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統과 야은 吉再의 고향, 구미의 金烏山 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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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統과 冶隱 吉再의 故鄕, 구미의 金烏山에 오르다.
陽城李氏 27세 인규公이(양성이씨에 대해서는 [글마당] 379번 참조) 인도하는 ‘산수원애국산악회’는 18일 박통과 길재의 고향 구미(옛 선산)의 금오산을 다녀오게 되었다.
1. 금오산은, 경상북도 구미시·칠곡군 김천시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977m이다. 주봉인 현월봉(顯月峰)과 약사봉(藥師峰), 영남8경 중의 하나인 보봉(普峰)이 소백산맥 지맥에 솟아 있으며, 시생대(始生代)와 원생대(原生代)에 속하는 화강편마암과 화강암이 주를 이루고 있다.
산 정상은 비교적 평탄하나 산세가 높고 기이하며, 고려시대에 자연 암벽을 이용해 축성된 길이 2km의 금오산성이 있어 임진왜란 때 왜적을 방어하는 요새지로 이용되었다.
기암괴석이 조화를 이루고 계곡이 잘 발달되어 경관이 뛰어난 산으로, 1970년 6월 한국 최초의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해운사·.약사암. 금강사· 법성사 ·대원사 등의 고찰과 고려 말기의 충신 야은 길재(吉再)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채미정(採薇亭), 신라시대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수도하던 도선굴을 비롯해 명금폭포·세류폭포 등이 있다. 금오산 마애보살입상(보물 490), 선봉사 대각국사비(보물 251), 오봉동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245) 등의 유서 깊은 문화유적이 많이 있다.
2. 冶隱 吉再는 학창시절 아래의 시로 익히 알려진 인물인데,
오백 년(五百年) 도읍지(都邑地)를 필마(匹馬)로 도라드니,
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 듸 업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본관은 해평(海平). 자 재보(再父). 호 야은(冶隱) ·금오산인(金烏山人). 시호 충절(忠節). 금주지사 (錦州知事) 원진(元璡)의 아들. 구미 출생. 1363년 냉산(冷山) 도리사(桃李寺)에서 처음 글을 배웠으며, 1370년 박분(朴賁)에게 《논어》 《맹자》를 배우면서 성리학을 접하였다. 관료로 있던 아버지를 만나러 개경에 갔다가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권근(權近) 등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1374년 생원시(生員試)에, 1383년(우왕 9) 사마감시(司馬監試)에 합격하고, 그해 중랑장 신면(申勉)의 딸과 결혼하였다.
1386년 진사시에 합격, 청주목(淸州牧) 사록(司錄)에 임명되나 부임하지 않았고, 다음해 성균학정(成均學正)이 되었다가, 1388년에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성균박사(成均博士)로 승진하였다. 1389년(창왕 1)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고려의 쇠망을 짐작하여 늙은 어머니에 대한 봉양을 구실로 사직하였으며, 고향으로 가는 길에 장단에 있던 이색(李穡)을 만나기도 하였다. 1390년 계림부(鷄林府)의 교수가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우왕의 죽음을 듣고 마음으로 3년상을 행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뒤 1400년(정종 2)에 이방원(李芳遠)이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하였으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뜻을 말하며 거절하였다. 1402년(태종 2)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불교식 장례법을 따르지 않고 성리학적 가례(家禮)를 따랐다. 세종이 즉위한 뒤 길재의 절의를 기리는 뜻에 그 자손을 서용하려 하자, 자신이 고려에 충성한 것처럼 자손들은 조선에 충성해야 할 것이라며 자손들의 관직 진출을 인정해주었다.
어머니에 대한 효도가 지극하며 세상의 영달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을 연구하였기 때문에 그를 본받고 가르침을 얻으려는 학자가 줄을 이었으며, 김숙자(金叔滋)를 비롯하여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등이 학맥을 이었다. 청풍서원(淸風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야은집》 《야은속집(冶隱續集)》, 언행록인 《야은언행습유록(冶隱言行拾遺錄)》이 있다.
15세기 후반 선산 출신의 저명한 관료 학자 김종직(金宗直)은 '이존록(彛尊錄)'에서, 길재의 문하로 "학동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고 소회한 바 있다. 이들 가운데 그의 부친 김숙자(金叔滋)가 포함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5세기에는 선산 관아와 향교가 있던 영봉리 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한 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들 가운데 전가식, 유면, 정지담, 하위지는 문과에서 당당히 장원한 재원이었다. 그 때문에 김종직은 영봉리를 '장원방(壯元坊)'이라 불렀다.
길재의 '불사이군'의 충절은 이후 선산 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육신 하위지(河緯地)와 생육신 이맹전(李孟專)이 이곳 출신인 것도 이러한 분위기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평생에 걸친 길재의 정주학 침잠은 이후 이 지역이 성리학의 본향이 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16세기 중반 이후 확립된
조선 성리학의 도통(道統)은 흔히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으로 연결된다. 그런데 위
의 8대 연원 가운데 길재로부터 김굉필(金宏弼)에 이르는 무려 4대의 학자들이 모두 선산과 직·간접적으로 연결을 맺고 있던
인물들이었다. 15세기 선산은 성리학의 메카였던 셈이다.
3.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는 이인규 목사께서 상당한 관심과 인연이 있는 분으로, 기회가 되면 그 ‘뜻깊은 인연사’를 듣는 것도 이 나라의 복귀와 천일국 건설의 과정에서 의미있는 일로 여겨 진다.
※ 공지사항
9월 27일(토) 오후 2;30부터(매주)
세계일보 지하 강당에서,
이인규 목사 주관하의 [VIP포럼]이 열리게 된다고 합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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