 代表的인 것들로는 <聖學十圖>, <계몽전의>, <주자서절요>와 다량의 서간문을 들 수 있으며, 대부분 <退溪集>에 실려 있다.
2] 高峯 奇大升의 生涯
高峯 奇大升은 (1527-1572)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性理學의 세계에서 태어나, 性理學의 理想을 實現하려 발버둥치다가, 46세의 이른 나이에 性理學的인 죽음을 맞았다. 그는 고부에서 객사하게 되었을 때도 병이 들어 공부를 계속하지 못하는 것을 恨歎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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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영두 역,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서울, 소나무, 2006. p. 607-608.
그의 이러한 성향은 그의 집안 내력이기도 하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사림의 節槪를 지켜왔다. 고조인 虔(건)은 대사헌을 歷任했으나 단종이 廢位되자 官職을 버리고 杜門不出한 絶義波였다. 그는 세조가 다섯 번 찾았으나 끝내 節槪를 버리지 않았다.
또 叔父인 遵(준)은 기묘사화 때 조광조와 함께 죽임을 당한 사림파의 거두였다.
그의 부친 進은 아우가 죽자, 집을 광주로 옮기고 벼슬도 사양한 채 오직 학문에만 힘썼다. 기대승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몰두하여 약관의 나이에 이미 성리학에 일가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일찍부터 권신들의 전횡에 철저히 항거하는 한편 이상에 충실하려는 사림의 태도를 분명히 했다.
기대승은 32세(1558) 때,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벼슬에 올랐다. 승문원 부정지를 시작으로 병조좌랑. 이조정랑의 要職을 거쳤으며, 성균관 대사성. 대사간.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의 관직 생활은 파란의 연속이었다. 신진사류의 領袖로 指目되어 勳舊派에게 쫓겨나기도 하고, 영의정 이준경과의 衝突 때문에 解職당하기도 했다. 이는 그의 剛直한 性稟과 不義와 妥協하지 않으려는 선비정신의 結果였다.
그는 임금 앞에서도 당당했다. 經筵 등을 통해 국가 기강 쇄신과 민생 보호를 역설했으며 奸臣들의 橫暴를 批判했다. 王道政治의 確立을 圖謀하는 先鋒長으로 言路를 넓게 열 것과 인심에 따를 것을 역설했다. 특히 國家紀綱을 바로잡기 위해 조광조. 이언적 등 士禍로 犧牲된 선비들을 復權시킬 것과 남곤. 윤원형처럼 선비를 탄압한 자들의 죄를 밝힐 것을 主張했다.
退溪는 마지막으로 물러나는 자리에서 선조에게 高峯을 학문하는 선비로 중하게 쓰도록 薦擧했다. 그러나 고봉의 기개는 너무나 强硬하고 主張은 銳利했다. 당시 복잡하게 얽힌 政治狀況 속에서 그는 實權을 잡은 대신들과 對立하는 일이 頻繁했다.
결국 그의 정치적 꿈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나자 선조는 곧바로 그의 經筵 講義를 蒐集하게 하여 <論思錄>으로 묶어 政治에 參酌케 하였으니, 그가 經筵에서 提示한 정치의 道理가 선조에게 깊은 感銘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3. 四端七情 論爭의 發端과 進行
1] 四端七情의 意味
四端은 孟子가 처음 사용한 槪念으로서 네 가지 실마리란 뜻이다. 孟子는 惻隱之心, 羞惡之心, 辭讓之心, 是非之心의 4단을 바탕으로 삼아 인간은 날 때부터 착한 本性을 지녔다고 주장했다. 4단 가운데 맹자가 가장 중시한 것은 惻隱之心으로, 이는 남의 어려움을 보았을 때 마음속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맹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우물을 향해 기어가 막 물속에 빠지려는 것을 본다면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깜짝 놀라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이 생긴다고 하였다. 그 마음의 결과가 위험을 무릅쓰고 아기를 구하는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측은지심 외에 자기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잘못을 미워하는 것이 羞惡之心이며, 남에게 양보하는 辭讓之心, 옳고 그름을 따지려는 是非之心이 곧 4단인데, 이 4가지 실마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만일 이 들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하였다. 여기서 측은지심이 잘 발전하면 仁이 되고, 수오지심은 義가 되며, 사양지심은 禮가, 시비지심은 智가 된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4단은 仁義禮智의 실마리인 셈이다.
7정은 4단과는 차원이 다른 감정이다. 7정의 표현은 <禮記>에 나타나는데, 이는 喜. 怒. 哀. 懼. 愛. 惡. 欲으로, 기뻐함. 성냄. 슬퍼함. 두려워함. 사랑함. 미워함. 욕심냄을 말하는데, 이 7가지 감정은 사람들이 배우지 않고서도 저절로 그렇게 할 줄 아는 것 이라고 한다.
