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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부군 [조선인민유격대 독립 제4지대]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 토벌당국에 의해 '남부군단', '이현상(李鉉相)부대' 또는 '나팔부대'라고 불리던 좌익 빨치산 부대의 고유 이름이다.
정식 호칭은 '조선인민유격대 독립 제4지대'이다. 남한 최초의 조직적인 좌익 빨치산 부대였고, 특히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인 총수 이현상의 직속부대였다. 기록들에 의하면 1949년 이래 소백산·지리산 지구 공비토벌전에서의 교전횟수는 1만 717회, 전몰군경의 수는 6,333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나있다. 또한 확실한 근거자료는 없지만 빨치산측 사망자의 수는 대략 1만 수천 명은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1952년 3월 15일 빨치산 토벌을 위해 전북 남원에 설치되었던 백선엽 야전군 사령부(일명 백야전사)는 토벌임무를 마치고 해체되었으며, 마침내 제4지대의 이름도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1952년 4월 남한에서 활동해온 모든 빨치산 지대는 해체되고 남한 전역이 5개 지구당으로 개편되면서 빨치산 부대는 중대단위의 소조(小組)로 분산활동을 했다.
2. 이현상(李鉉相, 1905년 9월 27일 ~ 1953년 9월 17일)은 한국의 공산주의계열 독립운동가, 사회주의자, 노동운동가이며, 해방 후에는 남조선로동당의 간부로 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파르티잔 활동을 주도했다. 호는 화산(火山), 가명은 로명선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이씨. 금산군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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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의 출생과 어린 시절]
충청남도 금산군(당시 전라북도 금산읍) 군북면 외부리 출신이다. 이현상의 집안은 전주 이씨 가문으로, 군북면에서 가장 토지를 많이 소유한 부농이었다. 아버지 이면배는 일제 강점기 초기에 군북면장을 지냈으며, 이현상은 이면배의 3남 중 막내아들이었다.
이현상은 조혼 풍습에 따라 16세가 된 1920년에 이웃 무주군 무풍면의 유복한 집안 출신인 최문기와 혼인했다.
[이현상의 유격대 활동]
1948년에 여순 14연대 반란사건이 일어났다. 반란군은 거의 진압되고 남은 부대원들은 이현상의 지휘 아래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다. 강동정치학원에서 교육을 받고 남파된 유격대도 조선인민유격대의 제1병단과 제3병단으로 가세하였고, 통칭 지리산유격대로 불리는 이현상 부대는 제2병단으로 명명되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이현상도 참전했다. 인천상륙작전후 조선인민군이 후퇴한 뒤에도 조선인민유격대 총사령관인 이승엽은 남한지역의 6개 도당 위원장회의를 소집하여 유격대들을 남부군이라는 이름으로 통합하여 유격전을 펼치도록 하였고 이현상을 '로명선'이라는 가명으로 남부군 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이현상은 등사기로 기관지인 《승리의 길》를 발행했다.
남부군은 1951년 5월 26일 충북도청 소재지 청주를 기습하여 여러 관공서를 불태우고 청주형무소의 좌익수 백사십이명을 석방시켰다. 6월 초, 민주지산에 자리를 잡고 인근 도시와 경부선 군용열차를 습격하였다. 6월 중순 덕유산 송치골에서 남한 6개 도당 위원장을 소집해 남부군 결성에 합의하고 총사령관으로 취임하였다. 8월 14일 참모장 박종하가 가회전투도중 사망하자 이현상의 남부군은 지리산으로 다시 들어갔다. 11월 말부터 대한민국 국군과 경찰의 토벌 작전이 거세지면서, '조선인민유격대 독립4지대'로 개편된 이현상 부대는 어려운 처지에 몰렸다.
1952년 1월 18일 군경토벌대에 쫓기던 지리산 일대 유격대와 좌익피난민 등 이천여 명이 대성리 골짜기에서 포위되었다. 미군이 네이팜탄 등을 투하하여 천 명 이상 죽거나 체포되었고, 독립4지대도 한 달 만에 4백명이던 대원이 백오십 명으로 줄어들었다.
