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우람기( 西山遊覽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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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山遊覽記
한양(漢陽)의 산이 복정(覆鼎)에서부터 산줄기가 뻗어 내려와 왕도(王都)의 진산(鎭山)이 된 것을 공극(拱極)이라고 일컫는다. 이 공극에서 갈려 나와 산등성이가 불쑥 솟아나 꾸불꾸불 뻗어 내려오다가 서쪽을 끼고 돌면서 남쪽을 감싸 안고 있는 것을 필운(弼雲)이라고 한다. 나의 집은 이 두 산의 아래에 있어서 아침저녁으로 들락날락하면서 일찍이 산을 가까이에서 접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산 역시 다투어 내 집의 창과 실내로 들어오려 하여 친근함을 더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항상 자리에 누운 채로 바라보고 즐겼다. 그러면서도 일찍이 산속의 바위며 골짜기 사이에는 오간 적이 없었다.
갑인년(1614, 광해군6) 가을에 어머님께서 눈병이 나셨다. 그런데 들리는 소문에 서산(西山)에 신통한 샘이 솟아나는데 병든 사람이 머리를 감으면 이따금 효험을 보는 경우가 있다고 하였다. 이에 마침내 날을 잡아 산에 올랐는데, 큰형님과 나와 광찬(光燦)과 광소(光熽)가 함께 따라갔다.
인왕동(仁王洞)에 들어가서 고(故) 양곡(陽谷) 소 이상(蘇貳相)이 살던 옛집을 지났는데, 이른바 청심당(淸心堂), 풍천각(風泉閣), 수운헌(水雲軒)으로 불리던 것들이 지도리는 썩고 주춧돌은 무너져 거의 알아볼 수가 없었다. 양곡은 문장(文章)으로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어 이미 귀하게 된데다가 부유하였으며, 또한 심장(心匠)이라고 칭해졌으니, 집을 지으면서 교묘함과 화려함을 극도로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교유하였던 선비들도 모두 한때 문장으로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이었으니, 그들이 읊었던 것 중에는 필시 기록되어 전해질만한 것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채 백 년도 못 되어서 이미 한둘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러니 선비가 믿고서 후세에 베풀어 줄 수 있는 것은 여기에 있지 않은 것이다.
이곳을 지나서 더 위로 올라가니 절벽에서는 폭포가 쏟아지고 푸른 잔디로 덮인 언덕이 있어 곳곳이 다 볼만하였다. 다시 여기를 지나서 더 위로 올라가자 돌길이 아주 험하였으므로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 다시 한 번 쉰 다음 샘이 있는 곳에 이르니, 지세가 공극산의 절반쯤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높이 솟은 바위가 하나 있는데 새가 날개를 편 듯이 지붕을 얹어 놓은 것 같았다. 바위 가장자리가 파여 있는 것이 처마와 같아 비나 눈이 올 때 예닐곱 명 정도는 들어가 피할 만했다. 샘은 바위 밑 조그만 틈새 가운데로부터 솟아 나왔는데, 샘 줄기가 아주 가늘었다. 한 식경쯤 앉아서 기다리자 그제야 겨우 샘 구덩이에 삼분의 일쯤 채워졌는데, 구덩이의 둘레는 겨우 맷돌 하나 크기 정도이고 깊이도 무릎에 못 미칠 정도여서 한 자 남짓 되었다. 샘물의 맛은 달짝지근했으나 톡 쏘지는 않았고 몹시 차갑지도 않았다. 샘 근처의 나무에는 여기저기 어지럽게 지전(紙錢)을 붙여 놓은 것으로 보아 많은 노파들이 와서 영험을 빌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석굴의 앞에는 평평한 흙 언덕이 있었는데 동서의 너비가 겨우 수십 보쯤 되어 보였다. 비로 인해 파인 곳에 오래 묵은 기와가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바로 인왕사(仁王寺)의 옛 절터인 듯하였다. 어떤 이가 북쪽의 맞은편 골짜기에도 무너진 터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옛 자취가 다 없어졌으니 분명하게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일찍이 듣기로는 국초(國初)에 도읍을 정할 때 서산의 석벽에서 단서(丹書)를 얻었다고 하는데, 이 역시 어느 곳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산 전체가 바위 하나로 몸체가 되어 산마루부터 중턱에 이르기까지 우뚝 선 뼈대처럼 가파른 바위로 되어 있고 깎아지른 듯한 봉우리와 겹쳐진 절벽이 똑바로 서고 옆으로 늘어서 있어 우러러보매 마치 병기를 모아 놓고 갑옷을 쌓아놓은 것과 같아 그 기묘한 장관을 이루 형용하기가 어려웠다.