사실 4단이나 7정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다만 4단이 마음속에 있는 순수한 道德的 感情이라서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기만 하면 언제든 선으로 歸結되는 것이라면, 7정은 밖으로 드러날 때 지나치거나 모자라면 그 결과가 악이 될 수도 있는 ‘一般的인 感情’인 셈이다. 이황과 기대승의 論爭은 바로 4단과 7정이 무엇을 根據로 나오며 서로 어떤 關係에 있는지를 따진 것이다.
2] 論爭의 發端
四端七情 論爭의 發端은 동시대의 학자 秋巒 鄭之雲이 작성한 <天命圖>를 李滉이 修正하면서 비롯되었다. 본래 정지운은 동생(정지림)을 가르치기 위해 [天命圖]와 圖解를 作成했는데 그 내용이 세상에 流布되면서 李滉도 이를 보게 되었다. 정지운이 “4단은 이에서 발한 것이고 7정은 기에서 발한 것이다 (事端發於理 七情發於氣)”라고 작성했던 부분을 “4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7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 (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로 고치자 (정지운이 이황의 견해를 따라 새로 <천명신도>를 작성하게 됨) 이에 대해 기대승이 異義를 提起하면서 비롯되었다. 이에 따라 이황과 기대승은 서로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서로의 입장을 說明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四端七情 論爭으로 장장 8년간 계속된다.
이 논쟁은 表面的으로는 이황과 기대승 두 학자 간의 個人的 關心事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당시의 학계에 朱子學의 理氣論과 心性論에 대한 두 가지 相異한 解釋 方式이 共存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3] 論爭의 進行
奇大升은 四端七情에 대한 자신의 見解를 整理하여 李滉에게 便紙를 보내게 되고 이황이 다시 기대승에게 和答을 하는 형태로 本格的인 論爭에 접어들게 된다. 우선 각 편지의 要旨를 간추리고 주요 論點이 어디에 잇는지 整理해 보기로 한다.
1) 奇大升의 제1서
이 편지는 기대승이 처음으로 四端七情에 대한 자신의 立場을 提起한 <高峯上退溪四端七情說>이다. 여기에 나타난 高峯의 論旨는 論爭이 끝날 때까지 基本的으로 바뀐 것이 없다. 요지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3)
-인심이 아직 發하지 않은 것을 성이라 하고, 이미 발한 것을 情이라 한다.
-성은 善하지 않음이 없고, 情에는 善과 惡이 다 같이 있다.
-4단과 7정의 區別은 자사와 孟子가 말하고자 하는 意圖의 差異에서 생긴 것이지 元來 7정 외에 다시 4단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4단은 理에서 發하여 善만 있고 7정은 氣에서 發하여 善도 惡도 있다고 말하면, 이는 理와 氣를 두 가지 物件으로 나누는 것이 된다. 이렇게 되면 7정은 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4단은 氣를 타지 않는다는 意味가 된다.
-‘4단의 發은 순리이기 때문에 선하지 않음이 없고 7정의 발은 기를 겸하였으므로 선악이 있다’고 고쳐 表現해도 옳지 않다.
-성이 발할 때에 기가 干涉하지 못하여 본연의 선이 곧바로 完成되는 것이 孟子가 말한 4단이다. 이것이 순수하게 천리가 발한 것이기는 하지만 7정 밖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로 발하여 중절한 7정 중의 苗脈일 뿐이다. 따라서 4단과 7정을 대거호언해서는 안 된다.
-주희가 성정을 논할 때에는 항상 四德과 四端을 가지고 말했는데 이는 사람들이 깨우치지 못하고 기를 가지고 성을 말할까 염려해서 이다. 그러나 학자들이 理가 기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기 중에서 過不及이 없이 자연스럽게 발한 것이 바로 理의 본체와 같은 것임을 알고 여기에 힘쓴다면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高峯의 問題 提起는 退溪가 “四端은 理가 發한 것이고 七情은 氣가 發한 것”이라 하여 四端과 七情을 각각 理와 氣에 분리 소속시킨 것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퇴계는 다음 편지에서 後退하기는커녕 사단과 칠정을 本然之性과 氣質之性에 連繫시킴으로써 자신의 立場을 도리어 强化하기 시작했다.
2) 李滉의 제1서
退溪는 자신의 立說에 無理가 있음을 認定하면서도 長文의 편지를 통해 자신의 主張이 妥當함을 설명하고, 아울러 고봉의 주장을 일부는 首肯하면서도 자신의 의견과 다른 점을 反駁하기 시작했다. 이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4)
-四端과 七情은 모두 情이지만 나아가서 말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명칭이 생겼다고 하는 것이 옳다. 리와 기는 서로 기다려서 체가 되고 서로 의지하여 용이 되기 때문에, 리 없는 기가 있을 수 없고 기 없는 理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나아가서 말하는 것이 다르다면 區別하지 않을 수 없다.
