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와 율곡-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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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와 율곡-2
1. 퇴계와 율곡의 시대인식과 소명의식
명종이 세상을 떠나고 선조가 새 임금으로 즉위한 1567년에 두 사람 관련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때는 임금이 바뀌는 정치적 변화의 시기였다. 이런 때는 상황의 변화에 따라 정치적인 결단을 요구받게 되어, 당시의 사대부들도 정치적으로 분주하게 움직이던 때였다.
이런 때 순간의 처신으로 평소에는 모호하게 숨겨져 있던 개인의 정치적 성향이 드러나게 되는데, 퇴계와 율곡도 가치관과 소명의식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일이 있었다.
두 사람은 명종 22년(1567) 6월 퇴계가 임금의 부름에 답해 한양에 올라오자 오랜만에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지 9년째가 된다. 율곡은 벼슬 길에 나선지 4년으로, 호조와 예조의 좌랑을 지내고나서 사간원 정원을 거쳐 이조좌랑으로 일하던 때였다.
그 전까지 퇴계는 임금의 부름을 여러 차례 거절하고 오랫동안 고향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명나라에서 사신이 온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고, 조정에서는 사신을 접대하는 제술관으로 퇴계가 적임자라고 추천했다.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학문과 문장이 뛰어난 인물을 발탁하여 그들을 상대하는 임무를 맡겼기 때문이다. 퇴계는 이미 여러 차례 임금의 부름을 사양해서 좀 난처한 입장이었고(임금에 대해), 제술관 일은 사신이 머무르는 동안의 임시 자리이므로, 왕명에 따라 오랜만에 상경하였다. 중국 사신을 만나 얻게 되는 새로운 지식에 대한 호기심도 퇴계의 발걸음을 재촉했을 것이다.
그런데, 퇴계가 상경하자 상황은 예상치 않는 방향으로 흘렀다. 명종이 갑자기 승화한 것이다. 퇴계는 국장을 맞아 명종의 행장을 지어 올렸고, 곧이어 예조판서의 자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퇴계는 여러차례 사양하고서 마침내 해직이 되자 다음 날 새로 관직이 내리기 전에 임금에게 하직인사도 하지 않고 낙향해 버렸다. 당시 명종의 장례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퇴계의 처신을 놓고 크게 물의가 일었다.
율곡은 퇴계가 한양에 있을 때 조정에 남도록 설득했고, 또 따로 편지를 보내 낙향하려는 것을 만류하였다.
율곡 : “어린 임금이 처음 서시고 나랏일에 어려움이 많으니 분수와 의리를 보더라도 선생께서 물러나지 말아야 합니다.”
퇴계 : “ 도리로는 물러날 수 없지만, 내 몸을 볼것 같으면 물러나지 않을 수 없소. 몸에 병도 많고 능력도 또한 직무를 수행 할 수 없기 때문이오.”
율곡은 퇴계에게 다시 한번 ‘문을 닫고 병을 다스리면서 대궐 일에 신경 쓰지 않더라도 한양에만 계시면 선비들의 기개가 저절로 갑절이나 될 것이요, 나라가 잘 다스려질 것이라 기대할 수 있다’고 했다.
선조 즉위 초에 성리학 이념을 충실히 구현하려는 이들이 퇴계를 떠 받들며 상당한 세력을 갖추었으나 아직도 정치의 주도권은 구세력에게 있었다. 그들은 퇴계나 율곡과 같은 사림세력과 정치이념이나 가치가 많이 달랐다. 이 당시 선왕의 장례 날짜 문제로 (유교식을 따르지 않고 길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변경함) 견해를 달리한 퇴계는 아직도 자신의 뜻을 펼수 있는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듯하다.
2. 기호학파 [주기파]
학술적으로는 이이(李珥)의 학설을 따르는 주기적(主氣的) 경향의 성리학자들을 말한다. 주기파(主氣派)라고도 한다. 주리설(主理說)의 종주인 이황(李滉)은 예안(禮安)의 도산서원(陶山書院)을 근거지로 후진을 양성했던 관계로 그를 따르는 학자들은 주로 영남지방에 분포했다. 따라서 이들을 '영남학파'라 부르고, 주기론자들은 대부분 기호지방(경기·황해·충청·호남 일원)에 거주했으므로 '기호학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정치적으로 영남학파는 영남 남인, 기호학파는 서인, 17세기 이후에는 노론이 주가 되었다. 기호학파로서 이이와 동시대 인물로는 조헌(趙憲)·정엽(鄭曄)·한교(韓嶠)·송익필(宋翼弼)이 있으며, 이후로는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金長生)과 송시열(宋時烈)의 학맥이 주류를 이룬다.
