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와 율곡-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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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와 율곡-1
퇴계(1501~1570)와 율곡(1536~1584)은 35세 차이가 난다. 약 한 세대 차이가 나는 것이다. 율곡이 어렸을 때부터 퇴계는 이미 학자로서 명성이 높았지만, 율곡은 퇴계에게 배울 기회가 없었다. 율곡이 퇴계를 처음 만난 것은 이미 성년이 된 23세 때였다. 그 때 이미 퇴계는 환갑을 눈 앞에 둔 노인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만나고 난 뒤부터 율곡은 퇴계를 사림의 종장으로서 높이 받들었고, 퇴계도 율곡을 빼어난 능력을 가진 후배로 대우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서로 생각을 묻고 고민을 나누었다.
퇴계와 율곡의 교유관계를 추적하기 위한 자료는 기본적으로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다. <퇴계집>에는 퇴계가 율곡에게 보낸 편지가 모두 8통 실려있고, <율곡집>에는 율곡이 퇴계에게 보낸 편지가 5통 실려 있다.
1. 두 사람의 첫 만남
명종 13년(1558) 2월 율곡이 퇴계를 찾아감으로써 이루어 졌다. 그 전해 9월 율곡은 노경린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다. 노경린은 당시 성주목사이었기에 율곡은 성주에서 혼례를 치른 뒤 이듬해 까지 성주에 머물렀다. 해가 바뀌고 봄이 되자 율곡은 강릉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그 길에 그는 예안 도산으로 퇴계를 찾아가 만났다. 퇴계 58세, 율곡 23세 때이다.
이 때 퇴계는 한양에 가지 않고 도산에 자리를 잡아 머물면서 학문과 강학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을 때였다. 그 때 퇴계의 명성은 이미 온 나라에 높아, 수많은 사람이 그에게서 배우고자 하던 때였다. 아마 율곡 또한 그러한 퇴계의 명성을 듣고 한 번 만나보고자 했을 것이다. 퇴계 또한 율곡에 대해 어느 정도는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이다. 율곡은 어린 시절부터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기 때문이다.
율곡이 퇴계를 찾아간 때는 2월이니 이른 봄이었다. 율곡은 비 때문에 바로 떠나지 못하고 이틀 밤을 그곳에서 보내게 되었으며, 사흘을 머무르는 동안 퇴계와 율곡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인정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때 율곡은 퇴계에게 올린 시에서 퇴계가 공자와 주자로부터 이어지는 도학의 정통을 계승했으며 시골에 물러나 학문에만 힘쓰지만 그 경지가 성현에 버금갈 정도라 많은 이들에게 감화를 미친다고 칭송했다. 그러면서 자신도 그 학문을 배우고 싶으니 성가시다고 물리치지 마시라고 요청한다. 이에 대해 퇴계는 발랄하고 젊은 율곡이 찾아와 새로운 자극을 준것에 감사하며 자신은 처사라는 이름을 감당할 정도가 되지 못한다는 겸손한 태도를 보인다. 그러면서도 감정을 싣는 시 짖기에 너무 힘쓰지 말고 성리학 공부에 힘을 쏟으라는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퇴계가 율곡에게 시 짖기를 멀리하라고 충고했다는 사실은 퇴계의 편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퇴계는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은 세상에 적지 않지만, 쓸데없는 일에 재주를 허비해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경고의 말을 빠뜨리지 않았다. 뒤늦게 후회해 보아도 그때는 이미 재주가 모자라거나 늙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늘 꿈을 크게 갖고 조그만 성공에 안주하지 말라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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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퇴계와 율곡의 성리학 문답
퇴계와 율곡은 모두 당대의 이름난 학자로서 수많은 성리학 저술을 남겼다. 그 가운데서도 퇴계는 고봉 기대승과 여러 해에 걸쳐 편지로 ‘사단칠정 논쟁’을 전개했고, 율곡은 우계 성혼과 ‘인심도심 논쟁’을 벌였다. 이러한 주장에 따라 후세의 사람들은 퇴계를 주리파, 율곡을 주기파로 부르기도 했으며, 조선 후기 수백년 동안 이 두 입장은 치열하게 논쟁했다. 그리하여 마치 두 사람이 각각의 학설을 내세워 서로 대립한 것처럼 여기기도 했지만, 정작 퇴계와 율곡은 이러한 문제로 직접 의견을 주고받고 논쟁을 벌인 적은 없다.
그러나 그 후학들을 중심으로 이른바 영남학파 [주리파]와 기호학파[주기파]로 나뉘어지게 되는데, 이하 백과사전에서 그 내용을 살펴본다.
3. 퇴계 중심의 영남학파
조선시대 학자 이황(李滉 : 1501~70)과 조식(曺植 : 1501~72)의 제자·문도 들이 영남지방을 학문활동의 근거지로 삼아 형성한 학파.