산줄기가 이어지면서 산등성이를 이루고 여러 산등성이가 나뉘어 골짜기가 되었다. 골짜기에는 모두 샘이 있어 맑은 물이 바위에 부딪치매 수많은 옥이 찰랑거리는 것 같았는바, 수석(水石)의 경치가 실로 서울에서 으뜸가는 곳이었다. 그러나 한스러운 것은 금령(禁令)이 해이해져 산 전체에 아름드리 큰 나무가 없다는 것이었다. 만약 소나무나 전나무 그늘이 있고 단풍나무나 녹나무가 언덕을 둘러싸고 있어 솔솔 부는 바람 소리를 들으면서 바람 맑고 달빛 밝은 저녁에 느릿느릿 서성인다면 봉호(蓬壺)나 곤랑(崑閬)도 어찌 부러워할 필요가 있겠는가.
등 뒤로는 구부러진 성이 아주 가깝게 보였다. 하인을 보내어 올라가는 길을 찾아보게 했는데, 길이 험하여 올라갈 수가 없다고 하였다. 광찬과 광소가 빠른 걸음으로 갔다가 오더니 자기들이 본 것을 잘 말해 주었는데, 사현(沙峴)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개미처럼 작게 보였으며 삼강(三江)의 돛단배들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헤아릴 수가 있다고 하였다. 내 나이가 그리 많은 것도 아닌데 기력이 너무 쇠하여 가까운 거리임에도 오히려 더 걷지를 못하고 험한 길을 당하여 멈춰 서고 만 데 대해 스스로 탄식하였다. 그러니 이런 기력으로 어찌 벼슬자리에 나아가 있는 힘을 다해 일하면서 내가 젊어서 배운 것을 펼쳐 도를 행하여 남에게 미치게 할 수가 있겠는가.
큰형님과 더불어 남쪽 봉우리에 오르니, 산봉우리 아래에 술 곳간이 있었다. 두 채를 서로 마주 보게 지어 놓았는데 십여 칸 정도가 서로 이어져 있었다. 술 냄새가 퍼져 나가 새들조차 모여 들지 않으니, 모르겠다만 얼마나 많은 광약(狂藥)이 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온통 취하게 하였던가.
앞쪽으로는 목멱산(木覓山)이 보이는데 마치 어린아이를 어루만지는 듯하였다. 남쪽으로는 성이 산허리를 감고 구불구불 이어진 것이 마치 용이 누워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아래에 어찌 용같이 훌륭한 인물이 누워 있겠는가. 지금 반드시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 아래로 수많은 여염집의 기와지붕이 땅에 깔려 있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이 마치 물고기의 비늘과 같았다. 임진년(1592, 선조25)의 난리를 치른 뒤 23년이 지나 백성들의 수가 날로 불어나 집들이 많기가 이와 같이 성대하게 되었다. 그중에는 남자들의 숫자가 수십만 명을 밑돌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요순(堯舜)을 도와 당우(唐虞) 시대의 태평성대를 이룰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 한갓 나라의 힘은 더욱 약해지고 백성들의 삶은 더욱 초췌해지고 변방의 방비는 더욱 위태롭게 돼 지금과 같이 쇠퇴해지는 데 이르게 하였다. 어찌하여 저 푸른 하늘은 인재를 내려 주는 것이 이렇게도 인색하단 말인가. 아니면 하늘이 인재를 내려 주긴 했는데 쓸 줄을 몰라서 그런 것인가? 어찌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시대의 운명 탓이 아니겠는가.
경복궁의 동산은 텅 비었고 성은 허물어지고 나무는 부러졌으며 용루(龍樓)와 봉각(鳳閣)은 무성한 잡초로 뒤덮여 있었다. 그런 가운데 단지 경회루 연못에 있는 연잎이 바람에 뒤집히면서 저녁 햇살에 번쩍이는 것만 보였다. 앞에서는 어진 인물을 막고 나라를 그릇되게 하여 전쟁을 불러들이고 온갖 고난을 겪게 하였으며, 뒤에서는 부추기고 이간질하면서 임금께 아첨을 하여 간사한 말이 행해지고 법궁(法宮)을 황폐해지게 하였으니, 간신의 죄를 어찌 이루 다 주벌할 수 있겠는가.
