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주와 인간의 합작품인 주왕산과 장가계의 공통점과 차이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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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주와 인간의 합작품인 주왕산과 장가계의 공통점과 차이점
몇 번 가본 곳이지만, ‘그곳에 가고 싶다’의 주왕산을 다시 다녀왔다.
글의 제목이 꼭 논문이 아닌가 싶겠지만, ‘山行記’다.
自然은 분명 창조주의 작품이고 역사나 신화, 전설 등 文化는 인간의 작품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동쪽의 주왕산과 한국인이 가장 많이 찾았던 중국의 명승지 장가계는 창조주와 인간의 합작품으로서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음을 이해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1. 주왕산의 유래와 전설
경상북도 청송군(靑松郡) 부동면(府東面)에 있는 산. 해발고도 721m.
역암·응회암·유문암 등의 화산암으로 이루어진 기암절벽이 병풍을 두른 듯하다 하여 석병산(石屛山)이라고도 한다.
계곡과 폭포가 절경을 이루어 1976년 3월30일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신라 왕자 김주원(金周元)이 이 산에서 공부했다고 하여 주방산(周房山) 또는 대둔산이라고도 한다.
중국 동진(東晉)의 왕족 주도(周鍍)가 후주천황(後周天皇)이라 자칭하며 당(唐)나라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주하여 이곳에서 은거한 일 등에서 주왕(周王)들과 관련지어 고려 말 공민왕 때의 왕사(王師)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이곳에서 수도하며, 주왕산이라 이름 지었다고 전해진다.
주왕산은 매우 깊고 험준하다는 말을 듣고 옛날부터 난리가 났을 때마다 이곳으로 피난을 온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신라시대 중국의 동쪽에 있던 진나라에서 복야상서란 벼슬을 지낸 주의 8대손 주도가 진나라를 회복하고자 장사 수백 명을 주축으로 수만 군사를 이끌고 남양에서 반기를 들고 일어서니 때는 당나라 덕종황제 정원 15년(신라 소지왕: 서기 799)이었다.
주도가 자칭 후주천왕이라 하고 당시 서울인 장안을 쳐들어가다가 당나라 군사에게 패전을 당하고 요동으로 쫓기어 압록강을 건너 강원도 원주를 걸쳐 석병산이 매우 깊고 험하다는 소문을 듣고 이 산에 은거하였으나 신라왕이 당나라 왕의 청을 받아 마일성 장군을 시켜 주도를 잡게 하니 마일성장군은 자기의 아우인 이성 삼성 사성 오성과 합세하여 대군을 거느리고 석병산을 포위하고 주왕을 잡았다. (주왕굴 건너편에서 화살을 쏘아 맞아 죽었다고 한다)
주왕의 피가 꽃이 되었다는 수달래
오랜 세월을 두고 냇가에 뿌리를 박고 있지만 붉은 수단화는 그 아름다운 자태를 잃지 않은 채 슬픈 사연을 안고 다소곳이 꽃을 피우고 있다.
수단화 또는 수달래란 이 꽃은 다른 지방에선 좀처럼 구경할 수 없는 꽃으로 여기 주왕산 계곡에서만 피는데 꽃 빛깔은 진달래와 비슷하나 약간 더 붉은 편이며 생김새는 철쭉(연달래)과 비슷하고 그 키나 나무의 생김새도 철쭉이나 진달래와 닮은 데가 많다. 5월초에 계곡을 따라 수단화가 피면 꽃이 냇물에 비춰 붉은 물이 흐르는 듯해서 볼 만 하다.
이와 같이 아름다운 수단화에는 남모르는 서러움이 숨어 있으니 주왕이 이곳에서 신라군사와 싸우다 힘이 다해 마장군 형제의 화살에 맞아 잡히자 그의 피가 주왕굴에서 냇물에 섞여 계곡을 따라 붉게 흘러 내렸는데 그 이듬해부터 이 주왕산에는 이제까지 보지 못하던 꽃이 계곡과 내를 따라 피기 시작했으며 사람들은 주왕의 피가 꽃이 되어 핀 것이라 해서 수단화(壽斷花)라 이름 하였다고 한다.
그 뒤 해를 거듭할수록 냇가의 수단화는 더욱 퍼져 주왕산을 아름답게 장식해 왔으며 특히 5월이 되면 어김없이 피어나 우아한 모습으로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2. 장량과 장가계
한고조 삼걸 중 장량(張良)은 자를 자방(子房)이라 하고 시호가 문성(文成)인데 그 선조는 한(韓)의 사람이다. 진시황(秦始皇)이 한을 멸하자 이를 보복하고자 창해역사(倉海力士)를 시켜 박량사(博良沙)에서 진시황을 치려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변성명하여 하비(下?)에 숨어 살 때 황석공(黃石公)이라는 한 노인으로부터 태공망(太公望: 강태공)의 병서(兵書)를 얻어 전략에 능하게 되었다.
초패왕 항우와의 결전 해하싸움에서 장량은 옥피리로 슬픈 곡조를 불어서 이를 들은 항우의 정예 호위군 8,000명이 모두 고향의 부모를 생각하고 도망가게 만드는 심리전을 벌리기도 하였다. 그 공으로 장량에게는 삼만호의 식읍까지 내리는 은전을 베풀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병을 핑계로 한고조를 떠났는데 사람들은 적송자(赤松子: 신선)를 따라 갔다고 말한다.
