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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담감과 적대감의 혼돈, 그리고 소화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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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目的(큰 방향 감각)과 方法(세부 기술적 문제)의 다름과 적대감부담감의 消化 능력 -


자고로 제목이 어렵고 거창한 것 치고 내용이 제대로 된 일을 본 적이 없다. 무엇인가 할 말은 해야겠는데 의도 했던 내용을 제목으로 압축하고보니 영판 내가 그 꼴이다. 그렇다고 지레 겁부터 먹고 서울에 닿기 전에 과천에서부터 기어 갈 수도 없는 일이어서 용기를 내어본다.

흔히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추구하는 정치적, 사상적, 이념적 색채와 목표가 같으면서도 그것을 현실적으로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견해와 방법을 달리 할 때 마찰이 생길 수 있다. 이 때에 서로 부담감을 갖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데 속 좁은 사람들이 가끔 이러한 부담감적대감으로 비화하거나 표출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나는 8남매 맏이로서 지금은 양친이 모두 안 계시지만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나시고 홀어머님만 모시고 살 때, 가끔 어머님은 나 몰래 다른 동생들에게 나에 대한 섭섭함과 불만을 토로하셨고, 서울, 인천, 부천 , 통영, 미국L.A 등 각 처에 떨어져 살고 있는 동생들로부터 나중에서야 볼메인 소리를 듣게 되면 "아차 내가 잘 못했구나" 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와 정 반대로 오해와 편견이 불러 일으킨 일시적 왕따는 정말 화나고 사람 미치게 만든다.

이럴 경우 변명 아닌 변명하느라고 소모하는 불필요한 시간적 물적 낭비와 심정적 고통은 종족복귀를 위해 홀로 뜻을 알고 앞서가며 애쓰는 모든 의욕을 거두어 들이고 싶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제와서 생각해 보면 나를 제외한 7명의 동생들은 그 과정의 잘 잘못이야 여하튼 생각의 폭과 우열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홀 어머님을 위한 자식으로서의 효성에 뿌리를 둔 감정과 의식의 표출일 뿐이고 이 점은 내가 지향하는 어머님에 대한 애착과 효에 대한 감정과도 하등 다를 바가 없다.

나나 동생들이나 다 자기들 잘난 맛에 살고 있고 사회적 경제적 위치도 주눅들지 않을 만큼은 자리잡고 있어서인지 몰라도 고집도 세고 여간해서 의견 일치 - 사실 이 부분은 나에게 맞추어야 된다는 강박 관념도 다분이 있다. - 를 도출하기 쉽지 않다. 뿐만아니라 서로가 못 마땅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섭섭하고 부담감이 많다는 말이다. 이 감정은 우리 8남매 모두가 느끼는 공통된 감정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서로가 부담감을 갖고 있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결코 미워하거나 적대감을 갖지 않는다.

우리 8남매는 애경사는 물론 사소한 일에도 서로 지극한 관심과 협조를 아끼지 않는다. 한 부모로부터 한 핏줄을 받은 동기간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장황하게 자랑도 아니고 불만도 아닌 자신의 집안 이야기를 꺼집어 내는 소위는, 바로 우리 모두의 관심사요 우리들의 영원한 자랑인 참부모님을 중심한 우리 축복 가정 형제자매님들의 폭 넓고 아량 있는
일상 생활 가운데서의 유연성 있는 의식의 전환을 함께 모색 하고자 함이다.

자기가 허물없고 완벽하기에 남을 가르치고 부축하는 것이 아니다. 학교고 교회고 사찰이고 간에 그런 교사나 목회자나 승려는 이 세상에 없다. 누구나 어느 부분에서 앞선자가 제자나 동료나 선후배에게 가르치고
지도하며 부축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과정에서 옳은 것의 지적은 그 방법과 기교의 서툴고 미숙함에도 불구 하고 기쁨으로 수용할 수 있는 자세가 요구되는 것이다. 기분 좋을 때만 " 형님". "아우", "선생님" 이라고 호칭하면서도 부담감이 변질되어 적대감으로 전환되어 인간 관계가 악화 되는 경우를 수도 없이 목격해 왔다.