고려말에 수용된 성리학은 16세기가 되면서 더욱 발전하여 그의 기본개념인 이기(理氣)에 대한 원론적인 탐구와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 발단은 1559년(명종 14)부터 8년간 이황과 기대승(奇大升) 간에 벌어진 사칠논변(四七論辯)이었다. 이 논쟁은 1572년(선조 5) 이이와 성혼(成渾)과의 논쟁에서 재연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주기파와 주리파 양자의 차이가 분명해지고, 각자의 논리를 보완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교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후 이들의 사우(師友)들은 각자 하나의 학파를 이루면서 계속 보완과 논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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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은 주자의 이기개념을 사용하여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문제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야기된 것이다(→ 인심도심설). 이 과정에서 드러난 양 파의 기본적인 개념차이와 주기파의 특징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황은 도심과 인심을 각각 순선(純善)인 사단(四端:四德인 仁·義·禮·智의 단서라는 뜻으로 惻隱之心·羞惡之心·辭讓之心·是非之心을 말함)과 선악이 섞인 칠정(七情:喜·怒·哀·樂·愛·惡·欲)으로 비정한다. 즉 도심은 곧 사단이다. 사단은 이(理)가 발동하여 나타난 정(情)으로 순선(純善)의 존재이다. 반면에 칠정(七情)은 곧 인심(人心)으로 기(氣)가 발동하여 나타난 정이며, 선악이 개재된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를 '사단은 이의 발이고, 칠정은 기의 발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라는 표현으로 명제화했으며, 〈주자어류 朱子語類〉에 이 말이 있는 것을 근거로 내세웠다. 이상과 같은 주리설과 대비하여 볼 때 주기파의 기본적 명제는 ① '발할 수 있는 것은 기(氣)뿐이며, 이(理)는 발하게 하는 원인이다'(發之者氣所以發者理), ② '심(心)은 기이다'(心是氣)라는 데 집약되어 있다. 주자는 '사단은 이의 발이고, 칠정은 기의 발이다'라는 말을 했지만, 다른 곳에서는 '발하는 것은 기이며 이는 발하게 하는 원인이다'라는 말도 남겼다. 이이는 후자의 논리가 보다 근본적인 것이라고 보고, 이 개념에 맞추어 인심·도심의 문제를 해석한다.
16세기에 형성된 기호학파는 17세기에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시기 집권층의 과제는 양란의 피해를 복구하고, 신분제의 문란과 지주제의 전개에 따른 중세사회의 동요를 해결하여 국가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이런 추세에 맞추어 사상계에서는 주자의 사상과 경세론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양명학(陽明學)이 보다 널리 유입되고, 당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각종의 경세론이 제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주자학자들은 주자의 경세론을 사회대책으로 제기하며, 주자의 절대화(聖人化), 이단에 대한 철저한 배격, 강상윤리의 강화 등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때 기호학파 중에서도 소론계열인 윤선거(尹宣擧)·윤증(尹拯)·조성기(趙聖期)·임영(林泳)·박세채(朴世采) 등은 주자와 율곡의 학설에 대해 일정하게 비판적인 입장을 내세우게 된다. 이에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계열 인사들은 주자의 도통설(道通說)을 들고 나와, 정치적·학문적 주체로서 기호학파의 결속과 위상을 강화하기 위한 다각적인 작업을 벌이게 되었다. 이것은 양명학 등 이단에 대한 배척만이 아니라, 영남학파에 대한 기호학파의 우위성과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작업도 포함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당시 집권 서인층의 위상이 동요하여 서인·남인의 집권이 반복되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했던 정치적 상황이 개제되어 있다. 이들은 주자의 적통은 율곡에서 송시열로 이어진다는 점을 강조했다. 실제로 송시열의 이기개념은 율곡과 다른 점이 있었지만, 이들은 상기한 율곡의 기본개념이 주자의 정설에 근거한 것이며 그들의 학통이 주자의 적통임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결과 나타난 것이 율곡의 문묘종사 운동과 일련의 주자 주석서의 편찬작업이었다. 율곡의 문묘종사운동은 1650년(효종 1)에 발의된 후 영남남인들과 격렬한 대립 끝에 1682년(숙종 8)에 실현되었다. 편찬작업은 다분히 영남학파의 앞선 업적을 의식한 것으로, 주리설에 대한 비판을 포함했다. 이 작업을 통해 이들은 기호학파의 인맥과 주류를 확정하고, 자신들의 사상체계를 완성하려 했다. 이는 송시열 계열의 제자들에 의해 18세기까지 지속되었다. 대표적인 저작들로는 〈주자대전차의 朱子大全箚疑〉·<주자언론동이고> 朱子言論同異攷〉·〈차의문목 箚疑問目〉·〈차의문목표보 箚疑問目標補〉·〈주서분류 朱書分類〉 등이 있다. 이중 〈주자언론동이고〉는 상기한 것처럼 서로 모순된 주자의 말을 해명하기 위한 작업으로 50년간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여기서 이들은 '사단은 이의 발이고, 칠정은 기의 발이다'라는 말은 주자의 말이 아니라, 〈주자어류〉의 기록자 유한경(柳漢卿)의 오기라고 단정하여 기발만이 주자의 정설임을 강조했다.
1709년 한원진과 이간 사이에서 시작한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湖洛論爭)을 계기로 기호학파는 호론(湖論)과 낙론(洛論)으로 크게 분열되었다. 호론은 호서지방의 학자들로 주로 권상하와 한원진·윤봉구의 제자들이 가담했고, 낙론은 서울 거주 학자들로 김창흡의 문인인 어유봉·이재·김원행·오희상(吳熙常)·홍직필(洪直弼)이 동조했다. 논쟁 자체는 주자학의 이론범주 내에서 진행되었고, 양자 모두 율곡의 대전제를 수용하는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양측이 격렬하게 대립했던 것은 당시의 시대변화에 따라 인간세계의 원리만이 아니라 물질세계의 원리도 해명해야 하는 과제가 제기되었고 이 과정에서 주자학적 일원성과 통일성에 대한 회의가 정통 주자학의 세계에도 스며들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체로 호론 계열은 정통주의를 주장하는 입장을 고수하며, 낙론에서는 도통에 대한 회의가 출현하는데 뒤에 이 계열에서 북학파가 등장하게 된다.→ 사단칠정, 영남학파, 주기론, 주리론, 주자도통주의, 호락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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