1953년에는 대한민국 영역에 남은 유격대의 지위에 대한 언급 없이 한국 전쟁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협정 체결 1주일 후인 8월 3일에는 평양에서 박헌영이 정식으로 구속되고 리승엽 등은 처형되었다. 남로당 지휘 계통에 있던 이현상은 전라남북도와 제주도, 경상남도 서부 지역을 책임지는 제5지구당 위원장직에서 물러나 평당원으로 돌아갔다.
[죽음]
이현상은 모든 직책을 잃고 하산을 계획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토벌대가 하동군 빗점골에 숨어 있던 이현상을 추적하여 대략의 위치를 파악했다. 9월 17일에 토벌대는 빗점골을 포위했고, 이튿날인 9월 18일 오전에 총상을 입고 사망한 이현상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당시에도 이현상을 사살한 공을 놓고 차일혁이 이끄는 경찰 수색대와 김종원의 국군 부대가 다툼을 벌였고, 이태 등은 북조선의 지시로 암살되었다는 소문을 기록한 바도 있어 정확한 사망 경위는 알 수 없다. 사망 날짜는 국군이 시신 발견 전날인 9월 17일로 추정했다.
이현상의 시신은 방부 처리되어 서울로 이송되었다. 동향 출신의 친구인 유진산 등 지인들이 시신을 찾아와 확인했다. 빨치산의 최후를 보여준다는 명목으로 창경원과 도로변에서 바지만 입힌 채 유품과 더불어 20여일동안 전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현상의 가족들은 대부분 월북한데다, 남은 친척들은 한국 전쟁 중 고초를 당해 시신의 인수를 거부했다. 결국 토벌군 측의 차일혁이 섬진강에서 화장해 장례를 치러주었다.
다음은 이현상이 지리산에서 조선인민유격대를 지휘하며 창작한 한시이다.
地理風雲堂鴻洞 지리산의 풍운이 당홍동에 감도는데
伐劍千里南州越 검을 품고 남주를 넘어오길 천리로다
一念向時非祖國 언제 내 마음 속에서 조국이 떠난 적이 있었을까?
胸有萬甲心流血 가슴에 단단한 각오가 있고 마음엔 끓는 피가 있도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한 때 우리 민족사에서는 가방 끈이 긴 사람 치고 인류의 보편가치인 ‘평등’개념을 우상화해서 공산주의에 몰두하지 않는 사람이 드물었다고 한다. 위 詩에서도 실감하듯 남부군의 지도자 이현상은 대단한 수준의 인텔리켄차였다.
그러나 그가 추구했던 이념이 대한민국에서는 반체제였기 때문에 그의 우국충정도, 그를 따르던 철없는 부하들도 결국 ‘개죽음’일 수 밖에 없는 최후를 보게 된다.
한편, 오늘날 ‘우리 부모가 기왕이면 비행기 사고로 돌아가시기를!...’하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사실 같은 죽음일 바에야 몹쓸 병에 걸려 모든 재산 탕진하고 죽는 것 보다, 보험료 많이 타는 비행기 사고를 누구인들 선호하지 않겠는가.
남부군의 무대가 된 지역에서도 이 같은 희비가 엇갈리는 현상이 많았다. 낮에 나타나는 군경 쪽을 택하다가 죽으면 국가유공자 후손이 되어 여러 가지 특혜를 받지만, 밤에 나타나는 반란군 쪽을 선택했다가는 그 후손이 ‘낙인’까지 찍히어 많은 불이익을 당하게 되는 개죽음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민족적으로 가인-아벨을 대표한 당시의 상황에서 어느 길을 택할 것이냐는 매우 중요할 뿐만 아니라 아주 어려운 선택이기도 했다. 이는 오늘날의 섭리적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아니함을 유념하여 우리 모두가 지혜로운 선택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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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관님의 댓글
사람을 대할 때 고정관념이나 불필요한 선입견은 버려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며, 공감 합니다.
