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녕대군(세종)의 등극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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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녕대군(세종)의 등극과정
세종의 아버지 태종(이방원)은 우리들이 아는 장남 양녕대군을 낳기 전에 이미 3남 3녀를 보았고, 그래서 세자였던 양녕은 태어난 순서로 일곱째였다. 양녕이 태어난 1394년(태조 3년)은 이방원이 정안공으로 있으면서 어려운 시절을 보내던 때였다. 그런 까닭에 양녕은 금지옥엽의 맏아들 격이었다.
한편, 2차에 걸친 왕자의 난을 일으키며 많은 피를 보았고 쿠데타로 왕권을 잡은 태종은 왕위가 적장자에게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 일종의 신앙과도 같았다.
그런데 모든 기대와 희망에 反하여 양녕은 왕권을 이어받을 재목으로서 성장하지 아니하고 학문을 멀리하며 특히 주색잡기에 여념이 없어 부왕과 신하들을 실망시켰다. 신하들로부터 수차에 걸친 폐세자 상소를 받은 태종은 마침내 결단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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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근본(국본)은 정하지 아니할 수 없다. 옛날 중국에서는 유복자라도 세워 선왕의 유업을 이어받게 하였고, 또 본부인의 장자를 세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법식이다. 양녕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큰 아이는 5살이고 작은 아이는 3살이니, 나는 양녕의 큰아들을 세자에 앉히고자 한다. 장자가 유고하면 그 동생을 세워 후사를 삼을 것이니, 왕세손이라 칭할지, 왕태손이라 칭할지는 옛 제도를 상고하여 의논해서 아뢰어라”
폐세자를 기정사실화하면서 양녕의 아들 중에서 후사를 고르겠다는 뜻과 함께 그 아이의 호칭문제를 결정하라는 것이었다. 일단은 성리학의 전통적인 종법을 그대로 따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적장자 상속의 원칙을 적용하겠다는 뜻이다.
[택현론이 제기되다]
조계청에서 신하들의 의논이 시작되었다. 양녕의 장남을 후사로 삼겠다는 태종의 입장표명이 있었기 때문인지 우의정 한상경 이하 모든 신하들은 양녕의 장남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때 그들을 제외한 두 사람 영의정 유정현과 좌의정 박은이 조심스럽게 어진 사람을 고르자는 擇賢論을 제기 한다.
유정현과 박은은 태종의 총애가 깊어 하루에도 벼슬을 9번 바꿔서 한다는 말 그대로 一日九遷(일일구천)하던 투톱이었다. 그들은 태종의 의중을 읽었다고 보여 진다.
이렇게 되자 이번에는 김 점. 김구덕. 공조판서이자 충녕대군의 장인 심 온 등 15명이 나서 “어진 사람을 골라야 합니다”라며 유정현과 박은을 거들고 나섰다. 그 와중에 다소 엉뚱한 의견을 낸 인물이 있었는데, 이조판서 이 원 이었다. “옛 사람들은 큰일이 있을적에 반드시 거북점과 시초점을 쳤으니, 청컨대 점을쳐서 정해야 합니다” 마냥 엉뚱한 소리라고는 볼 수 없다. 이미 태종은 천도에 대하여 한양이냐 개경이냐 무악이냐며 신하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리자 동전을 던져 한양으로 천도를 결정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신하들의 의견을 취합한 지신사 조말생이 태종에게 보고를 올렸다. 그를 읽어본 태종은 처음에는 실제로 이 원의 의견을 받아들여 “점을 쳐서 정하도록 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내전의 원경왕후 민씨를 찾아가 의견을 물은바, 왕후는 “형을 폐하고 아우를 세우는 것은 화란의 근본이 됩니다.”라며 초지일관 양녕을 지지했다. 굳이 양녕을 폐한다면 그 아들을 세자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록>은 “임금도 또한 처음에는 이를 옳게 여겼으나, 한참 만에 곧 깨달아 말하기를 ‘어진 사람을 고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최종 결심이 내려진 것이다.
“나는 제(양녕)의 아들로써 대신 시키고자 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이 모두 ‘불가하다’고 하니 마땅히 어진 사람을 골라서 아뢰어라.” 마음 속에 점 찍어둔 충녕대군을 지명하면 될 것을 태종은 다시 이런 식으로 신하들에게 택현의 책임을 넌지시 떠넘겼다.
[공의로 충녕을 고르다]
조말생에게서 이 말을 전해 들은 조계청의 유정현 이하 신하들은 “아들을 알고 신하를 아는 것은 임금만한 이가 없습니다.”라고 직접 고르라고 태종에게 다시 미뤘다. 왕과 신하들은 왜 결정을 서로 미루며 핑퐁게임을 하고 있는 것일까? 신하들로서는 당연히 뒷날 일이 잘못될 경우의 사태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혹시라도 양녕이 부활할 경우 복수의 칼날이 바로 자신들을 향할 수도 있는 것이다.
반면에 태종은 아래와 같은 박은의 상소문에 나온 바와 같은 이유가 있다.