-자사와 孟子가 말한 성은 모두 理氣가 부여된 가운데 나아가서 理의 本然處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지적한 것이 理에 있었지 氣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성이 순선무악하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사와 孟子는 도체의 완전함을 투철히 보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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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국철학사상사연구회, 논쟁으로보는 학국철학, 서울, 예문서원, 1998. p. 156
4)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상게서, p. 159-160.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한 것이지 하나만 알고 둘을 몰라서가 아니다. 정말 기를 섞어서 성을 말한다면 성의 본선을 드러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四端은 仁義禮智의 성에서 發한 것이고, 七情은 外物의 형체에 感觸되어 마음속에서 움직여 외부에 따라 발출된 것일 뿐이다.
-사단과 칠정은 모두 리와 기를 떠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소종래를 따라 각각 중시하는 것을 가리켜 말한다면 어떤 것은 理이고 어떤 것은 氣라고 말할 수 있다.
-최근에 <주자어류>에서 맹자의 사단을 논한 것을 보았는데 사단은 理의 발이고 七情은 氣의 發이라고 되어 있었다. 이를 보고서야 나의 의견이 크게 잘못되지 않았음을 믿을 수 있으며, 애초에 정지운의 설도 병통이 없었으므로 고칠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만 내가 識見이 부족하여 說明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선유들의 설명만큼 명확하지 못하다. 청컨대 주희의 본설로 대신하고 우리의 설명을 削除하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3) 奇大升의 제2서
退溪의 편지를 받은 高峯은 當初 자신이 提起했던 問題點이 解決되기는커녕 도리어 강한 反駁을 받게 되자, 다시 論點을 정리하여 더욱 具體的으로 퇴계의 立場에 무리가 있음을 指摘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고봉은 다시 한번 사단과 칠정의 關係를 規定하는 한편 退溪처럼 리와 기를 나누어 說明하는 方式의 弱點을 指摘하고 있다.
-情은 理와 氣를 包含하기 때문에 善惡이 있다는 것이다. 理氣의 묘합 가운데 理만을 指摘하여 말한 것이 四端이고, 리와 기를 다 같이 말한 것이 七情이다. 七情 중에서 발하여 중절한 것이 天命의 체이며 本然의 체로서 四端이고, 중절되지 않은 것은 기품물욕으로 인해 이루어진 것으로 성의 본연이 아니다.
-사단과 칠정을 대거호언하여 도식의 位置를 달리하면 說明하기는 좋지만 두 개의 정과 두 개의 선이 있는 것으로 의심하게 되므로 옳지 않다. 만약 통론하여 사단은 리에서 발하고 七情은 기에서 발한다고 하면 안 될 것이 없겠지만, 그림을 그려서 사단은 理 쪽에 두고 七情은 氣 쪽에 표시하면 분별이 너무 심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게 된다.
-性을 말할 때 本性과 기품을 나누는 것은 각각 리와 기로 나누어 별도의 사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성이 있는 곳을 따라 말한 것이다. 정은 본성에 근거하지만 성이 기질에 떨어진 뒤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리와 기를 겸하여 선악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단과 칠정을 리와 기에 본속시켜 정이 두 가지로 발동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
-리와 기를 나누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은 誤謬가 발생한다. 우선 기라고 하면 리와 기를 함께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기만을 指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七情은 기로써만 설명해야 하므로 잘못이다. 리와 기는 서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정을 리나 기로서만 설명해서는 안된다. 이는 리와 기를 일물로 보려는 것이 아니다. 四端은 理에서 발하고 七情은 氣에서 發한다고 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칠정의 발은 리의 본체가 아니라고 하는데 이르게 된다.
-四端에도 기가 있고 七情에도 리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四端에도 부중절한 경우가 있다.
-주희를 종사로 섬기는 것은 當然하지만 그가 ‘理之發, 氣之發’이라고 한 것은 일시의 우언이다. 後學은 一般論을 보아야지 特殊한 境遇에 執着해서는 안 된다.
4) 李滉의 제2서
退溪는 앞서 보낸 제1서를 부분 改作해서 제2서 앞에 붙였다. 그러나 이 개정 본에서는 表現上의 微妙한 문제 때문에 생길 수 있는 誤解를 막기 위해서 修正한 것 외에는 대부분 제1서와 대동소이하고 논쟁의 내용에 직접적으로 影響을 미치는 부분도 없기 때문에 개정 본에 대한 分析은 省略하기로 한다.
퇴계는 제2서에서 자신이 스스로 錯覺했다고 인정한 부분도 있고, 고봉의 指摘에 따라 수정한 부분도 있음을 밝힌다. 그러나 이는 논쟁의 주 내용과 별 상관이 없는 내용이고 대부분의 論爭點은 여전히 一致하지 않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는 부분을 중심으로 퇴계의 제2서를 整理해 본다.6)
- 四端에도 기가 있고 七情에도 理가 있다는 것은 認定한다. 그러나 나아가 말하는 바에 따라 主理와 主氣의 다름이 있기 때문에 리와 기에 분리 소속시키는 것도 옳다.
