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역사11. 오스만제국의 멸망과 터키공화국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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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역사11. 오스만제국의 멸망과 터키공화국의 탄생
19세기 말이 되면서 오스만 대제국의 재건 희망은 갈수록 멀어져 갔다. 유럽과 러시아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오스만 영토와 이권에 개입하였고, 이스탄불에서는 개혁파와 이를 반대하는 세력들 간의 갈등이 더욱 치열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새 술탄이 된 압둘 하미드 2세는 국가 재건의 꿈을 버리지 못하여 신헌법을 공포하고 범이슬람 정책을 펴는 등 여러 가지 근대적 조치들을 시도했다. 그렇지만 제국의 와해를 막기에는 역부족 이었다. 결국 제1차 세계대전에 독일과 함께 동맹국에 가담하여 패배함으로써 대제국은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이때 케말 파샤라는 뛰어난 장군이 독립전쟁을 일으켜 외국군을 물리치고, 1923년 지금의 터키 영토만으로 터키공화국을 선포했다.
[압둘 하미드 2세의 근대화 노력과 범이슬람주의]
전제군주였던 술탄 압둘 아지즈를 폐위시키고 1876년 개혁파의 힘을 얻어 압둘 하미드 2세가 새 술탄이 되었다. 그는 개혁파의 요구를 받아들여 막강한 술탄의 권한을 제한하고자 하는 신헌법을 받아들였다. 이것이 삼권분립 원칙에 기초한 메쉬루티예트이다. 이슬람 세계 최초이자 포괄적인 오스만 헌법인 메쉬루티예트는 1876년 베야지트 광장에서 공포되었다. 그러나 그 헙법은 여전히 술탄의 정치력에 크게 의존하였다. 술탄의 전횡은 유보되었으나, 행정. 입법. 사법 분야에서 술탄의 권한은 여전히 막강하였다. 입법부문에서 의회가 양원으로 구성되어 술탄을 보좌하였는데, 하원의원은 간접선거에 의해 선출되고 상원의원은 술탄에 의해 지명되었다.
오스만제국 내의 모든 시민이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국가 업무의 공식적인 수행기구는 내각이 되었다. 형벌과 조세제도 등이 근대적 형태로 발전되었다. 그러나 일련의 개혁조치들은 그 과정과 효용성 때문에 오스만 사회에서 크게 3계층에 의해 비판을 받았다. 첫째는 전통 보수주의자들이었고, 둘째는 행정경험과 서구 이념에 대한 이해를 가진 비판적 지식층이었으며, 셋째는 술탄의 폐위를 주도한 정치세력들이었다.
이 중 비판적 지식 그룹은 흔히 ‘청년 오스만회’로 불린다. 그들의 정치적 지향은 매우 다양하여, 세속적이고 보편적인 혁명주의에서 철저한 이슬람 복구주의까지 여러 이념들을 복합적으로 표방하였다. 청년오스만회의 대표적인 인물이 나묵 케말(1840~1888)이었다.
그는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고 이론과 표현이 명쾌하였기 때문에, 후대 개혁론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강대국들에 의한 오스만 영토의 잠식이 가속화되자 유럽식 개혁을 주장하던 개혁파들을 물리치고 술탄 압둘 하미드 2세는 다시 자주성을 강조했다. 그 결과 그는 1878년 2월에 의회를 해산해 버렸다. 이로써 메쉬루티예트 헌법은 폐지되지는 않았어도, 그 시행이 1908년까지 정지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개혁론자들은 유배되었고, 개혁을 주도했던 재상 미트하트 파샤를 비롯한 일부 인사는 처형되었다.
새로운 복고주의 노선을 선호한 술탄은 외세에 대항하기 위해 이슬람을 공통분모로 이슬람 세계의 협력과 단결을 꾀하는 정책을 폈다. 이것이 범이슬람주의 운동이다. 무조건적인 서구화보다는 이슬람의 이념과 가치에 충실하면서 서구의 앞선 기술과 제도를 접목하겠다는 의도 였다. 이를 위해 술탄은 1900년 이스탄불 대학을 근대식 교육기관으로 탈바꿈시키고, 외자와 이슬람세계의 희사금으로 바그다드 철도와 다마스커스, 사우디아라비아의 히자즈를 연결하는 철도 부설을 시작했다.