우리들의 고질 중의 하나는 어느 틈엔가 감동과 감격을 상실한 것이다. 재림주가, 참부모가 오셨다는, 아니 남들보다 앞서 모시고 산다는 역사적(?)인 감격과 흥분을 잃어버린 중증 환자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고질 중의 또 다른 하나는 같은 핓줄을 받고 같은 길을 가면서도 방법의 상이함으로 인한 부담감적대감으로 쉽게 전환하는 小兒的 消化力의 문제인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너 나 할 것 없이 그 어느 때보다도 겸허하게 和而不同의 의미를 터득해 나가야 할 때인 것이다.

특별히 이번 기회에 나로 인하여 부담감을 가지신 적지않은 형제 자매님께 감히 적이 아닌 동지로서의 아량과 용서를 부탁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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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7

조항삼님의 댓글

- 참사랑으로 -

사랑을 업그레이드 시켜라.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아무나 사랑을 한다.

말이 사랑이지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처음에 뜨거웠던 사랑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차츰 퇴색된다.
이제 자신의 사랑을 뜨거운 용광로처럼 업그레이드 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의 사랑을 불살라 버리자.
그리고
새로운 사랑으로 신장개업하라.
참 사랑으로 !

박순철님의 댓글

지난 일요일(7월18일)에는 청평에서 실시하는 조상해원식, 축복식에 참석하느라고
주일예배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담임목사의 설교가 취소되고,
재단의 안호열실장이 일본식구들의 납치문제에대한 보고를 했다고 들었다.

직접, 간접으로도 자세한 설교내용은 듣지 못했지만, 신앙적 셜교가 아니고
최근 교회의 돌아가는 시사성 있는 이야기까지 나온 모양이다.

안호열실장이 보고하러온 목적과 , 알지 못하고 참석한 식구들의 목적은
처음 부터 일치되게 시작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과정이 적절히 운영되어 합일되는 목적달성으로 예배가 성립되어졌기를 기대한다.

주간조선 기사 이야기, WT이야기, 브라질이야기, 권총든 명문가 며느리 이야기, 등등
담임목사 대신 단상에서 재단의 실장이 와서 식구들에게 전달해야할
그 어떤 것의 목적은 제대로 전달되어졌을까 ??

주일예배에 참석하기 위하여 정성스런 마음가짐으로 언덕을 올라온
식구님들의 예배참석의 목적은 이루어졌을까 ??
국회의원 선거가 눈앞에 있는 은평지역이지만 도무지 관심이 없는 일부 식구들이
과연 멀리 브라질에서 대륙회장이 단상에 들어 누웠다는 사건에 대하여
무슨 관심이 있을까 ??

괜히 관심없는 식구들에게 부담감이나 적대감을 주지는 않았을까 ??
과연 70세 넘은 식구님들이 제대로된 소화력을 가지고 보고를 들었을까 ??
부담감, 적대감, 소화력이라는 단어를 보니 문득 지난 일요일
은평교회에서 일어난 일에 대하여 소회를 말하고 싶었고,
새삼스럽게 식구들의 소중함을 가슴에 새긴다.

식구들이 소중하지 않았다면 일선 교회에까지 와서 보고를 할 리가 없지 않겠는가 .
그러나,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그 목적이 소중하더라도 과정과 방법의 현명함이 없으면
부담감, 적대감, 혼돈이 온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이다.

그래서 식구들 앞에서 이야기할 때는 항상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유노숙님의 댓글

몬 소리 하시는지 저는 좀 감이 안잡히는데요
뭐 누가 서운하게 해드렸나요? 제가 아니기를 고대하구요.
우리끼리 서로 오해 하고 그러지 않아도 될일을 적대감정으로 끌고 가는
소인배들 이 몇사람 있긴 하지만 뭐~~이홈엔 그런분 없습니다. 우린 그저 참부모님 모시고
참부모님 하시는 말씀대로 절대 순종 하면 그 사람이 아벨이려니 따라갑니다만
너무 앞질렀나요? 하여간에 자주 글 올려주십시요.......

김동운님의 댓글

화이부동(和而不同)은 소인이 하고 싶은 본 뜻의 호리(毫釐 - 털과 같이 몹시 작음)에 불과
합니다.
가뜩이나 본문도 어렵다고 아우성인데, 남의 글을 빌린 더 어려운 선문답식 격려(?) 보다는
우리 같은 서민들이나 몇 안되는 선량한 독자 제위분들을 위해서라도, 질책이나 가벼운
회초리라도 좋으니 좀 더 쉬운 말씀으로 자신의 속내를 보여달라고 보채어도 괜찮으신지요?