-천지지성은 오로지 理만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이 때라고 해서 리만 있고 氣가 없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천하에 기 없는 리가 없다면 리만 잇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오로지 리만을 지적해서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기질지성에 비록 리와 기가 섞여 잇다 하나 어찌 기만을 지적해서 말할 수 없겠는가?
-七情과 氣의 關係는 四端과 理의 關係와 같다. 그 발 또한 혈맥이 있고 그 명칭 또한 모두 지적한 것이 있다. 그 때문에 중시하는 바에 따라 분리 소속시킬 수 있다. 四端 또한 外部 事物에 感應하여 움직이는 것은 七情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四端은 리가 발하여 기가 따르는 것이고 七情은 氣가 發하여 리가 타는 것일 뿐이다.
-사단이 기를 탄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孟子가 말한 것은 기를 타는 부분을 指摘한 것이 아니라 단지 순리가 발하는 부분을 指摘한 것이다. 그 때문에 인의 端緖이고 의의 端緖라고 말한 것이며 후대 사람들도 四端은 善한 部分만을 가려내서 말한 것이라고 한 것이다.
-四端과 七情은 사람이 말을 타고 출입하는 것에 比喩할 수 있다. 사람은 말이 아니면 出入할 수 없고 말은 사람이 아니면 길을 잃게 된다. 사람과 말은 서로 必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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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한국철학연구회, 전게서, p. 165-166
로 하며 떨어질 수 없다. 이를 두고 어떤 경우는 그 움직임을 모두 지적하는데 사람과 말이 다 그 가운데 있다. 四端과 七情을 總括하여 말하는 것이 이에 該當한다.
-같은 점을 基準으로 四端과 七情을 論하면 두 가지가 아니라는 主張은 근사하다. 그러나 四端과 七情을 대거해서 그 根源을 미루어본다면 理와 氣의 區分이 있다. 만약 본래 다름이 없다면 어찌 다른 名稱이 있겠는가? 따라서 칠정 밖에 다시 사단이 있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더라도 四端과 七情에 다른 意味가 없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 사단도 부중절한 경우가 잇다는 말은 매우 새롭다. 그러나 이것은 맹자의 본의가 아니다. 맹자는 단지 仁.義.禮.智를 基準으로 말하여 성이 본래 善함을 드러내려 했다. 그 때문에 情 또한 선한 뜻일 뿐이다.
5) 奇大升의 제3서
退溪의 回信을 받은 高峯은 좀더 강한 語調로 퇴계에게 다음과 같은 점을 解決해 달라고 要求한다. 곧 퇴계의 立場은 다음의 條件을 滿足시켜야만 成立할 수 있다는 것이다. 7)
-孟子가 理 중심의 일면을 가려내서 말한 것을 主理的 立場에서 말했다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자사가 統括하여 理氣를 겸하여 말한 것을 主氣的 立場에서 말했다고 할 수 있는가?
-비유컨대 천지지성은 하늘의 달과 같고 기질지성은 물 속에 비친 달과 같다. 비록 있는 위치는 다르지만 달이라는 점은 마찬가지다. 만약 하늘의 달은 달이라하고 물 속에 비친 달은 물이라고 한다면 곤란하다. 더욱이 四端七情 이라는 것은 바로 리가 기질 속에 떨어진 이후의 일이니 물 속에 비친 달과 흡사하다. 그 빛이 칠정의 경우는 밝은 경우도 있고 어두운 경우도 있는 것이며,四端은 유난히 밝은 것에 해당한다. 七情에 밝은 경우와 어두운 경우가 잇는 것은 물의 청탁에서 비롯된 것이고, 사단 중에서 부중절한 것은 원래의 빛은 밝지만 물결의 움직임을 면치 못했기 때문이다.
-喜怒哀樂 중에서 發하여 중절한 것은 理에서 발한 것인가, 氣에서 發한 것인가? 발하여 중절하고 施行했을 때 不善함이 없는 것은 사단과 같은가 다른가?