한편 술탄의 보수적인 중앙집권화에 반대하는 젊은 지식인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유럽인들에 의해 ‘청년 투르크당’으로 불렸던 이들은 군사 쿠데타를 통해 1908년 메쉬루티예트 헌법을 복원하고 압둘 하미드 2세를 폐위시켰다. 그러나 이미 중심을 잃고 흔들리는 제국을 바로 세울 수는 없었다. 잦은 전쟁으로 인해 영토가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갔다. 이제는 이슬람제국이었던 오스만보다는 터키인 만을 위한 민족국가의 수준에 만족해야 했다. 이러한 터키 민족주의의 강화는 중앙아시아의 터키어 사용 민족들 간의 연대를 주창하는 범터키주의 운동으로 연결되었다.
모든 자구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스만제국의 영향력은 1912~1913년에 일어난 두 차례 발칸전쟁의 패배로 완전히 소멸되었다. 이로써 제국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국제적인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리게 되었다.
[케말 파샤의 등장과 터키공화국의 성립]
터키 현대사는 무스타파 케말 파샤라는 독립전쟁의 영웅과 함께 한 역사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그의 영향력과 기여는 거의 절대적인 것이었다. 1881년 오스만제국 치하에 있던 그리스 테살로니카에서 출생한 그는 중학교를 마치고 이스탄불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면서 군인으로서의 길을 걸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차나칼레 전투에서 영국군을 두 차례나 격퇴하면서 ‘이스탄불의 구세주’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1차대전의 패전으로 오스만제국이 와해되고 본토마저 강대국의 점령하에 놓이게 될 운명에 처하자, 그는 젊은 장교들과 외세를 몰아내고 조국을 지키기 위한 독립전쟁을 시작했다. 동부에서 아르메니아인과 그루지야인들을 격퇴하고 러시아의 중재로 옛 영토를 회복했으며, 남부 전선의 승리로 프랑스를 시리아로 철군시키는데 성공했다. 특히 1922년 8월 총공세로 그리스군을 터키 남부에서 몰아냄으로써 결정적인 독립의 실마리를 마련했다. 결국 전쟁의 실질적인 실력자인 영국이 마르마라 해와 에게 해를 이어주는 전략적 요충지인 차나칼레와 이스탄불을 케말의 국민정부에 양도함으로써 독립전쟁은 마무리되었다. 이와 함께 1923년 7월 24일 로잔조약에 의해 터키 국경의 보존과 완전한 독립이 보장되었다.
케말 파샤는 600년간 지속된 낡은 오스만 왕정을 폐지하고 1923. 10. 29. 터키공화국을 새로 탄생시켰다. 이후 터키는 20세기 세계사에서 가장 극적인 개혁으로 국가의 모습을 바꾸어 갔다. 그것은 국가의 중심가치를 이슬람에서 세속주의로 옮겨가는 혁명적인 변화였다.
우선 수도를 이스탄불에서 앙카라로 옮기고 국민의 99%가 이슬람교를 믿고 있음에도 종교의 자유와 함께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선언했다. 이슬람세계의 최고 지도자에게 붙여 주던 칼리프 제도가 없어졌고, 종교법인 이슬람법 대신 서구의 법제도를 받아 들였다. 나아가 이슬람 남자들이 쓰던 터번과 ‘페즈’라고 불리는 붉은 모자를 없애고, 여성들이 공공기관에서 차도르를 쓰지 못하게 했다. 여성들의 선거권과 참정권이 인정되었고, 문자 혁명을 통해 수백 년 동안 사용해 오던 아랍어를 버리고 라틴어로 새로 알파벳을 정함으로써 국민들의 교육수준을 높였다.
1931년에는 터키공화국의 국가이념으로 6개의 기본 원칙이 공표되었다. 공화주의. 민족주의. 국민주의. 국가주의. 세속주의. 개혁주의가 그것이다. 이제 터키는 이슬람세계에서 가장 획기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국가로 탈이슬람, 친서구화 실험을 향한 큰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 원칙은 오늘날 까지 터키공화국을 지탱하는 기본 골격으로 굳건하게 지켜지고 있다.
그 후 터키공화국은 서구화 정책을 통해 유럽 및 미국 등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유럽 방위기구인 NATO에 가입하였고, 최근에는 유럽연합에도 가입하기 위한 협상을 벌이고 있다. 우리나라와는 1950년 한국전쟁 때 많은 군대를 보내 주면서 좋은 관계를 맺었고, 현재 지구촌에서 가장 한국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나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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