조선 초기에는 학문활동의 중심이 성균관을 비롯한 중앙 학계였기 때문에 지방에 근거를 둔 독자적 학맥과 학풍의 수립은 없었다. 그러나 그 시기에도 영남지방에서는 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으로 이어지는 학문의 계보가 형성되었고, 성종조 무렵에 김종직의 제자들에 의해 영남사림파로 불리는 학자들의 집단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영남학파라고 할 때는 이들을 포함하지 않는다. 조선시대 성리학은 16세기부터 본격적인 이론적 탐구가 행해졌고, 그결과 다양한 사상적 흐름이 갈라졌다. 그리고 그 사상적 다양성은 당시에 학문이나 도덕적 실천에서 사우(師友)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흐름과 결합하면서 16세기 말엽에는 이황·조식·이이(李珥)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각각 학파의 형성을 보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 이황과 조식의 제자·문도 들로 구성된 학파를 가리켜 영남학파라고 한다. 이황과 조식 사이에는 성리학의 이론적 논쟁은 없었으나, 그들의 학풍에는 차이가 있었다. 이황의 학풍이 이론적 탐구를 통해 성리학을 체계화하고, 그 바탕 위에서 인간의 내면적 심성 수양의 중요성을 강조한 데 반해, 조식의 학풍은 이론적 탐구보다는 성리학적 가치관의 일상적 실천을 강조했으며, 그 실천도 내면적 심성 수양을 넘어서 사회적 실천에까지 미치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활동하는 지역도 영남지방 내에서 각각 달랐기 때문에 별개의 학파가 형성되었다. 이황은 안동권(安東圈)에 속하는 예안(醴安)에서 활동하고, 조식은 진주권(晉州圈)에 속하는 산청(山淸)에서 활동함으로써, 그 학맥의 분포는 대체로 낙동강을 기준으로 하여 강좌와 강우로 갈라졌다. 그런데 조식의 학통은 비록 오건(吳健)·최영경(崔永慶) 등에 의해 그 맥이 이어졌으나, 정인홍(鄭仁弘) 등이 주축을 이루었던 북인정권이 인조반정으로 몰락하면서 학통이 붕괴되었다. 따라서 영남학파라고 할 경우에는 퇴계학파를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황의 문하에서는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정구(鄭逑) 등 그 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들이 출현하고, 그뒤를 이어 정경세(鄭經世)·이현일(李玄逸)·장현광(張顯光) 등이 잇달아 등장함으로써 퇴계 학맥의 영남학파가 성립했다. 영남학파가 이이의 제자와 문도들로 이루어진 기호학파와 이론적 대립의식을 명확히 하게 된 것은 이이 계열의 성리학자들이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비판하자, 이이의 기발일도설(氣發一途說)을 비판하면서부터이다(→ 이기이원론, 주리론). 17세기 전반에는 김해(金垓)·유원지(柳元之)·이구(李) 등이 이이의 성리설을 혼륜일변설(混淪一邊說)로 비판했으며, 17세기 후반에 오면 이현일이 이이의 성리설을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이황의 성리설을 옹호하는 이론 체계를 수립하기 시작했다. 영남학파는 그 내부에서도 다양한 학맥이 형성되어 주로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활동지역에 따라 영남 북부권·중부권·남부권으로 구별했다. 북부지역에서는 또다시 안동권과 상주권(尙州圈)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우선 안동권에서는 김성일-장흥효(張興孝)-이휘일(李徽逸)-이현일-이재(李栽)-이상정(李象靖)-남한조(南漢朝)-유치명(柳致明)-김흥락(金興洛)·유필영(柳必永)·김도화(金道和)로 이어지는 계보를 찾아볼 수 있다. 이 안동권의 학맥이 확실하게 정립된 것은 이현일에 이르러서이며, 그 손제자인 이상정에 이르러 안동권의 학맥은 영남학파의 중심으로서 가장 큰 비중과 권위를 누리게 되어 이후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편 상주권에서는 유성룡-정경세-유진(柳袗)·유원지로 계승되는 학맥이 형성되었다. 이 학맥은 안동권과 상당한 부분이 서로 얽혀 있으면서도 학맥의 독자성에서는 경쟁적인 위치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했다. 안동권과 상주권은 모두 이이의 성리설에 대해 강한 비판의식을 갖고 이황 학설의 정통성을 지키며, 그의 학설을 계승·발전시켰다. 영남 중부지역에서는 인동(仁同)의 장현광 계열과 성주(星州)의 정구 계열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퇴계 학통의 순수한 계승에 집착하지 않고 나름대로 독자적인 학설·학풍을 수립한 특징이 있다. 먼저 장현광은 성리설에서 퇴계 학맥에 구애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이의 학설과도 달리 이기를 일도(一道)의 경위(經緯)로 파악하는 독자적인 이기경위설을 제시했다. 정구는 이황과 조식의 두 문하에서 수학했고, 정경세와 더불어 영남학파의 대표적인 예학자이며, 그 자신은 이황의 성리설을 계승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그의 학맥은 영남 안에서 발전되기보다는 기호지역의 남인학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즉 정구-허목-이익(李翼)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그것이다. 그후 이익-안정복(安鼎福)-황덕길(黃德吉)로 이어지는 성호학파를 계승한 허전(許傳)이 다시 영남으로 돌아와 김해지역에서 활동했다. 19세기 성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성리학자로는 이진상(李震相)-이승희(李承熙)·곽종석(郭鍾錫)이 있었다. 이진상은 그의 숙부인 이원조(李源祚)의 영향을 받았으며, 안동권 유치명의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퇴계 학통에서 전통적으로 인정해온 심합이기설(心合理氣說)에 이의를 제기하고 자신의 심즉리설(心卽理說)을 주장했다. 이진상의 독자적인 성리설은 안동권과 상주권의 성리학자들로부터 비판과 배척을 받았으나, 그의 아들인 이승희와 제자인 곽종석에 의해 계승되었다. 또 19세기 후반경에 오면 영남지역에서 활동하는 성리학자들 가운데서도 호남의 기정진(奇正鎭)의 학맥을 잇는 노사학파(蘆沙學派)와 호남의 전우(田愚)를 추종하는 간재학파(艮齋學派)에 속하는 인물들이 나오기도 했다.→ 기호학파, 이기이원론, 주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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