매사를 거시적으로 보는 안목이 필요하다는 말씀처럼, 제가 언급한 베드로와 가롯 유다의 예는 다시 한번 곱씹어 봄직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 처럼, 두 분 제자는 주님으로부터 각별한 신임을 받았지요. 어쩜 전대를 맡았다는 유다가 더큰 신뢰를 받았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유다는 믿던 주님을 인간적으로 평가하여 배역의 길로 돌아선듯하고(이미 마음이 떠나 큰 사고를 친후 양심의 가책으로 자살해 봐야 이미 기차는 떠났다고 생각 됨), 베드로는 주님에 대해 \\\'마음이 떠나지는 아니\\\'했지요. 그도 인간적인 생각이 상황을 이기지 못하고 잠시 나약해진 모습을 보였지만, 오히려 그것이 남은 생애의 반면교사가 되어 결국 명실공히 수제자의 영광을 갖게 되었다고 봅니다.
친일파. 공산주의자 모두 일본이나 북쪽에서는 나름대로 삶의 전체를 평가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대한민국의 체제에서만은 그가 삶의 마지막을 어떻게 보냈느냐가 평가의 기준이 됨은 \\\'두 말하면 잔소리\\\' 일 것 입니다.
후손들이 아무리 전체를 보아주십사고 희구해 보아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과거에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았던 앞으로의 남은 기간을 어떤 자세로 살아가느냐에 따라 \\\'희망\\\'이 있다는 점에서 다행이라면 다행으로 여겨 집니다.
박순철님의 댓글
이의가 있음도 표합니다.
예를 든 베드로의 후회는 받아들여져서 초대교황으로까지 높게 대우받았지만
가룟유다의 후회는 자살까지하였지만 결코 받아들여지지않은 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일제시대에 생산된 많은 친일파들이 자신의 과오를 후회하고 강렬한 애국의 길을 갔지만
일제시대에 행한 친일의 과오는 조금도 상쇄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의 마지막 선택은 역사의 부름을 받았지만, 가룟유다, 친일파의 마지막 선택은
역사의 부름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을 볼 때 사람에 대한 평가에는 어떤 고정관념이 전제하지 않는가
조심스럽게 접근해 봅니다.
모든 죄인들에게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말라."하면서
유독 친일파나 전과자나 공산주의자에게는 그 굴레를 결코 벗겨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나는 축복가정이다 하면 무조건 좋게 보는 고정관념이 있음을 좋아합니다.
어떤 고정관념을 가졌느냐 -- 이것이 문제라고 봅니다.
정해관님의 댓글
먼저 댓글의 위 두 분께 진심으로 감사 올립니다.
선덕거사님의 견해에 많이 공감합니다.
어떤 사람의 삶에 대한 공과의 평가는 나무도 보고 숲도 보아야 함이 지당 합니다.
그리고 '나와 달라도 틀리는 것은 아님'이라는 말씀도 항상 명심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삶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그가 마지막에 어떤 가치의 삶을 살았느냐가 매우 중요하고, 더우기 신앙인은 '십년공부 도로아미타불'이라는 말이나 베드로와 가롯 유다의 경우처럼, 삶의 마지막 선택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상기 시키고 싶습니다.
혜숙님의 지혜와 부지런 하심과 성의에 항상 감사 올립니다.
박순철님의 댓글
많은 일제하의 저명인사나 문인들이 친일파입니다.
그러나 작가론 입장에서 그 일대기를 훑어보면
시종일관 친일만 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열심히 순수문학을 하다가 특히 일제말기에
탄압에 의하여 타의로 변절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렇지만 현대사회는 그들을 친일파로 규정했고 그렇게 고정되었습니다.
잘 나가다가 잠시 친일해도 그 일생 전부를 친일파로 규정합니다.
특히 일제는 저명인사들을 집중적으로 친일하도록 만든 흔적이
역사적 기록 여기저기에서 나타납니다.
이현승의 독립투쟁도 그 성과가 분명히 있지만
위와 같은 경우로 보면 좌익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네요.
따라서 인간의 일생을 종합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특징적인 한 단면만으로 접근하는 방법은 오류를 낳을 가능성이 큽니다.
나무도 보고 숲도 볼 수 있는 시각이 아쉬웁습니다.
거시적이면서 동시에 미시적 안목도 필요합니다.
나하고 달라도 틀리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것의 아름다움도 보려고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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