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산행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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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산행 후기
이번 화요산행은 최양순(김명렬)님 가정의 안내로
정릉과 봉국사를 들러보는 코스였다.
남학생 7명 여학생 7명의 조촐한 모임이었다.
그 코스는 추우나 더우나 환갑을 넘긴 연배들에게 매우 이상적인 코스였다.
마침 이날은 발렌타인 데이인데, 그 본의를 잘 모르는 순진한 남학생이
여학생들에게 쵸컬릿을 선물하여 잠시나마 웃는 시간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누구나 가장 기대하고 기다리는 점심은 봉국사 건너편의 유명한
국수집이었는데, 해물칼국수류와 새알팥죽이 일품이었다.
멀리 장흥에 상주하시다가 가끔 손자녀를 보고 싶어 상경하시는
항삼님의 친한 친구 (안)상선어른과 처음 참석에 가슴 설레이다가
지각까지 해 가며 남들이 준비 안한 도시락 까지 준비해 온
김미화 여사에게 많은 격려와 환영의 박수가 터졌다.
젊은 날 자녀출산으로 성한 몸이 없어 늘 주치의를 반기는 여학생들은
인근 안내자 집으로 박영기 침술박사를 모시고 가서 늦게 까지
치료를 받았고, 남학생들은 유서 깊은 봉국사에 들러 천일국 창건과
봉국의의미를 새기고 서원하였다
이 기회에 다시 한 번 상식의 지평을 넓히기를 바라서
이날과 그곳의 의미를 옮긴다.
[발렌타인데이의 유래]
3세기경 로마 시대에 발렌타인이라고 하는 사제가 있었다.
당시 로마의 황제인 클라우디우스 2세는 군 전력 유지를 위해 법으로
젊은이들의 결혼을 금하였는데 발렌타인은 이를 어기고 젊은이들을 몰래 결혼시켰다.
그러나 이는 들통이 나게 되고발렌타인은 이로 인해 순교하게 되었다.
그날이 바로 269년 2월 14일이어서 이 날을 성 발렌타인의 날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던 것이 이교도 축제인 Lupercalia를
그리스도교화 하기위해 발렌타인축제를 행사화하였다.
당시 Lupercalia축제에 도시의 젊은 여자들은 자기 이름을
큰 항아리에 적어 넣고 남자들이 항아리에서
이름표를 고르는 짝짓기 행사가 있었는데 이 행사를 통해 결혼에 이르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당시 그리스도교회 측에서는 이 축제가 지나치가 이교도적이라고
생각하여 서기 498년에 2월 14일을 성 발렌타인의 날로 선포하여
남녀간의 사랑을 표현하는 날로 삼았다.
영국에서는 1400년경부터 발렌타인데이가 지켜졌다. 발렌타인데이에
사랑의 글을 보내는 풍습은 1415년 영국에 포로로 잡혀간 프랑스의
오를레앙 공작
샤를르가 발렌타인데이에
런던탑의 감옥에서 부인에게 사랑의 시를 보낸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던 것이 보편화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에 이르러서였다.
18세기 중엽까지는 친구간이나 연인간에 연정을 표시하는 작은 선물이나
편지를 주고 받는 것이일반적이었다.
18세기 말에는 인쇄술의 발전으로 인하여 인쇄된 카드가 널리 보급되었다.
인쇄된 카드는 쉽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었고 싼 우편료 역시 발렌타인 축하 카드의
보편화에 많은 기여를 했다.
축하카드협회에 의하면 발렌타인데이 카드는 크리스마스카드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이 보내지며 약 85%는 여자가 보낸다고 한다.
정릉(貞陵)
조선 태조의 제2비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의 능. 사적 제208호.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에 있다. 처음 능지를 정한 곳은 안암동이었으나
산역을 시작할 때 물이 솟아나와 지금의 정동에 자리를 정하게 되었다.
