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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문불출, 그리고 황희 정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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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문불출, 그리고 황희 정승

1. 때는 여말선초. 이성계가 새나라를 세웠지만 고려의 신하들은 새왕조에 불복하였다.

이렇게 선비들이 신조를 따르지 않자 임금은 임금대로 불편했고, 또 신조의 신하들은 임금에게 충성을 하기 위해서도 별도의 방도를 강구해야만 했다.

그래서 안출된 것이 이른바 과거령이었다.

“새왕조에서 과거를 보인다.”

소문은 송도(개경)안에 쫙 퍼졌으나 누구 한 사람 이에 응시하려고 하는 이가 없었다.

과거 날이 당도 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경덕궁 높은 자리에 앉아 이를 살펴보고 있었다.

“옛 조정의 신하들이 얼마나 오려는고?...”

하루 종일 기다렸지만 시골 선비 몇이 나타났을 뿐 前朝의 舊臣들은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왕은 불쾌했다.

그런데 오시가 지나면서부터 경덕궁 맞은편 언덕 위를 하나 둘 씩 지나가는 무리가 있었다. 포의에 보따리를 지고 수없이 언덕을 지나가는 무리들...

“저들이 대체 무었인고?..” 왕이 하문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전국의 태학생들인가 하오.”

“태학생 들이라...무엇하러 어디를 간다 하더냐?”

“아뢰옵기 거듭 황송하오나 과거를 보지 않기 위하여 뿔뿔이 망명의 길을 떠난다고 아뢰오.”

“....”

태조는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내가 실로 (어리고 허수아비 같은) 공양왕 보다도, 우왕이나 (핏줄이 의심스러운)창왕 만큼도 덕이 없다더냐?” 하고 곰곰이 회고해 보았다.

망명의 무리들은 그날 하루 종일 그치지 않았다.

그 숫자가 72명이나 되었고, 그들은 약속이나 한듯이 송악산 깊숙한 만수산 밑에 초막을 짓고 한 마을을 형성하였다.

바로 그 이튿날은 또한 무과를 보는 날이었다.

이 날에도 촌 사람 활양 몇사람만 과거에 응시했을 뿐, 전조 호반들은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궁에서 바라보이는 언덕을 향하여 기어오르는 무리가 있었다.

그 숫자는 48명이나 되었으며, 이들도 만수산 옆 보봉산 아래에 초막을 짓고 집단생활을 하기 시작 했다.

태조는 실로 괴로울 뿐만아니라 매우 분했다.

일찍이 이 나라의 백성들이 시중 이성계를 얼마나 열열이 환영 했던가! 싸움마다 승리하고 돌아올 때면 이 백성들은 “李 시중 千歲!” 를 고창하지 않았던가!

대단히 괘씸했다. 그러나 (미워도) 다시 한번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여 나의 신하로 만들어 보자’하고 왕사를 보냈으나, 그들은 완강히 “우리들은 장사나 해 먹고 살겠노라”하는 것이 아닌가. 이에 왕과 신하들은,

“고이연지고...어디 그럼 잘 견디어 보아라” 하고 왕명에 의하여 동서 두문동을 철통같이 에워싸고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너희들 가운데 백이 숙제가 몇 명이나 되나 보자. 그리고 불이 뜨거워? 왕명보다 불이 무섭지 않으냐?” 라고 조롱하였다.

그러나... 동두문동 48명의 무사와 서두문동 72명의 태학생들은 누구 한 사람 “앗 뜨거! 뜨거워!” 하고 마을을 탈출한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저 고요히 불길 속에 안좌하여 살신성인한 것이었다.

“하여튼 지독한 놈들이로고!” 군신 상하는 이렇게 불렀다.

이로부터 두문동 불출 즉 [두문불출]이라는 말이 유래된 것이다.

2. 한편 그때 그 상황에서 유일한 예외가 있었으니, 한 사람 조선조 최고의 명재상이며, 청백리로 알려진 황희 (조선 문신[黃喜] 1363(공민왕 12) 개성~1452(문종 2) 정승이 있다.