“뒷 세상으로 하여금 전하께서 맏아들을 폐하고 어진이를 세운 거조(큰일을 저지름)가 공론으로 되었다는 것을 알리게 하시고, 또 양녕으로하여금 자신이 공론에서 용납되지 못하였음을 알게하여, 원망하고 미워함이 없게 하는 일입니다.”
양녕의 폐세자는 태종 개인의 순간적인 결단이나 신하들의 공모가 아니라 태종과 신하들이 함께 의견을 모은 최종 결론, 즉 공의였다는 형식을 만들어 냄으로써 양녕이 되살아날 수 있는 명분 자체를 없애 버리는 것, 그것이 이처럼 태종이 계속해서 자신의 의견을 우회적으로 표명하면서 신하들의 동의를 얻어내는 절차를 밟았던 까닭이었다.
태종이 오랜 시간을 두고 미리 치밀한 조처와 준비를 해두었기 때문에 소위 ‘양녕세력’의 조직적 반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양녕은 일단 경기도 광주로 내치기로 결정이 났다.
사실 충녕에 대한 신하들의 신망은 오래전부터 컸다. 사람과 말을 보는 눈은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는다고 자신했던 태종은 “충녕은 관홍장중(寬弘莊重)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태종의 최측근이었던 이숙번도 일찍부터 태종에게 충녕을 은밀하게 추천한 적이 있었고 많은 신하들이 충녕의 덕을 경모해 마지않았다. 심지어 그 무렵 명나라 사신 황엄도 충녕을 볼때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영명하기가 뛰어나 부왕(태종)을 닮았다. 동국(조선)의 임금자리는 장차 이 사람에게 돌아갈 것이다.”
국내외의 이같은 높은 신망이 조선의 세자 자리를 양녕에서 충녕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세종 조선의 표준을 세우다>에서
양녕대군(讓寧大君, 1394년 ~ 1462년 9월 7일)은
조선시대 초기의 왕세자이자 왕족, 정치인으로 조선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장자로 출생하였다. 성은 이(李), 휘는 제(褆), 자 후백(厚伯), 시호는 강정(剛靖)이다. 조선 세종, 효령대군, 성녕대군의 친형이다.
1404년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부왕 태종과 마찰을 빚다가 폐위되었다. 왕세자 자리를 양보한 것은 그의 본심이었다는 설과 본심이 아니었다는 설이 양립하고 있다. 증(贈) 의정부좌의정 광산군(光山君)에 증직된 광산 김씨 김한로(金漢老)의 딸이자 본처인 수성군부인 김씨 사이에서 3남 4녀를 두었으며, 첩에게서 7남 12녀를 낳았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다섯째 서자 장평도정 이흔의 후손이었다. 양녕대군은 서예에 능하여 숭례문과 경회루 등의 현판에 이름을 썼다.
<세자 폐위 배경>
김시양(金時讓)은 저서 자해필담(紫海筆談)에서 양녕대군의 폐세자 원인에 세가지 추론을 하였다. 첫 번째로는, 양녕과 아버지 태종의 관계에 대해서 그는 양녕대군이 세자로 있을 때 태종의 뜻이 세종(충녕대군)에게 있는 것을 알고 일부러 미친 척하고 자리를 사양하니 태종이 곧 폐하여 세종을 세웠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양녕대군과 동생 충녕대군의 관계에 대해서, 양녕대군이 세자 자리에서 폐위된 뒤 한성에서 외지로 쫓겨나 경기도 이천군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세종대왕이 몰래 양녕대군을 불러 위로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와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데, 세자(양녕대군)의 계속된 비행으로 아버지 태종이 몇번 질책하자, 불만을 품고 태종에게 “자신은 잘못이 없으며, 아버지(태종)은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하시면서(남여문제) 왜 저만 못하게 하시느냐”하는 상소를 올려 태종을 비난했다. 이에 분노한 태종은 세자를 폐하여 이천군으로 귀양보내고 동생 충녕대군에게 세자 자리를 넘겨주었다고 한다.
< 세자 폐위 이후>
1418년 충녕대군이 왕위에 올랐다. 동생 세종대왕은 이천군에 유배된 형 양녕대군을 석방하였다. 그러나 동생의 즉위 이후에도 사이는 좋았다고 한다. 세종의 즉위 뒤에도 여러 번 비행을 저질렀는데, 부왕 태종과 모후 원경왕후의 사후 비행의 강도가 더해졌다. 그의 비행에 대해 신하들은 여러 번 탄핵하였으나 세종은 그를 배려해 벌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453년에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수양대군의 편을 들어 그를 독려했고, 심지어는 안평대군을 사사시키라고 간청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계유정난이 끝나자 단종을 죽이라고 간청까지 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자신의 자리를 빼앗은 동생 세종에 대한 보복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으며, 이에 대한 이유는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다.
<사망>
1462년(세조8년)에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문학에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국보 1호였던 숭례문의 간판의 글씨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죽으면서 유언하기를 '나라의 예장을 받지 말며 묘비도 세우지 말것이며 상석도 놓지 말고 산소치장을 극히 검소하게 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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