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00원의 인물 :신 사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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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 1504(연산군 10)~1551(명종 6).
조선 중기의 예술가.
시·글씨·그림에 모두 뛰어났으며 이이(李珥)의 어머니로 사대부 부녀에게 요구되는 덕행과 재능을 겸비한 현모양처로 칭송된다. 본관은 평산. 아버지는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명화(名和), 어머니는 용인이씨로 사온(思溫)의 딸이다. 이이는 〈행장기〉를 지어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천품, 순효한 성품 등을 기록했다. 사임당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뜻의 당호이며, 이밖에 시임당(媤任堂)·임사재(妊思齊)라고도 했다. 강릉 외가에서 자랐으며, 19세에 덕수이씨 원수(元秀)와 혼인했다. 그뒤 친정에 머물다가 38세에 시집살이를 주관하기 위해 서울로 왔다. 사임당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그림은 40폭 정도인데, 산수·포도·묵죽·묵매·초충 등 다양한 분야의 소재를 즐겨 그렸다. 산수에서는 안견파 화풍과 강희안 이래의 절파 화풍을 절충한 화풍으로, 16세기 전반에 생겨난 산수화단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월하고주도 月下孤舟圖〉에서 산들은 나지막하고 옆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수면을 따라 전개되는 공간은 막힘이 없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이러한 작품의 구도나 공간처리 등은 안견파의 것을 확산시킨 듯하지만, 필묵법이나 준법은 절파 계통의 영향이 가미되어 있다. 〈초충도 草蟲圖〉에서는 여성적인 섬세한 필치와 미려한 설채법을 구사했다. 8폭의 〈초충도〉 중에서 '가지'를 살펴보면, 화폭의 중앙에 곡선진 가지의 두 줄기가 좌우대칭을 이루며 서 있고, 섬약한 줄기들에는 밤색과 흰색의 가지들이 곱게 열려 있다. 가지 주변에는 종류가 다른 화초와 곤충들이 배열되어 있어 그림에 생동감을 더해준다. 안정된 구도, 몰골법(沒骨法)으로만 이루어진 묘사, 아담하고 음영을 살린 설채법 등이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을 보여준다. 이밖의 주요작품으로는 〈자리도 紫鯉圖〉·〈노안도 蘆雁圖〉·〈연로도 蓮鷺圖〉·〈요안조압도 蓼岸鳥鴨圖〉 등이 있다. 사임당의 화풍은 넷째 아들인 우(瑀)와 맏딸인 매창(梅窓) 이부인(李夫人)에게 전해졌다. 글씨는 초서 6폭과 해서 1폭이 남아 있다. 1868년 강릉부사 윤종의는 사임당의 글씨를 판각하여 오죽헌에 보관했다. 강릉을 떠나 대관령을 넘어 서울 시가로 가면서 지은 〈유대관령망친정 踰大關嶺望親庭〉과 서울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지은 〈사친 思親〉 등의 시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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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임당 신씨는 강원도 강릉에서 교양 높은 부모의 딸로 태어났다. 바느질이나 수예는 물론, 글과 글씨. 그림 등에 이르기까지 천재적 재능을 보여 부모. 친지의 깊은 사랑을 받았다.
7세 때 이미 안견의 화풍에 영향을 받아 산수화를 그렸다고 하는데, 그림에서는 산수화뿐만 아니라 포도. 풀. 벌레 등에도 솜씨가 뛰어났다. 유교의 경전과 좋은 책들을 널리 읽어 학문을 닦기도 하였다.
19세 때 이원수와 결혼한 후에 아버님이 일찍 별세하셨으므로 홀어머니 이씨를 모시고 친정에 살면서 서울 시댁과 율곡리를 내왕 하였다.
사임당이 33세 되던 해 이른 봄 밤, 꿈에 동해에 이르니 선녀가 바닷속으로부터 살결이 백옥 같은 옥동자하나를 안고 나와 부인의 품에 안겨주는 꿈을 꾸고 아기를 잉태하였고 다시 그해 12월 26일 새벽에도 검은 용이 바다로 부터 날아와 부인의 침실에 이르러 문머리에 서려 있는 꿈을 꾸고 아기를 낳으니 그가 바로 셋째 아들 율곡 이이선생이다.
사임당은 항상 몸가짐을 조심하여 자식들을 교육시키고, 남편에게는 항상 올바른 길을 가도록 내조하였으며, 7남매를 모두 훌륭하게 키웠다. 그러면서도 시부모와 친정어머니를 잘 모셔 효녀로서도 알려졌다.
