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기행 : 영암과 영광의 역사인물과의 만남-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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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기행 : 영암과 영광의 역사인물과의 만남-1
1. 머리에 ; 환고향의 명분을 찾고자 고향 보성에 가는 길에, 떡본김에 제사지내자는 구실로 이웃의 영암과 영광 그리고 고창을 들르게 되었다. 영암에는 신평근, 김명렬님이, 영광에는 변귀봉, 고창에는 성호갑님이 계셔서 반갑게 맞아 주셨다. 특히 평근, 명렬, 호갑님은 옛날 광주에서 성화의 형제들로 주역들이셨는데, 자주 불렀던 단심가의 가사 그대로 ‘일편단심’(가끔 심정부활을 위해 혈서로 쓰기도 했던) 뜻앞에 충성하며 축복중심 모델가정으로서 전범이 되신 분들이다.
특별한 사전 약속이 없이 조우하게 되었지만 갑작스러운 그점이 반가움을 배가해 주었다고 찾아간 과객을 기분좋게 하시는 배려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런데 찾아간 그곳들은 놀랍게도 과거에 대단했던 인물들의 탄생지 내지 인연 깊은 곳이 되어 결과적으로 전,현 인물들과의 의미깊은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었음을 크나큰 행운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다.
2. 영암의 월출산, 도갑사 그리고 도선국사와 왕인박사.
금수강산 한반도의 북쪽에 금강산과 설악산이 있다면, 남쪽의 동에는 주왕산이요 서에는 월출산이라고 일컬어 진다. 도갑사는 산세가 빼어나고 풍광이 아름다워 옛부터 '호남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월출산, 호랑이가 앞발을 들고 포효하는 형상이라는 산자락 아래 자리잡고 있다. 신라의 4대 고승 가운데 한 분이신 도선(道詵)국사께서 창건하신 대가람으로 그 뒤를 이은 수미왕사와 연담선사, 허주선사, 초의선사 등 역대 고승대덕들이 주석 하시면서 깨달음의 참다운 이치를 널리 펼치셨다.
해탈문(국보 제50호)과 마애여래좌상(국보 제144호), 석조여래좌상(보물 제89호), 문수 보현보살 사자 코끼리상(보물 제1134호), 대형석조, 그리고 도선수미비 등 많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고찰이다.
도갑사가 낳은 대선지식 도선국사는 법명(法名)은 도선(道詵)이며, 시호(諡號, 입적한 뒤 효공왕이 하사한 이름)는 요공선사(了空禪師)이다.
선사께서 전남 광양에 소재한 백계산 옥룡사에서 35년간이나 머물고 계셨기 때문에 옥룡자(玉龍子)라고도 한다. 선사께서 고려 태조의 건국과 후삼국 통일을 예견하시고 미리 큰 도움을 주셨다고 해서 고려 제8대 현종은 대선사(大禪師)의 법계(法階)를 바쳤고, 제15대 숙종은 왕사(王師)의 칭호를 보탰으며 제17대 인종은 선각국사(先覺國師)로 추봉하였다.
도선국사는 신라 흥덕왕 2년, 전라남도 영암군 김씨의 성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났다.
국사가 신라 29대 태종무열왕의 서손이라는 말이 전해오기는 하나 그의 윗대 계보와 부조(父祖)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국사는 어머니 되시는 최씨 부인이 神人에게 한알의 밝은 구슬을 받아 삼키는 꿈을 꾼 뒤 잉태했다는 말이 전해온다. 이에 최씨 부인은 달이 차 해산할 때까지 맵고 냄새나는 채소와 비린 음식을 멀리하고 열심히 경전을 지송하며 지성으로 염불을 외웠다 한다,그렇게 태어난 국사는 젖먹이 시절부터 남다른 데가 있었는데 '실록'(道詵國師實錄)에 적힌 이 부분에 관한 이야기는 아래와 같다.
'어머니 최씨가 어느 겨울 날 영암 성기동에 있는 '구시바위' 아래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청참외 한 덩이가 물에 떠내려 왔으므로 그것을 건져 먹게 되었다. 그 뒤 임신을 해, 달이 차도록 맵고 비린, 냄새나는 채소와 고기를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경전을 읽고 염불 외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해산때가 되어 아들을 낳았는데 그때가 신라 경덕왕 말년 무렵이었다.