동궐(東闕)이 쌍으로 우뚝 솟아 있고 화려한 집들이 늘어서 있으며, 금원(禁苑)의 숲에는 소나무와 잣나무가 빽빽한 가운데, 호분(虎賁)과 용양(龍驤)은 궁궐을 깨끗이 청소하고 임금의 행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왕자(王者)의 거처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본디 운수에 달려 있는 것이며, 임금다운 임금이 즉위하여 세상을 다스리는 것도 때가 있는 것이다.
흥인문(興仁門)의 빼어난 모습이 동쪽을 향하여 우뚝 서 있고 종로(鍾路)의 큰길이 한 줄기로 뻥 뚫려 있었다. 길 좌우에 늘어선 상점은 많은 별이 별자리에 따라 나뉘어 있는 것처럼 반듯반듯하게 차례대로 늘어서 있었다. 그 사이로 수레와 말이 오갔으며, 달리는 사람과 뛰는 사람들이 허둥지둥 분주하게 오갔는데, 그들은 모두가 이익을 도모하는 자들일 것이다. 그러니 당나라 사람의 시에 이른바 “서로 만나느라 늙는 줄도 모른다.〔相逢不知老〕”라고 한 것은 진실로 뛰어난 구절이다.
불암산(佛巖山)은 푸른빛으로 서 있는데 바라보니 손으로 움켜잡을 수 있을 것처럼 가깝게 보였다. 바위 봉우리가 빼어나게 솟은 것이 예사로운 모습이 아니었다. 만약 왕실을 가까이에서 보익하여 동쪽의 진산(鎭山)이 되어 서쪽과 남쪽과 북쪽의 세 산과 더불어 함께 우뚝 솟아 있었다면, 실로 도성의 형세를 장엄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멀리 서울을 수십 리 벗어난 곳에 있어 마치 거친 들판으로 달아나 있는 것처럼 보이는바, 조물주가 사물을 만든 뜻이 참으로 애석하였다.
아, 조석으로 생활하면서 아무런 생각도 없이 접하던 산을 태어난 지 45년이나 지난 오늘날에서야 비로소 한 번 올라 보았다. 천지는 잠시 머물러 가는 주막인 거려(蘧廬)이고, 희서(羲舒)는 비탈길에 굴러 가는 구슬과 같은바, 부생(浮生)의 백년 세월은 이 우주에 잠시 몸을 의탁한 것이다. 그리하여 정처 없이 떠다니는 것이 마치 바람 속의 물거품과 같아 멀리 떠가거나 가까이 있거나 흩어지거나 모이거나 하는 것을 모두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지금부터 여생이 몇 년이나 더 될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어머니와 형을 모시고 아들과 조카를 따르게 하여 다시 이 산에 놀러와 여기에 머물러 먼 풍경을 바라보면서 하루 종일 즐기는 것을 어찌 또다시 기약할 수 있겠는가. 인하여 느낀 바가 있어 그것을 쓰고 때를 기록해 두고자 한다.
현옹(玄翁)의 집은 남쪽 성 아래에 있었는데 지금은 금릉(金陵)으로 쫓겨났고, 백사(白沙) 역시 불암산 아래 은둔해 있다.
김상헌(金尙憲, 1570년 ~ 1652년)은 조선 중·후기의 문신, 학자이다. 병자, 정묘호란시 척화대신으로 이름이 높았다.[1] 본관은 (신)안동,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서간노인(西磵老人)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1] 윤근수(尹根壽)의 문인. 조선후기 세도가의 직계선조로 그의 후손에서 13명의 재상과 수십 명의 판서, 참판이 배출되었고, 순조비, 헌종비, 철종비 등 왕비 3명과, 숙종의 후궁 영빈 김씨가 모두 그의 후손이었다.
복정(覆鼎) : 북한산(北漢山)의 옛 이름으로, 산의 모양이 마치 솥을 엎어 놓은 듯하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북한산은 이 이외에도 삼각산(三角山), 북악(北嶽), 부아악(負兒嶽) 등으로도 칭해진다.
공극(拱極) : 경복궁(景福宮)의 주산인 백악(白嶽)을 가리키는데, 중종 때 중국 사신 공용경(龔用卿)이 백악을 공극산, 인왕산(仁旺山)을 필운산(弼雲山)이라고 개명하였다.
소 이상(蘇貳相) : 좌찬성과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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