이존형님의 댓글

워메 이거이 본문도 어렵고, 댓글도 어렵고

산토끼의 반댓말을 죽은토끼라고 대답을 한 정도의 수준은
감히 이해력 부족으로 눈팅만 하다가 그냥 나가면서
한마디 주절거리면서 갑니다.

눈이 밝은 사람은 오히려 장님과 같고
귀가 밝은 사람은 오히려 귀머거리와 같으며
진실로 지혜로운 사람은 오히려 어리석은 사람과 같으며
그리고 진실로 강인한 사람은 오히려 약한 사람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보고, 듣고, 느끼는 것으로부터
항상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할 것 같은 세상입니다.

정해관님의 댓글

1. 子曰 君子는 和而不同하고 小人은 同而不和니라.
(자왈 군자는 화이부동하고 소인은 동이불화니라)
군자는 和하되 同하지 아니하고 소인은 同하되 和하지 못한다...

군자는 뚜렷한 개성을 가지고 있으나 서로 화합(和合)을 잘 하는데 반(反)해,
소인은 잘 어울리기는 하나 서로 화합을 이루지 못한다‘ 는 뜻이다.

2. 공자는 군자의 조건, 즉 리더의 조건으로 여러 가지를 강조한다. 그중 우선순위에 오르는 것이 편 가르기 하지 말고 개방적이 되라는 것이다. 깃발 아래 ‘헤쳐 모여’를 거듭하며 ‘우리가 남이가’를 연발하고 여러 가지 인연을 빙자해 형님 동생을 끌어주는 세태는 그때나 요즘이나 다르지 않았나 보다.

공자는 유독 조화와 뇌동의 차이에 대해 경계의 ‘죽비’를 여러 번 내리친다. 자로 편에서 군자 화이부동 소인 동이불화(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군자는 조화를 이루되 뇌동하지 않고, 소인은 뇌동하면서도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고 말했던 그는 위령공 편에서 군자주이불비, 소인비이부주(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라고 말한다.

우르르 무리 지어 몰려다니며 ‘단지 우리 편’이란 이유만으로 자신의 가치관과 철학을 팽개치지도 말고, 편견에 휩싸이지도 말고 주관을 세우라는 것이다. 팔로워의 입장에선 소신 있는 반대가 필요하고, 리더의 입장에선 다양한 조직원의 의견을 수렴할 필요가 있다.

오징어를 목적지까지 신선하게 이송하기 위해서는 ‘꽃게’라는 끊임없는 위기 조장 요인이 필요하듯 조직의 의사 결정에 이 같은 반대분자와의 갈등 토론은 필수 요소다. 그러기에 당 태종은 늘 거침없는 직언에 늘 숨을 몰아쉬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면서도 위징을 재상으로 ‘모시고’ 직언을 해주길 ‘간청’했던 것이다.

심지어는 항우조차도 바른 소리 잘 하고 아버지뻘의 범증을 속으로는 부담스럽기 그지없어 하면서도 ‘아부’로 대우하며 곁에 두었던 것이다. 차량 배기가스 계측기 세계 1위업체인 호리바 제작소의 창업자인 호리바 마사오는 아예 최고경영자와 같은 의견을 내는 부하직원은 복제인간으로서 월급 도둑이라고까지 극언할 정도다.

모두 같은 생각을 할 바에 10명, 100명 같이 모여 아이디어를 낼 필요가 뭐가 있느냐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 같은 다양성을 통한 발전 논리를 몸으로 가장 잘 실천한 리더가 바로 세종대왕이다. 박현모 세종연구소 실장의 지적에 따르면 “세종대왕은 자신의 외교정책 기조에 늘 반대를 일삼는 재상 허조를 ‘고집불통이야’라고 말하면서도 그를 배제시키지 않고 늘 어전회의에 참석시켰다”고 한다. 혹시라도 신하들끼리 편향성을 가진 결정을 내릴까 우려해서였다.

한글 창제에 아득바득 반대한 최만리를 기꺼이 포용한 것도 바로 자신이 보지 못한 ‘틈’을 보길 기대하는 의도에서였다. 세종은 반대파의 주장에서 자신이 펼치고자 하는 정책의 정당성을 변증법적으로 발전시키는 근거로 삼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조선 역사상, 아니 역대 한국 역사상 자신의 상사에게 하고 싶은 말 다 하고서도 왕에게 죽어서까지 대우받은 행복한 신하란 부러움을 받을 수 있었다.
---김성회 리더십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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