한데 명분이 없이 아이를 낳았으므로 숲 속 반석 위에다 내다버렸다. 그리고는 여러 날이 지나서야 다시 그곳을 가보았는데 비둘기 떼들이 모여들어 날개로 아이를 덮어 보호하고 있었다. 부인은 그 신기한 광경에 예사롭지 않은 일이라고 여기고 아이를 다시 집으로 안고 가 키우게 되었다. 그런 연유로 마을 이름이 지금도 구림(鳩林)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아이를 버린 반석 이름을 국사암(國師巖)이라 일컫게 되었다.
왕인은 백제 시대의 학자로서
근구수왕 때 일본에서 학자와 책 등을 보내주기를 요청하자, 왕의 손자인 진손왕과 함께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 갔다. 거기서 그는 오진 천황의 태자에게 글을 가르쳐 일본에 유학과 한문학을 전파하고 우리나라의 문화를 전하였다.
이것은 일본의 문화를 깨우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자손 대대로 일본에 살면서 학문에 관한 일을 맡고 조정에 봉사하여 문화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그의 이름은 일본의 역사책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지금도 일본에서는 그를 학문의 시조로서 높이 떠받들고 있다. 전남 영암에 왕인 석상을 비롯한 유적지가 있으며, 일본 히리카타에 무덤이 있다.
백제의 거유 박사 왕인은 일본 황실의 사부(師傅)가 되어 두태자 토도치랑자와 대초요존의 스승이 되었다. 일본에 건너갈 때 가지고 갔던「천자문」과「논어」만이 아니라, 모든 경적(經籍)을 가르쳤다. 왕인은 태자의 스승 뿐이 아니라 군신들에게 한학과 경사(經史)도 가르쳤다.
백제인 왕인으로부터 한문을 전해 받은 일본은 비로소 눈이 뜨기 시작했고, 학문의 필요함을 터득하게 되었으며, 충·효·인·의 등 유교 덕목을 깨우치게 되었다. 미개했던 일본은 비로소 한학이 발흥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고, 문화발전의 뿌리를 내리게 했다. 한편으로, 태자 전지와 왕인이 일본에 건너온지 반년이 지나도록 태자를 백제로 귀국시키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박사 왕인은 초조하고 불길한 예감이 밀어 닥쳤다.
그 해(405년) 9월에 백제 아신왕이 서거했다는 부음에 접했다. 왕인은 매우 불안했다. 태자의 환국을 기다리는 동안 왕위계승을 에워싸고 피를 흘리리라 예견했기 때문이다.
이때 아신왕이 서거하자, 왕의 중제(仲弟)훈해(訓解)가 섭정하면서 태자의 환국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왕의 계제(季弟) 혈례(蝶禮)가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때 박사 왕인은 응신천황에게 의젓한 자세로 "폐하는 백제와의 결호(結好)를 견고히 하기 위하여 백제 왕족의 명맥을 끊게 했습니다. 백제 왕족이 끊긴 후 신생 백제와의 수호를 위하여 어떠한 인질(人質)을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응신천황은 "이제는 인질(볼모)은 필요없소, 서투른 일을 저질렀오. 아신왕 재세(在世)중에 전지를 돌려 보냈어야 했을 터인데. 왕인 길사의 도일이 너무 늦었기 때문이었오"라 대답했다. 그리고나서 곧바로 포령을 내렸다. 전지태자를 귀국 시키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하여 병사 100명을 딸려 귀국길을 호송토록 하라고 하명했다(...倭王以兵士百人衛送 : 三國史記) 귀국길에 오른 태자는 국내에 들어오지 못하고 그 해가 저물어질때까지 섬에서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신하들은 이러한 상황을 용납할 수 없어 혈례를 죽이고 태자를 맞을 준비를 했다.
이리하여 제17대 전지왕이 즉위하게 되었다. 박사왕인은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박사왕인으로 인하여 일본으로 보내야할 백제왕실의 볼모가 비로소 풀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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