능이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겨진 것은 1409년(태종 9)이며, 이것은 오로지 태조가
제8왕자 방석(芳碩)을 세자로 책봉한 데 대한 태종의 사감에서였다.
태종은 능을 옮긴 지 한달이 지나자 정자각(丁字閣)을 헐고 석물을 모두
묻어 없애고, 광교(廣橋)에 있던 흙다리가 무너지자
십이신상(十二神像) 등의 석물을 실어다 돌다리를 만들게 하였다.
능을 옮긴 뒤 수백 년간 정릉은 왕후의 능이라기보다 주인 없는 무덤에 불과하였다.
1669년(현종 10) 송시열(宋時烈)의 계청(啓請)으로 비로소 종묘에 배향하고 능묘로
봉심(奉審)하기로 하였으며, 이경석(李景奭) 등의 계청으로 능을 수리하고,
재실을 중건하여 수호군을 정해주기에 이르렀다. 능 관리를 위하여
영(令) 1원과 참봉 1원을 두었다.
봉국사(奉國寺)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정릉(貞陵) 북쪽에 있는 절. 1395년(태조 4)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조선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기 위하여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 무학은 약사여래(藥師如來)를 봉안하고 약사사(藥師寺)라고 하였다.
1468년(세조 14)에는 사승(寺僧)들이 중건하였고, 1882년(고종 19)에 임오군란으로
불탄 것을 이듬해 청계(淸溪)와 덕운(德雲)이 중창하였다.
1898년에는 운담(雲潭)·영암(永庵)·취봉(翠峰) 등이 명부전(冥府殿)을 중건하였고,
1913년에는 칠성각을, 1939년에는 염불암(念佛庵)을 창건하였으며, 1977년에는
일주문(一柱門)에서 조금 올라간 곳에 아담한 2층 건물을 지어 아래는 천왕문(天王門),
위는 일음루(一音樓)라는 종루를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이 절을 언제 봉국사로 이름을 바꾸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만월보전(滿月寶殿)을 비롯하여 염불당(念佛堂)·용왕각(龍王閣)
명부전·삼성각(三聖閣)·독성각이 있다.
관련자료
조항삼님의 댓글
아주 귀한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네요.
김명렬 위원장님께서 베푸신 해물칼국수를 잘 먹고 정담을 나누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중심으로 의미있는 시간이 됐습니다.
특별히 이옥용 중앙회장님께서 참석하시어 가정회 현안 건을 간략하게
피력함으로 류명락 목사님과 김동운 초대회장님의 참신한 조언을
하시므로 모두들 공감하는 박수를 보냈습니다.
정해관님의 코믹하고 깔끔한 사회로 분위기가 고조되며 천륜의 정이
넘치는 흔하지 않은 좋은 만남에 탄성이 터지는 정경에 행복지수가
상승하고 헤어지기가 아쉬워 돌아서지를 못하네요.
김명렬님의 댓글
우리들은 발렌타이의 의미도 잘 모르고 초코렛을 받았었네.
우정과 사랑이 깃든 깊은 뜻이 있었는데도 그저 웃으며.......“
7녀 7남이 만나 정릉 동산에 오르고 아주 간단한 점심이라도
맛있게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직접같이 산행도 하고 정담도 나눴어야 되는데 함께하지 못하여
죄송하고요.(그런데 집사람이 오히려 산은 나보다 더 잘오릅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틀이 잡힌 모임인 만큼 자유롭게 한달에
한두번씩이라도 만나 우의를 나누는것이 얼마나 좋은것인지
사정이 있어 참석못한 사람이면 누구나 젛실히 느낄 것입니다.
덧 붙여 한가지 얘기한다면,
이곳에 참석하면 다른예기는 배제하고 건강, 사는 정다운 예기,
모임을 위해 발전적인 좋은 얘기가 있어야 될줄압니다.
아무튼 참석해주신 모든님들께 감사드리며,
항상 복된 생활되시고 만사형통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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