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左史右三>4. <史記>의 저술 동기와 목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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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史右三>4. <史記>의 저술 동기와 목적-2
<李陵의 禍>
사마천은 아버지 사마담의 유업을 계승하여 史記의 저술에 전념하던 중, B.C 98년 일생일대의 비극을 경험하였으며, 이것은 史記의 저술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李陵의 禍로 친구 任安에게 보낸 편지에는 사건의 전말과 사마천의 비통한 심경이 상세하게 나와 있다.
사마천은 이릉을 변호하려다 연루되어 결국 宮刑을 스스로 택하였으며, 그 명분을 史記저술의 완성에서 찾았고, 그는 史記저술의 역사적 필연성과 중대성을 자각하였던 만큼 담담하게 宮刑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목숨을 부지한 사마천은 2년 후 다시 中書令에 기용되어 太史令보다도 더 많은 봉석을 받고 武帝가 더 총애하고 신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사마천은 자신이 宮刑을 받은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식은 땀이 나고 하루에도 창자가 아홉 번이나 뒤틀렸으며, 정신이 몽롱해 우왕좌왕'하는 극도의 수침감에서 오는 정신적,육체적 고통에 시달렸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이 유일한 위안은 자신이 宮刑을 선택한 명분, 즉 史記의 완성에 전념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李陵의 禍를 계기로 사마천이 史記의 저술 목적을 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설정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자기 변호에서 뚜렷이 확인된다.
노비조차도 (욕된 상황에서)능히 자결할 수 있는데 하물며 내가 그것을 못할 리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내가 은인 자중하며 구차히 살려고 糞土 중에 떨어지는 것도 불사한 것은 개인적으로 마음속에 미진한 바가 있는 것을 恨으로 여겼고, 죽은 후 文采가 후세에 드러나자 않은 것을 수치로 여겼기 때문이다.
사마천이 宮刑의 치욕을 감수하고 구차히 살아남은 절실한 명분이었다면, 결국 마음속에 못다한 것을 풀고, 死後에 文采를 남기려는 것이 宮刑 이후 사마천이 새로 추가한 史記저술의 목적이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文采를 남긴다는 것은 명성을 남기는 것인데 사마천에게는 立名보다는 宮刑으로 신체의 일부를 훼손하고 자손을 더 이상 생산 못하는 불효의 극치를 史記 완성으로서 불효를 다소나마 씻으려는 강박관념에서 비롯된 것 같다.
그러나 사마천이 立名,揚名에 깊은 과심을 갖게 된 것은 단지 孝를 실천하려는 욕구 때문만은 아니었고 宮刑을 계기로 인간의 도덕과 현실적인 禍福의 문제를 省察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였다.
자신은 「春秋의 계승」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성실히 담당하여 왔으며,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행동도 한 일이 없고, 이릉을 변호한 것도 당연히 해야할 일이 아니었는가?
이러한 의문은 宮刑 이후 사마천의 뇌리를 잠시도 더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사마천은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모색과 결론을 「백이열전」을 통해 감동적으로 보고하고 있다.
그는 백이,숙제가 최후에 남겼다는 采薇詩를 소개한 후, 이 시에 원망의 뜻이 있느냐, 없느냐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인간의 운명문제를 제기한다.
백이,숙제와 같은 積人潔行한 善人이 왜 그토록 비참한 최후를 마치고 공자가 극찬한 제자 顔回가 굶어 죽고, 극악한 도척이 富와 長壽를 누리는 것에 대해 사마천은 자신의 운명을 새삼 반추하였을 것이다. 인간의 덕행과 禍福이 항상 괴리하는 사실에 크게 당혹하였을 것이다.
도대체 天道는 인간의 禍福을 어떤 기준으로 결정하는가?
혹자는 天道는 특정한 사람과 친하는 일이 없고,항상 善人의 편이라고 하지만 그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사마천은 덕행과 부귀,권세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개념이며, 각기 추구하는 방법도 동일할 수 없다는 것을 확연이 깨달았으며, 사람은 각자 자기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얻으면 족할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즉, 사마천에 있어서 명성은 자신의 삶이 당연히 받아야 할 구체적인 보상이었으며, 자신의 불행을 크게 의식하면 할수록 그는 더 큰 명성을 요구하였을 것이다.
사마천은 자신의 명성뿐 아니라 타인의 명성에 큰 관심을 보였고, 특히 치욕을 감수하고 후세에 명성을 날린 사람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진 것도 모두 李陵의 禍 이후 사마천의 인생관을 반영한 것이다.
이상으로 李陵의 禍를 계기로 史記의 완성 목적과 그 성격이 크게 변화하였음을 검토하였지만 앞에서 지적한 春秋의 계승, 太史직분의 계승의식도 결코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史記의 성격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 세가지 동기가 모두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李陵의 禍가 없었다면 史記는 역사의 기록과 포폄, 是非의 論斷 등을 통하여 天運의 理法을 매개로 한 당위적인 질서의 제시, 문명적 가치의 보호와 전승을 목표로 한 이념의 書는 되었을 지 모르나, 인간의 삶 그 자체의 진실을 긍정하는 인간의 역사는 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李陵의 禍는 실로 사마천이 위대한 史家로 비약한 중대한 계기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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