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요순(海東堯舜) 세종과의 작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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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요순(海東堯舜) 세종과의 작별
말년의 세종은 여느 범인처럼 쉽게 분노하고 신하들을 노여워하고 심지어 스스로를 학대하는 모습에서 오히려 초라한 고집장이 노인을 보게 된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너무나도 아꼈던 부인 소헌왕후의 죽음이었다.
세종 28년 (1446)3월 10일 왕후는 중병에 걸렸다. 세종은 즉시 동궁과 나머지 아들들로 하여금 산천과 신사, 사찰에 가서 기도를 드리도록 했다. 그래도 차도가 없자 세종은 자신의 부덕을 탓하며 대역 모반죄. 조부모나 부모를 살해한 죄 등을 제외한 나머지 죄수들을 사면토록 한다. 그리고 이날부터 승려 49명이 정근 기도(불교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의 간절한 소원이 성취되기를 비는 기도)에 들어갔다.
그런 정성에도 불구하고 현모양처의 전형이었던 소헌왕후는 둘째 수양대군의 집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한다. 늘 사랑과 연민으로 부인을 대했던 세종의 정신적 충격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이 점은 그의 장례 절차를 둘러싸고 신하들과 벌인 논쟁에서 다양하게 드러난다.
먼저 중궁을 위로하기 위한 불경을 만드는 문제로 신하들과 충돌한다. 세종은 수양대군이 책임자가 되어 불경을 만들기로 했다고 승정원에 통보하나 승지들이 한결같이 불가하다는 의견을 올렸다. 세종은 화가 났다.
“그대들은 불경을 만드는 것을 그르게 여기는데, 어버이를 위하여 佛事를 하지 않는 사람이 누구인가?”
“불경을 만드는 것이 돌아가신 중궁에게 아무런 도움도 없을 것이니, 그만두기를 청합니다.” 라며 강경하게 반대했다.
“그대들은 고금의 사리를 통달하여 불교를 배척하니 현명한 신하이고, 나는 의리를 알지못하고 불법만을 존중하여 믿으니 무지한 임금이구나!” 결국 세종은 신하들의 반박을 물리치고 불경 간행 사업을 밀어 붙인다. <석보상절>이 그것이다.
2년후 세종은 경복궁 내 문소전 서북쪽에 불당을 세울 것을 승정원에 명한다. 당연히 신하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세종도 이미 이같은 반발을 예상한듯 “내 뜻은 여기에 그치고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겠으니, 의정부에 이르라”고 덧붙였다.
다음 날 집현전 직제학 신석조를 비롯한 의정부와 6조의 대신들이 친견을 청하자 세종은 싸늘하게 반응했다.
“나의 친형제와 늙은 대신이라도 능히 친히 보지 못하는데, 너희들은 무슨 물건이기에 반드시 나를 引見하기를 원하는가.”
세종의 아들들을 제외한 종친. 의정부. 6조. 대간. 심지어 성균관 학생들까지 연일 불당 설치의 불가를 아뢰는 상소를 올렸지만, 모두 거부하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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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결국 많은 병치레를 하다가 막내인 8째 아들 영응대군 이염의 집 ‘동별궁’에서 숨을 거둔다. <실록>은 세종의 생애를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임금은 슬기롭고 도리에 밝으매, 마음이 밝고 뛰어나게 지혜롭고, 인자하고 효성이 지극하며, 지혜롭고 용감하게 결단하며, 사저에 있을 때부터 배우기를 좋아하되 게으르지 않아,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았다. 일찍이 여러 달 동안 편치 않았는데도 글읽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태종이 근심하여 서적을 거두어 감추게 하였는데, 사이에 한 책이 남아있어 날마다 외우기를 마지 않으니, 대개 천성이 이와 같았다.
즉위함에 미쳐, 매일 새벽이면 옷을 입고, 날이 환하게 밝으면 조회를 받고, 다음에 정사를 보고, 다음에는 윤대를 행하고, 다음 경연에 나아가기를 한 번도 게으르지 않았다.
또 처음으로 집현전을 두고 글 잘하는 선비를 뽑아 고문으로 삼고, 경서와 역사를 열람할 때는 즐거워하여 싫어할 줄을 모르고, 희귀한 문적이나 옛 사람이 남기고 간 글을 한번 보면 잊지 않으며 힘써 다스리기를 도모하기를 처음과 나중이 한결 같아, 文과 武의 정치가 빠짐없이 잘 되었고, 禮樂의 文을 모두 일으켰으매, 鐘律과 歷象의 법 같은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옛날에는 알지도 못하는 것인데, 모두 임금이 발명한 것이고, 九族 (주변 나라들)과 도탑게 화목하였으며, 두 형에게 우애하니, 사람이 이간질하는 말을 못하였다.
인륜에 밝았고 모든 사물에 자상하니, 남쪽과 북녘이 복종하여 나라 안이 편안하여, 백성이 살아가기를 즐겨한지 무릇 30년 이다. 거룩한 덕이 높고 높으매, 사람들이 이름을 짓지 못하여 당시에 해동요순이라 불렀다. 늦으막에 불사로서 혹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한번도 향을 올리거나 부처에게 절한 적은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올바르게만 하였다.
이랬던 세종이기에 그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말년과 죽음이 오히려 더 동정을 불러일으키는지 모른다. 게다가 그의 죽음 이후는 처참했다. 세종은 자신이 총애했던 자식들과 신하들이 서로 옥좌를 놓고 골육상쟁을 벌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세종의 바람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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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관님의 댓글
세종께서는 12살에 소헌왕후와 결혼하여 38년 동안 해로하였는데, (마치 지금의 우리 가정 들 평균 나이와 비슷) 여느 왕들이 조강지처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사례와 비교하면, 세종은 사리가 분명하고 아주 모범적으로 가정을 이루신듯 합니다. 왕후가 죽자 여러 신하들의 빗발같은 반대를 물리치고 왕후를 위해 불경간행(석보상절)과 불사(불당건립)를 밀어부친 사실을 보면서, 큰 교훈을 얻게 됩니다.
명실공히 한민족 최고의 지도자셨던 '해동요순' 세종께서도 자녀 문제에서만은 행복하지 못했던 역사를 살펴보게 됩니다. 세종6년에 장녀 정소공주(당시 13세)가 죽자 세종은 너무 슬퍼한 나머지 시신을 부여잡고 우느라 염을 하는데 곤란을 겪었다고 야사는 전하며, 재위 32년중 각종 喪으로 인해 10년 이상 상복을 입은채로 지내야 했다고 하고, 그의 사후 '단종애사'로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아들 수양대군(7대 세조)으로 말미암아 저승에서 상심이 매우 컸을 것으로 짐작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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