<대관령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다>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 길로 가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흰 구름만 저문산을 날아 내리네.
이 시는 사임당이 38세 때 강릉 친정으로 어머님을 찾아뵙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도중에 대관령에서 오죽헌 쪽을 바라보면서 홀로 계시는 늙으신 어머님을 그리며 지은 것이다.
어느 날, 사임당은 남편인 이공과, 10년 동안 서로 헤어져 학업을 닦은 뒤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맺었다. 마침내 이공은 사랑하는 부인을 처가에 남겨 두고 서울을 향해서 길을 떠났다. 그러나 이공은 며칠동안 계속 집으로 되돌아 왔다. 사임당은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바느질 그릇에서 가위를 끄집어내어 이공 앞에 놓고, 심각한 목소리로,
“나는 세상에 희망이 없는 몸이라 어찌 오래 더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당신이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면 스스로 자결이라도 해서 내 인생을 마치는 편이 더 좋을 것입니다.”
이 말 한 마디에 이공은 눈이 번쩍 뜨였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굳게 결심하고 부인과 작별하였다. 서울로 올라온 이공은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뜻을 이루었다.
사임당의 굳은 의지와 희생을 감내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그가 교양과 학문을 갖춘 예술인으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더불어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북돋아준 좋은 환경이 있었다. 사임당은 일찍 학자의 집안에서 자라나 엄격한 교훈 밑에서 유학의 경전과 명현들의 문집을 탐독하여 시와 문장에 능하였다. 글씨에도 고상한 정신과 기백이 넘쳐 흐르며 기품있는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재능은 7세에 안견 (安堅)의 그림을 스스로 사숙(私淑)하였던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그녀는 통찰력과 판단력이 뛰어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녀 예술가로서 대성할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감회가 일어나 눈물을 지었다든지 또는 강릉의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운 것 등은 그녀의 섬세한 감정이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녀의 그림·글씨·시는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운데, 그림은 풀벌레·포도·화조·어죽(魚竹)·매화·난초·산수 등이 주된 화제(畵題)이다. 마치 생동하는 듯한 섬세한 사실화여서 풀벌레 그림을 마당에 내놓아 여름 볕에 말리려 하자, 닭이 와서 산 풀벌레인 줄 알고 쪼아 종이가 뚫어질뻔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녀의 그림에 대한 예찬은 많은 사람들의 발문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여류의 으뜸이다. 그림으로 채색화·묵화 등 약 40폭 정도가 전해지고 있는데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그림도 수십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품으로는 〈자리도 紫鯉圖〉·〈산수도 山水圖〉·〈초충도 草蟲圖〉·〈노안도 蘆雁圖〉·〈연로도 蓮鷺圖〉·〈요안조압도 蓼岸鳥鴨圖〉와 6폭초서병풍 등이 있다.
사임당은 완전한 예술인으로서의 생활 속에서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을 성숙시켰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그는 조선왕조가 요구하는 유교적 여성상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스스로 개척한 여성이라는 점에서 더욱 본받을 만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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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혜숙님의 댓글
찾다가 못 찾았습니다. 그렇하고 눈이 밝은 사람이 되기 위해선 이 사랑방에 잘 와야 겠다 싶습니다.
본글도 쓰시고 댓글도 대강의 주석을 해 주시니 댓글 쓰기가 좀 더 용이하군요.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맨날 돈 쓰기 바쁘고 또 일하러 다니기 바뻐서 천천히 세세히 들여다 볼 여가가 없었는 데
화폐 예술 품을 이방에 모셔 와 전시하고 진열 해 주시고
잘 가르쳐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덕분에 화폐를 잘알고 가까워지고 사랑하고 아끼고
따뜻이 대하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정해관님의 댓글
1) 유일한 여성이라는 점에서 2) 많고 많은 인재들 중에 굳이 모자가 함께 올라야 하는가(율곡 이이와 모자지간) 등등 찬반에 대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위 기록을 보니, 남편과 아들을 훌륭하게 내조하고 교육하였으며 주부와 어머니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문학인, 서예가, 예술가로서도 큰 발자취를 남긴 능력의 여성임을 알게 됩니다. (또 하나 눈이 밝은 사람은 초기부터 이 사랑방의 한 구석을 단단히 지키고 산이나 들에도 빠지지 아니하는 '이태임' 자매님의 이름에 그렇게도 깊은 뜻이 있음(주나라 문왕의 오마니)을 예전에는 미처 몰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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