그는 조선 초기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노력한 유능한 정치가일 뿐만 아니라 청백리의 전형으로서,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재상으로 꼽히고 있다. 본관은 장수(長水). 초명은 수로(壽老).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尨村). 아버지는 판강릉대도호부사(判江陵大都護府使) 군서(君瑞)이다. 1376년(우왕 2) 음직(蔭職)으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고, 1383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1389년(창왕 1) 문과에 합격했고, 이듬해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이 되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70여 명의 유신들과 함께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했다. 그러나 태조의 요청과 백성만이라도 구제해야 한다는 두문동 동료들의 천거로 다시 벼슬에 나가 성균관학관과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임했다. 이후 직예문춘추관·사헌감찰·우습유(右拾遺)를 지냈다. 그뒤 좌천·면직·소환을 반복했고, 1399년(정종 1)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 1400년 형조·예조·병조·이조의 정랑을 차례로 역임했다. 1401년(태종 1) 지신사(知申事) 박석명(朴錫命)의 추천으로 도평의사사경력(都評議使司經歷)이 되었고, 이후 승추부도사(承樞莩事)·대호군·지신사·대사헌·병조판서·예조판서를 거쳐 1415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1416년 세자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폐위에 반대했으며, 이듬해 평안도도순문사 겸 평양부사가 되었다. 1418년 세자의 폐위가 결정된 후 태종의 미움을 사서 서인(庶人)으로 교하(交河)에 유배되었고, 곧 남원으로 이배되었다. 1422년(세종 4) 과전(科田)과 고신(告身)을 환급받고, 의정부좌참찬을 거쳐 다시 예조판서에 올랐다. 1423년 강원도 지방에 흉년이 들자 관찰사로 파견되어 선정을 폈다. 1427년 좌의정이 되었으나, 1430년 태석균(太石鈞)의 치죄(治罪)에 관여하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물러나 파주 반구정(伴鷗亭)에 은거했다. 1431년 복직되어 1449년 관직을 물러날 때까지 18년 동안 영의정으로 세종을 도와 국정을 이끌었다.

성품이 강직·청렴했으며, 사리에 밝고 정사에 능해 역대 왕들의 신임을 받았지만 때로는 소신을 굽히지 않아 왕과 다른 대신들의 미움을 사서 좌천과 파직을 거듭했다. 그는 오랜 관직생활 동안 조선 초기의 국가 기틀을 바로 잡는 데 힘을 기울였다. 현실적으로 불합리하거나 중복·누락된 부분이 있던 〈경제육전 經濟六典〉을 온전한 법률집으로 만드는 등 법전의 정비에 힘썼으며, 농업생산력 발전을 위해 농사의 개량과 종자 보급을 실행하고, 양잠을 장려하여 의생활을 일신시켰다. 건국 초기의 어지러운 정세를 틈타 북쪽의 여진족과 남쪽의 왜구가 자주 침범하자 이에 대한 방비책 마련에도 힘을 쏟았다. 또한 원나라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던 고려의 예법을 시의에 맞게 고치기도 했다. 세종대에는 그간의 국정경험과 세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4군 6진의 개척,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등을 지휘·감독했으며, 왕과 중신들 간의 마찰을 중화시키는 등 세종을 도와 성세를 이룩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452년(문종 2) 세종묘에 배향되었고, 1455년(세조 1) 순충보조공신남원부원군(純忠補祚功臣南原府院君)에 추증되었다. 상주 옥동서원(玉洞書院)과 장수 창계서원(滄溪書院)에 제향되었고, 파주의 반구정에 영정이 봉안되었다. 저서로 〈방촌집〉이 있다.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3. 함께 고민 함직한 所懷의 일단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한 것이라지만, 72명의 황희(같은 실력의 인재)와 48명의 명장들이 뜻을 모았다면, 조선 역사는 어찌되었을까?

-하늘의 새로운 섭리 역사 초기에 이대-연대사건이 없어, 36가정으로 출발하지 아니하고 360가정부터 시작되었다면, 성약섭리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섭섭하고 괘씸하다고 불을 지르지 아니하고, 참사랑으로 호소하고 설득하고 있으니, 현대판 두문동 인재들(타고난 실력으로 수많은 무리들을 교당으로 끌어모은 종교지도자 등등)이 탈출할 수 있는 때는 오지 아니할 것인가?

-‘변함없는 일편단심의 충절’도 때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가치관임을 느끼게 된다는 교훈...

(기회가 되면, 태항산을 오가는 길목 길목에서 갑론을박할 화두가 아닐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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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신동윤님의 댓글

지난날의 선비정신을 오늘에 되살리시려는 열정에 감동 됩니다.
무슨나무 숲인지는 모르나 일단 숲은 보입니다.
충정인지, 맹종인지를 구분지어 따져 봐야 할것인지도 어렵고 힘듭니다.
그냥 두리뭉실히게 넘어가는 것이 상책인지
충정도 좋지만 사그라지기엔 너무나 아까운 무엇이 있습니까?
탈출을 종용하시는 정총장님
어디로 부터의 탈출인지를....

박순철님의 댓글

개인적으로 마음에 와닿는 내용이 많습니다.
여말선초(麗末鮮初)에 황희정승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저의 19대 할아버지로 박익(朴翊)(다른 성함: 박천익(朴天翊)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고려가 망하면서 벼슬을 버리고 밀양으로 내려와서 포은, 야은, 목은과 친구하면서
고려에 대한 절개를 지켰다고 합니다. 이태조가 다섯번이나 부르고 좌의정을 주겠다고 해도
끝내 거절했지만, 후손들에게는 "나의 시대는 갔지만 너희들의 시대는 이제 시작되었다."고
하시면서 나라를 위하여 일할 것을 승낙하셨다고 합니다.

그래도 후손들이 바로 나가지 않고 조선 3대 태종대에 비로소 과거에 응시, 이후 벼슬에서
내려온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올곧게 살아라는 선조의 정신을 저도 흠모합니다.
조상님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후손이 되어야 하는데 아직 많이 모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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