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左史右三>3. <史記>의 저술 동기와 목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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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의 저술 동기와 목적-1
사마천이 중국 최초의 체계적인 사서를 편찬한 목적은 「天과 인간의 관계를 규명하고 古今의 변화를 관통하는 (원리를 밝혀) 스스로 독자적인 立論의 체계를 이루려는 것 (成一家之言)」이었다고 한다.
사마천이 부자 양대에 걸쳐 태사령이란 사관직에 있었기 때문에 부친의 遺業으로 사서를 써야 하는 단순한 직업적 의식 외에 새로운 사서 편찬의 역사적 필연성에 대한 자각적 사명의식의 계승이라는 외면적 요인도 있었을 것이다.
아울러 이릉의 사건 이후 사마천의 개인적인 비극이 사기 유작 동기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성규 교수는 사기의 저술동기와 목적을 다음 세가지 측면에서 고찰하고 있다.
1. 春秋의 繼承
사마천 부자가 자신의 저술활동에 춘추의 계승이라는 의미를 명확히 부여하였던 것은 사마담 임종시의 다음과 같은 대화를 보면 분명하다. 즉,
「...춘추의 마지막 사건, BC 481 이래 4백여 년이 흘렀는데, (그간) 제후들은 서로 겸병에 (몰두하여) 사관의 기록이 방기,폐절되었다... 나는 사가로서 현명한 군주들, 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들의 행적을 기록하지 않았으니 천하의 史文이 페기될 것 같아 심히 두렵다.. 너는 이것을 명심하거라...」 이것은 일견 「춘추」이후 사관에 의한 기록의 缺落을 한탄하고, 그 接續에 대한 사관으로서의 책임의식을 강조한 것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며, 특히 사마담이 漢興 이래의 賢臣,忠臣의 행적기록에 커다란 관심을 가졌던 것도 주목된다.
그러나 사마천 부자는 史記가 단순히 춘추의 年代記 정도의 계승이 아닌,「孟子」가「춘추」가 亂臣,賊子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한 것이었음을 주장한 이래「春秋」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史績의 포폄을 통하여 정치적,도덕적 규범의 확립,후세의 王者를 위한 난세극복의 원리를 제시하기 위한 저술이라는「春秋觀」에 입각하여 그 계승을 의식한 史書를 염두에 두었을 것 이라는 것이다.
즉 史實에 假託한 王道의 현창,또는 후세 王者를 위한 法度의 제시라는 성격을 띌 수 밖에 없었을 것이며, 사마천이 史記의 저술로「一家의 言」을 이루려고 하였다는 관점에서 이해하여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漢初에 유행한 公羊學이 발달하여 孔子의「微言大義」를 발견하려는 春秋해석학이 발달하였는데 사마천이 太史公自書에서 당시 공양학의 대가인 董仲舒의 말을 인용하면서 「春秋」의 성격을 지적한 것을 보면 사마천이 공양학의 「春秋觀」을 지지한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사마천의 시대도 공자의 시대에 비견되는 난세였고 새로운 王者의 출현이 절실히 요구된 시대였는가?
壺遂는「...지금 그대는 위로는 명군을 만났고, 아래로는 백관이 각기 직분을 지키고 있어...그대는 저술로서 도대체 무엇을 밝히려고 하는가?」 (太子公自書)
라고 날카롭게 추궁한 데 대하여 사마천은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기 위해 父 사마담의 말을 인용하면서「史記」저술의 정당성을 변호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 아버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春秋가 善을 드러내고 惡을 비난하였으나 三代의 덕을 추앙하고 周室을 칭송한 것은 그것이 비단 풍자나 비난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군주가 영명하고 성스러운데도 그 덕이 널리 선전되지 않으면 그것은 신하의 불찰이다.」 (太子公自書)
위 인용문만 보면 사마담에 있어 春秋의 계승은 當代의 稱揚, 즉 漢王朝가 성취한 위대한 성공을 보고하는 것처럼 보이며, 실제 그가 임종시 사마천에게 부탁한 내용이나,사마천이 사마담의「春秋」觀을 소개한 후, 군주의 덕을 선전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라며 武帝의 聖明과 盛德의 기록을 저술의 목적으로 강조한 것을 보면 그러한 해석이 가능한 것 같다.
그렇다면 사마천은 壺遂의 추궁을 계기로 공양학의「春秋」觀을 청산하고 사마담의「春秋」觀에 입각한 칭양으로 돌아선 것인가?
물론 史記의 내용 중 漢代에 관한 부분이 과반수 이상을 점하고 있는 것은 확실히 사마담의 當代 稱揚의 강조와 무관하다고만 볼 수도 없다. 그러나 사마천이 武帝시대의 정치에 극히 비판적이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지적된 사실이거니와, 실제 平準書,封禪書 등만 보아도 이 점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사마천은 처음에「作」으로서의 史記를 염두에 두었으나, 壺遂의 추궁을 계기로 사마담의「春秋」觀을 일단 수용하여 當代의 稱揚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다가「李陵의 禍」를 계기로 다시 當代의 비판으로 선회한 것인가?
물론「이릉의 화」 이후 사마천의 선회는 어느 정도 설명되고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사마담의 발언을 보자
공자가 죽은 지 이제 500년이 되었으니 누군가 그 뒤를 이어 세상을 밝히기 위하여「易傳」을 바로잡고「春秋」의 정신을 계승하여「詩經,書經,禮,樂」의 정신을 찾는 사람이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太子公自書)
이 발언은 공자의 「春秋」저작을 공자의 다른 사업, 즉 「詩」「書」의 冊定, 禮樂의 복구와 존중의 일환으로 파악, 문명의 보호. 전승자로서의 공자를 강조하는 한편, 「春秋」의 계승을 바로 그 문명의 보호. 전승이란 점에서 의식한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그가 강조한 當代의 稱揚은 단순한 현실예찬이 아니라 문명전승의 일환으로서 當代의 문명적 盛事를 보고하는 행위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한 것이다.
「史記」天官書의 내용을 보면, 500년을 주기로 天運이 大變한다고 사마천은 믿고 있으며, 따라서 그는 堯에서 孔子까지로 이어진 王者 또는 聖人의 계보가 각기 500년의 시차로 나타난 것도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바로 이 天運 大變에 대한 인간의 대응결과로 이해하였을 것이며, 공자 사후 500년에 해당하는 자신의 시대가 역시 天運 大變의 시기라면 다시 이에 대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을 것이다. 즉 사마천 부자에게 있어서 「春秋」의 계승은 天運 大變에 따른 역사적 과제의 자각과 그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그 구체적인 표현이 「史記」로 結晶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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