-‘사단은 리가 발하여 기가 따르는 것이고 七情은 기가 發하여 理가 타는 것’이라는 표현은 매우 精密하다. 그러나 七情은 理氣를 겸하고 있고 사단은 理가 발하는 側面만 지니고 있으므로, ‘情이 발하는 것은 혹은 理가 움직임에 기가 갖추어지고 혹은 기가 感應함에 理가 탄다’고 고치고 싶다. 기가 리를 따라 발하여 조금의 장애도 없는 것이 바로 理의 發이다. 만약 이를 度外視하고 다시 理의 發을 찾는다면 깊이 따지면 따질수록 더욱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理와 氣를 나누어 說明하는데서 비롯되는 弊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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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한국사상사연구회, 전게서, p. 168-169
-理와 氣의 關係는 太陽과 구름의 關係와 같다. 太陽은 본래 그대로이지만 구름의 가림에 의해 흐리고 맑음이 있다. 따라서 흐리고 맑음은 오로지 구름에 달린 것이다. 구름이 걷히면 太陽의 본래 모습이 완전히 드러나지만 元來의 모습 그대로일 뿐 더하고 보탠 것이 없다. 만약 理氣가 서로 발한다고 하면 이는 理의 情意, 計度, 造作을 認定하는 것이 되므로 주희의 말과 어긋난다.
여기서 高峯은 退溪의 入說에 대한 修正案을 提示하고 있다. 이것은 사단과 七情을 다 같은 情으로 보는 자신의 心性論 構造는 그대로 두고 퇴계의 立場-四端을 理가 發하는 것으로 보는-을 一部分 受容한 것이다. 이는 사단을 理가 發한 것으로 보았다는 점에서는 퇴계의 立場에 가까워진 것이기는 하지만, 基本的으로 사단과 七情의 關係를 相對的인 것으로 보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論爭을 原點으로 되돌린 것이나 다름 없다.
이 후 退溪는 高峯의 質問을 條目別로 나누어 답하는 형식으로 제3서를 作成했지만 보내지는 않는다. 그 대신 論爭을 마무리 하자는 意圖의 便紙를 보내게 되고, 이를 받은 고봉은 <四端七情後說>과 <總論>을 지어 退溪에게 보내온다. 이에 退溪는 두 번이나 편지를 보내 서로간의 差異點을 根本은 같은데 지말이 다르다는 것으로 指摘하면서 이 論爭을 끝낸다.
4. 退溪와 高峯의 立論 根據
1] 奇大升의 立論 根據
크게 두 가지의 根據를 지니고 있다.
첫째, 四端과 七情의 內包와 外延을 따질때 사단은 칠정 속에 포함되는 構造이므로 결코 相對的인 槪念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주희 心性論의 基本 命題라 할 수 있는 성정의 관계를 기준으로 본다면 사단이든 칠정이든 다 같은 情 임에 틀림 없다. 또 七情은 인간의 감정 전체를 지적한 것인데 비해 사단은 선한 경향을 지닌 일부분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부분은 당연히 전체 속에 포함될 수 밖에 없다.
둘째, 리와 기의 關係를 不相離의 立場에서 把握하는 것이다. 理와 氣의 不可分離성을 强調하는 입장에서 성정을 논하게 되면 理의 발동은 설 자리가 없다. 이는 그가 성을 ‘리가 기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곧 리와 기의 합체로 규정한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더욱이 주희가 리의 作用性을 認定하지 않았다는 것을 들어 理의 發動을 否認했을 뿐만 아니라, 천리의 발현이 순수한 그대로 完遂되느냐의 與否는 전적으로 氣에 달려 있다고 主張함으로써 理의 무조작성을 强調하고 있다. 理氣關係를 이와같이 把握하고 나면 四端七情의 槪念的 規定과는 相關없이 理發 自體가 成立할 수 없게 된다.
2] 李滉의 立論 根據
四端과 七情을 각각 理와 氣에 분속시키는 것이 이황의 立場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주희가 認定하지 않았던 理의 作用을 認定하고 있다. 이황의 이 같은 주장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다음의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먼저 기대승의 지적처럼 서로 포함되는 관계를 지니는 사단과 칠정을 상대적인 개념으로 대거할 수 있음을 논증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도 기대승이 提起한 四端과 七情의 槪念的 範疇를 否定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황은 인간의 多樣한 心理現像이 비록 本性에 의해 선을 保障받고는 있지만 그 중의 일부분, 곧 七情은 매우 위태로운 것으로 보았다. 七情은 형기에 의해 쉽게 악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그가 修養工夫로 持敬을 强調한 理由도 이 때문이다. 이처럼 그는 인간의 多樣한 心理 活動 속에 善한 부분과 그렇지 않는 부분이 혼재되어 있다고 보고 이들을 분명히 구분하는 것이 학문의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이황은 完全無缺한 本然之性이 그대로 發現되는 사단은 ‘완전한 것’이고 형기에 가려져 선이 保障되지 않는 七情은 ‘不完全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완전한 四端과 불완전한 七情이 동일한 발생 내원을 가진다는 것을 認定할 수 없었던 것이고, 그 때문에 각각을 理와 氣에 분속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기대승 에게는 사단이 七情이라는 상위 範疇 속에 포함되었던 構造가 이황에게서는 完全과 不完全으로 서로 등치된 것이다. 이는 인간의 道德性을 결코 욕구 속에 매몰되어 있는 微弱한 存在로 把握하지 않으려는 이황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그가 ‘理는 사물에 命令하기만 하고 명령을 받지 않는다’ 고 하여 理의 極尊無對性을 强調하는 데서도 確認할 수 있다.
