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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역사16. 겐무신정과 남북조의 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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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역사16. 겐무신정과 남북조의 내란

1] 시대개관

조큐(承久)의 난에서 패배한 이후, 교토의 조정은 완전히 기력을 상실해 버렸다. 원정은 형태만 남아 있을 뿐, 천황가는 지명원(持明院)계통과 大覺寺 계통이라는 두 개의 파로 나뉘어, 서로 막부에 의지하면서 왕위를 다투고 잇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호조 다카토키(北條高時)가 싯켄이 된 이후, 막부의 정치는 고케닌들의 신뢰를 잃어버리게 되고, 세상의 여론은 반막부적으로 변해 갔다. 이런 가운데 즉위한 대각사 계통의 고다이고 천황은 막부를 타도하고 조정이 정권을 다시 장악하려고 시도해 성공 한다.

고다이고 천황의 정치를 ‘겐무新政’이라고 한다. 겐무 신정은 복고정치로, 무사들을 예전의 귀족인 공가의 지배하에 둔다고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당시의 무사들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겐무신정에 실망한 무사들은,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를 중심으로 해서 신정부의 타도에 나서게 되는 것이다. 교토를 둘러싼 여러 차레의 공방전 끝에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추대한 지명원 계통의 천황은 교토에, 그리고 대각사 계통의 고다이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세력은 교토의 남쪽인 요시노(吉野) 산 속에 각각 조정을 두고, 이후 60년간에 걸친 오랜 항쟁을 거듭하였으므로, 이를 남북조의 내란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내란은 1392년에 제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스(足利義滿)에 의해 끝나게 된다.

2] 겐무新政

1) 정치기구의 정비 : 고다이고 천황은 호조씨가 멸망하자 곧 교토로 돌아와서 우선 지명원 계통의 고곤천황을 폐위시키고 섭정. 관백을 폐하며, 막부와 원정을 부정하고 천황 친정을 시작 하였다. 그는 중앙에 기록소. 잡소결단소. 무자소(武者所). 은상방(恩賞方) 등을 설치하고, 지방에는 국사와 슈고를 함께 설치하였다.

그리고 의욕적으로 새로운 정치를 시작 하였다. 신정이 시작된 다음 해에 ‘겐무(建武)’라고 연호를 바꾸었기 때문에, 이러한 여러 가지 새로운 정책이 시행된 정치를 ‘겐무신정’이라고 한다.

2) 公武의 반목 : 겐무신정의 내부는 서로 다른 여러 가지의 목적으로 참가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일치된 정치체제의 확립이 어려웠다. 게다가 당초부터 막부를 타도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모리요시 왕자가 대립하게 되자, 이 대립을 축으로 公家와 武家의 반목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3) 논공행상의 파탄 :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한 이후, 공을 세운 무사들의 겐무 신정에 대한 불만은 커져만 갔다. 즉 막부 타도에 가담한 무사들이 가장 큰 기대를 한, 토지문제에 대한 처리도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사사나 공가들에 대한 은상은 후하였던 반면에, 상대적으로 무사들에 대하여는 소홀하였다.

더욱이 영토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천황의 허가가 잇어야 한다는 명령을 서둘러 발표했기 때문에, 토지정책에 큰 혼란을 야기 시켰다.

3] 남북조의 내란과 합체

1)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거병 :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겐무신정에 대하여 불평을 하고 있던 무사의 인심을 얻은 후, 우선 정이대장군인 모리요시 왕자와 대립, 고다이고 천황에게 왕자가 반역을 꾀하고 잇다고 알렸다. 이에 대하여 천황은 1334년 10월 왕자를 가마쿠라에 있던 다타우지의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의 밑으로 유배를 보낸다. 이듬해 호조 도키유키 등이 가마쿠라 막부를 재흥하고자 가마쿠라로 쳐들어 오는데, 이를 ‘나카센다이의 난’이라고 한다. 다다요시는 이를 기회로 삼아 유폐하고 있던 모리요시 왕자를 살해하고, 다카우지도 이를 기회로 가마쿠라로 내려와 동생인 다다요시와 함께 가마쿠라를 회복하고, 마침내 닛타 요시사다를 토벌할 것을 선언하고 겐무신정에 대하여 반기를 들게 된다.

신정부는 3년여 만에 붕괴되고 만다. 고다이고 천황은 1336년 말에 요시노 지방으로 도망쳐 왕위의 정통성을 주장했다. 이로써 조정은 요시노(南朝)와 교토(北朝)로 나뉘어져 서로 다른 연호를 사용하고, 또 지방의 무사들도 두 세력으로 나뉘어 이후 60년에 걸쳐 싸우게 된다. 그러나 1339년 요시노에 있던 고다이고 천황이 병사하자 남조의 세력은 급속히 쇠퇴했다.

2) 아시카가 요시미스의 등장 : 1368년 나이 어린 아시카가 요시미스(足利義滿)가 쇼군이 되었지만, 이 무렵의 전황은 남조 측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기나이 지방에서 남조측의 쇠퇴는 결정적인 것이었고, 또 규슈에서는 규슈탄다이로 임명되어 현지에 부임한 이마가와 료순(今川了俊)이 남조측의 부대를 격파하자, 막부는 전국을 거의 다 군사적으로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아시카가 정권은 다카우지의 손자인 요시미스 때에 이르러 겨우 안정 되었다.

4] 남북조 문화

이는 가마쿠라에서 무로마치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문화이다. 동란의 시대는 귀족의 입장에서 보면 하극상의 문화이다. 당시 귀족문화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지 못하고 마지막 빛을 발하면서 생명력을 상실해 갔다. 왕조풍의 모노가타리는 사라지고, 칙찬 와카슈를 편집할 여력도 잃어버렸다. 야마토에(大和繪)를 대신해서 수묵화가 등장해 불상조각도 볼만한 것이 사라지게 되었다. 문학작품으로는 <太平記>, <神皇正統記> 무네요시 왕자의 <신요와카슈>, <마스카가미> <바이쇼론(梅松論)> 등이 있다.

교겐(狂言)은 남북조 시대에 발생한 서민적인 희극으로, 노(能). 가부키(歌舞伎). 분라쿠(文樂)와 더불어 일본의 대표적인 고전 예능 중의 하나이다. 노가 주로 고전적인 제재를 가지고 유현의 아름다움을 가장 중요시하는 가무극임에 대하여, 교겐은 일상적인 사건을 익살을 통해 표현하는 대사극이라는 점에서 대조적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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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정해관님의 댓글

이스라엘. 중국. 한국. 일본 공히 '남북조 시대'가 있었음이 흥미롭습니다.
'알아준다는 것' = 관심을 가져 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소원했던 관계가 풀릴 수 있고, 또 '사랑은 관심으로부터'라는 말대로, 관심을 가져 준다는 사실자체가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고 자주 주장 합니다.
그런 점에서 가장 가까와야할 이웃 일본과 가장 먼 거리에 있는 기독교의 영원한 라이벌 이슬람에 대해 그 역사와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관심의 기회'는 뜻있는 일이라 여겨 짐을 또 한번 강조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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