한고조가 중국을 통일한 후 그 부인 여후(呂后)의 모략으로 한고조 삼걸의 나머지 두 사람
소하, 한신(고조 11년)이 한고조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다.
한고조 유방이 초패왕을 격파하고 천하를 통일한 후 어느날 그 동안 함께 고생한 신하들을 위안하는 연회가 열렸는데 한창 흥이 고조에 달했을 때 한고조가
“대저 장막 안에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실천에 옮겨 천리 밖의 전선에서 승리를 걷우게 하는 참모적인 재능에는 내가 자방(子房: 장량의 자)만 못하고, 국가를 다스려 백성을 어루만지고 군량을 전선에 공급하여 양도를 한 번도 끊이게 하지 않은 내정이나 병참적 기량에서는 내가 소하만 못하고, 백만대군을 이끌고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취하는 실전적인 수완에서는 내가 한신만 못하다.
그런데 왜 나는 황제가 되고 경들은 내 밑에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졌는데 이 때 장량이 나서서...
“그것은 폐하께서 이런 저런 재주를 가진 사람들을 믿고 일을 맡기고, 그들로 하여금 열성을 다하여 일 할 수 있도록 하는 더 큰 재주(지도력)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중국 호남성 서북쪽 한 구석에 위치한 장가계(張家界)는 3억8,000만년 전에 바다였던 곳이 융기하여 해발 1,500m의 고원지대가 만들어졌는데 장구한 세월에 걸쳐 퇴적암(堆積岩) 중 역암(礫岩), 사암(沙岩), 석회암(石灰岩) 등 약한 부분이 깎여 나가고 단단한 이암(泥岩) 부분만 남아서 78,000개의 각가지 물형석(物形石)과 기암봉(奇岩峰)들을 만들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이곳을 신선들이 산다는 낙원(파라다이스)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 불렀고,
지금은 다른 곳에 도원(挑園)이 따로 있다 하여 무릉원(武陵源)이라 부른다고 한다.
바로 이곳에 한고조 삼걸의 한 사람 장량의 묘가 있다.
원앙(鴛鴦)계곡 입구, 그러니까 백룡전제(百龍電梯: 높이 335m의 세계제일의 엘리베이트)에서 가깝다.
가이드 설명에 따르면 장량은 한고조가 중국 천하를 통일한 다음 미리 앞날을 내다보고 자기에게 주는 삼만호 봉토도 사양하고 병을 핑계하여 은퇴한 후에 바로 이곳에 와서 신선처럼 살았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 지역의 주인으로 행세하던 토가족(土家族: 중국 56개 소수민족 중의 하나지만
이곳에서는 지금도 장가계시 인구 150만의 66%인 98만명)의 거부반응 이 거세었으나
장량은 수차(水車)를 고안하여 그들의 농사에 큰 보탬을 주는 등의 노력으로 차츰 토가족의 신임과 숭앙을 받게 되었다 한다.
소하, 한신 등을 모함하여 죽이게 한 여후는 장량도 없애야겠다는 생각으로 한고조에게 장량이 반역할 것이라고 모함하여 정벌하도록 꾀어 한고조는 장량도 체포하고 토가족도 정벌할 생각으로 이곳을 침공하였다.
그러나 용감한 토가족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면서 장량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끝까지
저항함으로써 결국 한고조도 이들을 정복하지 못하고 체면상 이 곳이 ‘장량 일가의 땅(張家界)’으로 인정하고 물러갔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곳 지명이 ‘장가계(張家界)’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장량은 전쟁에서도 앞일을 잘 내다보고 전략을 세웠지만 개인의 앞날도 잘 볼 줄 아는 명철(明哲)이었던 것이다. (※충무공의 죽음도 그런 차원이 아니었을까?-토사구팽을 면하는 지혜?)
3. 주왕산과 장가계의 공통점과 차이점
(공통점) -자연풍광이 빼어나 모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창조주의 인간을 배려한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자연환경이다.
-산 이름의 유래가 ‘역사와 전설’로 인간이 이룬 문화적 소산이 배어 있다.
(차이점) 장-원가계를 다녀온 분들은 공감하겠지만, 그곳의 자연풍광의 거대함은 중국 땅의 크기 및 인구수와 한국의 그것만큼 큰 차이가 있음이 사실이며, 그런 점에서는 아마도 태초 창세시에 중국은 손이 매우 매우 큰 천사가, 한반도는 손이 작고 오밀조밀한 천사가 조력하여 창조한 결과가 아닐까 짐작해 본다. 중국의 다른 풍경구(국립공원)인 황산. 태항산. 계림. 구체구 등과 우리의 금강산. 설악산의 규모와 아기자기한 모습을 비교해 보아도 느끼게 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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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관님의 댓글
설악산이나 내장산 단풍이 한창인 때에 그곳을 찾음은 '단풍보다 사람 구경'이 더 제격이며, 불편함은 감수해야 할 겁니다.
반면, 사실 주왕산의 단풍은 그곳들에 비하면 鳥足之血이지요.
또, 주산지나 주왕산의 3곳 폭포는 올 가을 처럼 물이 가물면 '별로'인 것이 사실 입니다.
그래도 나잇살 든 사람들이 가기에는 그곳 만큼 편안한 곳도 없더이다.
내장산이 나가리 됐으면 '홀로 산행'을 얘기했기 때문에 전화라도 주실일이지...아쉬웠습니다.
수라상 음식점도 미리미리 확실한 의사표시가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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