5. 四端七情 論爭의 朱子學的 意義
朱子學의 基本 內容은 存在와 當爲의 關係를 理와 氣로써 解明하고 있다. 8)
그 方法으로서의 格物致知는 천하의 事事物物에 나아가 그 理致를 窮究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物’이라고 한 것은 物件으로서의 의미보다는 ‘事態’ 또는 ‘事件’으로서의 의미가 더 강하다. 여기서 事件이란 바로 君臣關係, 父子 關係 등을 總括하는 人倫關係를 의미한다. 따라서 朱子學에서 天下의 사사물물에 나아가서 밝히고자 하는 窮極的 對象은 사물에 내재하는 物理的 法則이 아니라 그러한 물리적 법칙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必然之理’곧 ‘事物當然之理’이다. 곧 일체의 사물을 지배하는 도덕적 標準을 客觀的 事物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다.
주희의 이러한 노력은 사실 萬有를 包括하는 존재의 근거(곧 理)에 統一性과 永遠性을 賦與하기 위한 試圖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의 실현을 위해 노력했던 사람은 理의 作用性을 强調한 이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선과 악을 서로 對應하는 槪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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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한국사상사연구회, 전게서. p 176.
把握함으로써 個人의 行爲에 대한 자기 反省的 修養을 무엇보다 重視한 李滉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때문에 李滉은 奇大升과는 반대로 四端七情도 相對的인 槪念으로 보아야 한다는 立場을 제기했다. 이와 같은 그의 입장은 四端이 七情 속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도리어 인간의 道德的인 행위에 制限을 가하는 것으로 보고 七情보다는 사단을, 악보다는 선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각각 理와 氣에 분리 소속시킴으로써 사단의 獨立性을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현실에서 선과 악이라는 문제를 주자학의 본래의 범주로 구분하지 않고, 양자간에 緊張關係를 造成함으로써 개인의 道德的 實踐을 더욱 절실하게 促求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두 사람의 論旨를 좀더 분명히 檢討하기 위해서는 四端에 대한 分析이 필요하다. 사단을 순선무악한 絶對的. 無條件的인 선으로 規定한다면 四端에는 부중절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황 식의 구분이 가능하다. 이는 ‘四端을 擴充하면 사해를 보존할 수 있다’는 孟子의 표현에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四端이 인간의 心理現像 일반을 指稱한 것이라면 주희와 기대승이 指摘한 것처럼 四端에도 부중절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이는 맹자가 말한 擴充의 意味를 四端이 正常的으로 作用하도록 해야 한다는 制限的 意味로 解釋할 때 可能하다.
요컨대 七情은 인간의 心理現像 一般, 곧 慾求를 指稱한 것이고 四端은 선한 부분만 추려서 말한 것이라면, 이황 식의 구분이 不可能할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칠정과 사단이 다 같이 인간 심리 일반을 지칭한 것이라면 기대승이 말한 것처럼 이황식의 구분이 불가능하다. 이처럼 對照的인 立論이 可能하다는 것은 朱子學의 심성론 체계가 그 자체로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논쟁이 주자학 이론에 대한 自己 檢證이라는 問題意識을 중심으로 展開됨으로써 心性論과 理氣論의 結合이 좀더 多樣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는 것은 커다란 成果라 할 수 있다.
이처럼 朝鮮의 朱子學은 李滉과 奇大升 간에 일어났던 四端七情 論爭을 통해 주자학의 기본 주제인 理氣論과 心性論을 結合시킴으로써 中國 朱子學과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獨自性을 獲得할 수 있었다고 評價할 것이다.
Ⅲ. 맺는 말
선생님께 답해 올리는 글
5월 초순에 편지 한 통을 닦아 멀리 자중에게 맡겨 선생님께 전해 주기를 부탁했습니다만, 그 뒤 소식이 끊겨 어떻게 지내시는지 살피지 못했습니다. --중략--
전에 四端七情說에 대해 비루하고 막혀 통하지 않음을 헤아리지 않고 저의 좁은 소견을 남김없이 말씀 드렸던 것은, 오로지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아 진실로 옳은 것을 얻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더러 의견이 다른 논의가 없지 않았습니다. 이는 제 소견에 따라 말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지, 결코 일부러 어지럽힌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찍이 회답으로 주신 絶句 한 마리를 받고는, 참으로 아득하여 다시는 새롭게 아뢸 기회가 없겠다고 생각했으므로, 오랫동안 여쭙지 않았습니다. 생각하건대 선생님께서는 한가로운 가운데서도 깊이 연구하시어, 더욱 정밀하고 자세하며 더욱 밝아지셨을 것입니다. 저도 마침 한적한 때를 이용하여 다시 생각하고 검토해 보니, 지난날의 주장에서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점들이 꽤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後說 한 편과 총설 한 편을 써서 전해 드리고자 했습니다만, 인편이 없어서 부치지 못했습니다. 지금 아울러 올리오니 살펴 주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
湖南과 嶺南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사람을 시켜 편지를 부탁하기 어렵거니와, 편지를 맡겨 서울로 보내는 것 또한 쉽지 않습니다. 구구히 쏠리는 마음을 이을 길이 없으니, 어찌해야 할지 한탄스럽습니다. 지난해 주신 편지에 樂安 수령에게 부탁해 편지를 전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만, 이곳에서 낙안까지 거의 이틀 길입니다. 제가 평소 그 수령과 평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가 아니어서 함부로 찾아가기가 어려운 까닭에, 오래도록 연락 드리지 못했습니다. 나머지는 갖추어 아뢰지 못합니다.
