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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대군 대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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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대군 대망론

1. 양양녕대군(讓寧大君, 1394년 ~ 1462년 9월 7일)은 조선시대 초기의 왕세자이자 왕족, 정치인으로 조선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장자로 출생하였다. 성은 이(李), 휘는 제(褆), 자 후백(厚伯), 시호는 강정(剛靖)이다. 조선 세종, 효령대군, 성녕대군의 친형이다.

1404년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부왕 태종과 마찰을 빚다가 폐위되었다. 왕세자 자리를 양보한 것은 그의 본심이었다는 설과 본심이 아니었다는 설이 양립하고 있다. 증(贈) 의정부좌의정 광산군(光山君)에 증직된 광산 김씨 김한로(金漢老)의 딸이자 본처인 수성군부인 김씨 사이에서 3남 4녀를 두었으며, 첩에게서 7남 12녀를 낳았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다섯째 서자 장평도정 이흔의 후손이었다.(※이승만의 라이벌이라 할 김구 선생은 인조반정에 참여한 김자점의 후손이다)

양녕대군은 서예에 능하여 숭례문과 경회루 등의 현판에 이름을 썼다.

그는 품행이 자유분방하여 잦은 문제를 일으켰다. 그가 궁으로 데려온 한 기생 출신 첩의 존재를 알게 되자 태종은 그 기녀를 사형에 처했다. 양녕대군은 부왕 태종 역시 여러 여인을 첩으로 거느리는 것을 언급하며 항의하다가 끌려 나가기도 했다.

이후에도 양녕의 품행은 자제되지 않았고 이에 유정현 등이 상소를 하여, 세자에서 폐위시킬 것을 상주하였다. 이때 유일하게 그의 세자 폐위를 반대한 것은 이조판서 황희 등 소수였다. 1418년 그는 세자에서 폐위되고 양녕대군에 봉해졌으며, 그 대신에 아우인 충녕대군(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폐위될 것을 예상하자 그의 동생 효령대군은 독서를 열심히 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그는 동생을 찾아가 세자 자리는 충녕에게 넘길것 같으니 헛된 꿈을 꾸지 말라고 충고하였다. 부왕 태종이나 모후 원경왕후의 뜻이 모두 충녕에게 있음을 안 효령대군은 이후 불교에 전념하게 된다.

[세자 폐위 배경]

김시양(金時讓)은 저서 자해필담(紫海筆談)에서 양녕대군의 폐세자 원인에 세가지 추론을 하였다. 첫 번째로는, 양녕과 아버지 태종의 관계에 대해서 그는 양녕대군이 세자로 있을 때 태종의 뜻이 세종(충녕대군)에게 있는 것을 알고 일부러 미친 척하고 자리를 사양하니 태종이 곧 폐하여 세종을 세웠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양녕대군과 동생 충녕대군의 관계에 대해서, 양녕대군이 세자 자리에서 폐위된 뒤 한성에서 외지로 쫓겨나 경기도 이천군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세종대왕이 몰래 양녕대군을 불러 위로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와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데, 세자(양녕대군)의 계속된 비행으로 아버지 태종이 몇번 질책하자, 불만을 품고 태종에게 “자신은 잘못이 없으며, 아버지(태종)는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하시면서 왜 저만 못하게 하시느냐”하는 상소를 올려 태종을 비난했다. 이에 분노한 태종은 세자를 폐하여 이천군으로 귀양보내고 동생 충녕대군에게 세자 자리를 넘겨주었다고 한다.

2.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한 것이라지만, 세계사에서 유래를 보기 어려울 정도로 비교적 오래 지속되었던 단일 혈통의 왕조인 조선 역사의 비결은 무엇일까? 그 비결 중의 하나로, 왕조 초기에 왕실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태종(이방원)과 그의 아들이며 조선 최고의 명군인 세종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세종도 순탄하게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특히 이미 세자로 책봉되어 많은 수하를 거느린 큰 형 양녕과의 관계는 아슬아슬한 긴장관계가 아닐 수 없었다. 아버지(태조 이성계)와 함께 왕조를 열었던 주도면밀한 태종은, 자신이 장자 승계의 룰을 어겼기에(이것이 콤플렉스가 되어) 후대만은 장자가 왕위를 계승하기를 바랐지만, 왕재가 아닌 장자(양녕)를 ‘장자라는 이유’ 만으로 왕을 삼을 수는 없어, 이른바 ‘擇賢論’(현명한 자가 왕이 되어야 한다)을 내세워 3남 충녕을 왕위에 오르게 하면서, 동시에 분파가능성이 있거나 걸림돌이 되는 사안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싹수부터 자르게 된다. 심지어 충녕(세종)의 장인(국구)으로서 영의정까지 올랐던 심 온까지 죽게 했던 것이다.

3. 사실 당시에 타락론을 알리 없었던 양녕이 여자문제 때문에 세자의 자리에서 쫓겨남은 고개가 꺄우뚱해 진다. 그래서 부왕(태종)에 대하여 고개를 빳빳이 들고 “아버지께서도 저와 똑같이 하시면서 왜 저만 못하게 하시나이까?”라고 대들지 않았던가! 그리고 숭례문의 현판이 그의 작품이라는 데에 이르면, 학문연마에도 뒤지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그러함에도 명분과 위험부담을 넘어 막내(실제 막내는 성녕이었으나 일찍 죽음) 충녕을 중심으로 세운 뜻은 왕조를 반석위에 세우고자 하는 주도면밀한 부왕 태종의 심모원려(深謀遠慮 : 깊은 꾀와 먼 장래를 내다보는 생각)가 작용하였고, 결과적으로 대단히 현명한 선택이며 결단이었다고 평가 된다.또 결과에 순응하여 천수를 다한 양녕에게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4. 천일국을 여는 세계지도자대회에서 우리 참가정의 3아드님들이 첫 상견례와 동시에 각자가 생각하는 비젼을 발표했던 자리를 많은 지도자들은 기억할 것이다. 마지막에 형진님께서 등단 하셨다.

“존경하는 원로식구님 여러분! 그리고 특히 일본에서 참석하신 지도자와 식구님 여러분! 저는 지난날 여러분께서 우리 아버님과 함께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난의 길을 걸으시고 지금도 섭리의 현장에서 정성과 활동을 다 하시는 내용들을 잘 압니다. 진심으로 감사 합니다!”

정성을 다해 경배를 하시는 모습에 모두는 눈시울을 붉히며, 우레와 같은 박수를 올렸다. 형진 세계회장님은 ‘통일가의 세종’이 되시어 천일국을 만세반석에 올리시는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을 두루두루 갖추신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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