도를 위해 스스로 아끼시기를 빌면서, 삼가 절하고 답장을 올립니다.
병인 7월 15일, 후학 대승이 절하며 올립니다. 9)
명언에게 절하며 답합니다. -- 중략--
四端七情에 관한 總說과 後說 두 편의 논의가 매우 명쾌하여, 트집을 잡아 어지럽게 공격하는 병통이 없었습니다. 안목이 두루 바르고 마땅하니, 홀로 밝고 너른 근원을 보았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지난날의 견해의 차이를 털끝만큼 작은 것까지 분별하여, 곧바로 자신의 주장을 고쳐 새로운 생각을 따랐습니다. 이것은 더욱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것이니, 그대의 결행은 참으로 보기 좋았습니다. 다만 저의 주장 가운데 ‘성현의 기쁨. 노여움.슬픔.즐거움[喜怒哀樂]’에 대한 것과 “각각 淵源[所從來]이 있다” 같은 주장에 대해 그대가 논한 부분에는 진실로 편치 않음이 잇는 듯하니, 그 사이를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울러 그대가 보여주신 ‘人心. 道心’ 등의 설은 모두 다양한 측면에서 곱씹어보고 가르침을 구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여기까지 다루지 못했으니, 자중이 서울로 가는 날 삼가 하나하나 가르침을 청하겠습니다. 추워졌습니다. 때에 맞게 몸조심하기 바라면서 삼가 절하고 회답합니다.
병인 윤10월 26일, 황은 머리 숙입니다. 10)
상기의 내용은 退溪와 高峯 사이에 오고 간 편지의 일단이거니와 참으로 아름답고 바람직한 내용이라 아닐 수 없다. 33세의 젊은 선비 奇大升이 자신보다 26세 위인 大學者 李滉에게 먼저 문제제기를 하면서 시작된 논쟁이 1559년부터 1566년 까지 8년간 아홉 편 정도의 편지가 오고 간 ‘四端七情 論爭’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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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0), 김영두 역,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서울, 소나무, 2003. p. 153--161.
이제 당해 論爭을 통해 퇴계가 四端과 七情을 이와 기로 가르려고 한 根本的 理由를 살펴보고자 한다. (반면 고봉은 사단과 칠정을 합쳐보려 하였음)
퇴계는 사람을 두 종류로 보았다. 하나는 밖으로 드러나는 실천의 근거가 주로 그 사람의 마음속의 四端에 있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주로 七情에 있는 경우이다. 전자는 옳은 실천을 주로 하는 사람으로서 君子라 불리고, 후자는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서 小人으로 불린다. 전자의 실천이 항상 道德的으로 옳은 까닭은 그 실천의 발단이 자신의 순수한 本性인 理에 있기 때문이고, 후자의 행동이 도덕적으로 어그러지기 쉬운 까닭은 그러한 실천의 발단이 惡의 根源인 氣에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물론 군자도 소인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속에 理와 氣가 함께 들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사단이나 칠정에도 리와 기가 함께 들어 있다. 그렇지만 퇴계는 리와 기가 같이 있다고 해서 그 둘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본다면, 결국 사사로운 욕심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純粹한 感情과 慾心이 섞인 감정을 하나로 보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마침내 옳고 그름을 생각하는 君子와 利害關係 만을 생각하는 小人을 區分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사단과 칠정을 구분하려는 퇴계의 생각 속에는 하늘과 땅의 차이와도 같은 군자와 소인을 결코 뒤섞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있는 것이다.
哲學은 언제나 그 時代狀況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인바, 위와 같은 퇴계의 생각도 士禍期를 살았던 자신의 삶과 밀접한 聯關이 있음을 理解할 必要가 있다. 士禍란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에 밝고 그 옳음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던질 수 있었던 사림파와 자신의 利害關係를 따지는 일에 앞서고 利益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파렴치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謀利輩들 간의 싸움이었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선비精神이란 이 같은 사림파들의 批判意識을 가리킨다. 선비들의 批判精神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의 氣槪에서 나온 것이다.
앞에서 살핀 論爭에는 인간의 道德的 行動과 非道德的 행동을 合理的으로 說明하려는 퇴계의 努力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바람직한 人間像을 提示하려고 한 退溪의 意圖를 통해 오늘의 우리들도 歷史를 뛰어 넘는 敎訓을 얻게 되는 것이다. ---끝---
※ 참고문헌
김교빈, <한국철학에세이>, 동녘, 2006.
김영두 역,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소나무, 2003.
한국사상사연구회, <강좌 한국철학>, 예문서원, 1996.
한국사상사연구회, <논쟁으로 보는 한국철학>, 예문서원, 1998.
한국사상사연구회, <조선
관련자료
정해관님의 댓글
상황에 적합하다, 적합하지 않다의 판단을 옛날에는 중절(中節), 부중절(不中節)이라고
했다. 가령, 초상집에서 무례한 인간을 혼내다가 소란을 일으키면, 그 의도는 알겠으나
부중절의 사태였다. 왜냐하면 초상집은 그에 걸맞는 숙연한 분위기가 있기 때문이다.
부분적인 무례보다 전면적인 소란이 더 상황을 좋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설날 자식놈이 차례상 앞에서 장난을 친다. 아직 그럴 나이이기도 하지만 옛부터 듣고 경험했던 지라 참지 못하겠다. 어쩔수 없이 차례가 끝날때 까지 참았다.
차례상을 물리고 "니가 뭔데 임마 감히 내 아버지 밥상머리에서 장난을 쳐" 하면서 아들 자식을 족쳤다. 몇대의 꿀밤과 꾸지람으로 성에 차지 않는다.
예문을 들어준다. 약 아버지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말도 않되는 예를 들어 설득시키려한다.
처가집가는 차안에서 아내가 자식보고 아버지에게 사과하라고 한다. 하지만 녀석은 썩 내키지 않는지 한시간 가량을 버티고 있다. 나도 질수 없어 또 꾸지람을 내놓는다. 그래도 녀석은 자기가 채벌을 받을 만큼 잘못이 아니라는듯 버티고 있다. 한시간이 훨씬 지난뒤 아내가 제안을 한다. 듀얼디스크(유희왕보면 알아요)을 사주기로 제안하면서 사과을 억지로 받아낸다.
아버지에대한 미안함과 자직에 대한 미안함이 겹쳐온다. 하지만 다음번에 또 이런 부중절을 겪지 않으려면 어쩔수 없다고 자위한다.
올해들어 이런땐 성질을 내야하는데..하는경우가 더러 생긴다. 하지만 참는다. 또 참는다. 그리고 또 참는다. 그리고 또 참는다. 참는다... 부 중 절
정해관님의 댓글
그건 그렇고, 이런 훌륭하신 질문과 제의를 주왕산 부근의 형제들이 했더라면 금상첨화 였겠다 그런 생각입니다. (하기야 이판대감께서도 한때 부산에서 큰 일 하셨으니까 그런 의미도 있겠지만)
주지하다시피 퇴계와 고봉은 당시 영, 호남을 대표하는 유학자로서, 그 시절 편지 한통을 주고 받으려면 몇개월이 소요되는데도 불구하고 장장 8년 인가를 그렇게 '논쟁' 했다는 군요.
그점에 비추어 지금은 얼마나 편리한 '놀라운 세상'임을 다시한번 실감하게 됩니다.
존경하는 주왕산, 오륙도 쪽의 형제자매님들!
월출산 정기 받음직한 명렬도사님과 쌍벽을 이룹시다!
쇠섬(광양)출신의 소 詩人님과 '직지의 게임'이라도 해 보십시다!
여기서 '직지의 게임'이란 순전히 필자의 억지 造語임. 정현씨 고향의 직지사의 유래가 '자로 재지 않고 손가락으로 쟀다'는 소리 듣고 유추해서 맹글어 본 말. (누구 손가락 길이가 더 길가요? 로 이해해 봅시다)
이판기님의 댓글
어렵고 조금은 따분한 주제의 논쟁이나 눈을 부릅뜨고 끝까지 읽었습니다. 후학이 대견하지요?
정리해서 흐름을 파악하려고 복사를 했습니다
이왕 시작하셨으니 조선시대 영남학파의 퇴계와 기호학파의 율곡의 학문의 입장과 차이점 또는 론점등를
어리석은 우공도 이해하기 쉽게 올려 주세요 한자가 생략되면 이해하기 어려운 말은 되도록 한자를 써 주시는 친절도 아울러 부탁합니다 (예를 들면‘사단중에서 부중절한....’ 여기서 부중절의 의미가 잘 잡히지가 안아요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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