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32 <고풍의상> 조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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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32 <고풍의상>
조지훈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 끝 풍경이 운다.
처마 끝 곱게 늘이운 주렴에 반월이 숨어
아른 아른 봄 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 가는 밤
곱아라 고와라 진정 아름다운 지고
파르란 구슬 빛 바탕에 자주빛 호장을 받힌 회장저고리
회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 소이다.
살살이 퍼져나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돌아 곡선을 이루는 곳
열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치마 끝이 곱게 감춘 雲鞋(운혜) 唐鞋(당혜)
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살며시 문을 열고
그대는 어느 나라의 古典을 말하는 한 마리 호접(胡蝶)
胡蝶인 양 사풋이 춤을 추라 아미(蛾眉)를 숙이고.....
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살아
눈 감고 거문고 줄 골라 보리니
가는 버들인 양 가락에 맞추어
흰 손을 흔들어지이다.
<문장> 1939.4
조지훈의 시는 일제 말기 말살되어가는 우리의 정신문화를 아끼고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커다란 감명을 던져 주었다. 전아한 우리 말의 회고적 에스프리를 바탕으로 민족적 정서. 전통에의 향수. 불교적 선미 등을 조탁된 서정으로 표현, 세련되고 고품한 시격을 등장 시켰다.
같은 청록파라 하더라도 ‘정상에서 두 손을 활짝 벌리고 하늘을 향해서 있는 자세가 두진의 것이라면, 노송에 기대어 솔바람 소리와 개울물 소리에 눈을 감고 귀 기울이고 있는 모습은 지훈의 자세’ (정한모)로 볼 수 있다.
[趙芝薰 ] 1920. 12. 3 경북 영양~1968. 5. 17 서울.
청록파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며 전통적 생활에 깃든 미의식을 노래했다. 본관은 한양(漢陽). 본명은 동탁(東卓).
8·15해방 직후 국회의원을 지낸 아버지 헌영(憲泳)과 전주이씨(全州李氏)인 어머니 사이의 4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맏형 동진(東振)은 요절했으나 〈세림시집〉을 펴낸 시인이었다. 어려서 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운 뒤, 3년간 영양보통학교를 다녔다. 서울로 올라와 1939년 혜화전문학교(지금의 동국대학교) 문과에 입학해 〈백지〉 동인으로 참여했고, 조연현 등과 친하게 지냈다. 1941년 대학을 졸업하고 일제의 탄압을 피해 오대산 월정사에서 불교전문강원 강사로 있었고, 이때 〈금강경오가해 金剛經五家解〉·〈화엄경〉 등의 불교서적과 노장사상, 당시(唐詩)를 즐겨 읽었다. 1942년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위원으로 참여했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신문을 받았다. 이듬해 고향으로 내려가 지내다 8·15해방이 되자 다시 서울로 와서 명륜전문학교·경기여자고등학교에서 강의했다. 1946년 전국문필가협회 중앙위원 및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고전문학부장을 역임했고, 1947년 동국대학교 강사를 거쳐 고려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6·25전쟁 때는 문총구국대 기획위원장으로 중부전선에서 종군했고, 1961년 벨기에에서 열린 국제시인회의에 한국대표로 참가했다. 1963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이 되면서 시쓰기보다 〈한국문화사대계〉를 기획하고 추진하는 데 힘썼다. 그뒤 1965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편찬위원, 1966년 민족문화추진위원회 편집위원, 1968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68년 토혈로 사망하여 경기도 양주군 마석리에 안장되었고, 1972년 서울 남산에 시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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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관님의 댓글
1920. 12. 3 경북 영양~1968. 5. 17 서울.
청록파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며 전통적 생활에 깃든 미의식을 노래했다. 본관은 한양(漢陽). 본명은 동탁(東卓).
8·15해방 직후 국회의원을 지낸 아버지 헌영(憲泳)과 전주이씨(全州李氏)인 어머니 사이의 4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맏형 동진(東振)은 요절했으나 〈세림시집〉을 펴낸 시인이었다. 어려서 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운 뒤, 3년간 영양보통학교를 다녔다. 서울로 올라와 1939년 혜화전문학교(지금의 동국대학교) 문과에 입학해 〈백지〉 동인으로 참여했고, 조연현 등과 친하게 지냈다. 1941년 대학을 졸업하고 일제의 탄압을 피해 오대산 월정사에서 불교전문강원 강사로 있었고, 이때 〈금강경오가해 金剛經五家解〉·〈화엄경〉 등의 불교서적과 노장사상, 당시(唐詩)를 즐겨 읽었다. 1942년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위원으로 참여했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신문을 받았다. 이듬해 고향으로 내려가 지내다 8·15해방이 되자 다시 서울로 와서 명륜전문학교·경기여자고등학교에서 강의했다. 1946년 전국문필가협회 중앙위원 및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고전문학부장을 역임했고, 1947년 동국대학교 강사를 거쳐 고려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6·25전쟁 때는 문총구국대 기획위원장으로 중부전선에서 종군했고, 1961년 벨기에에서 열린 국제시인회의에 한국대표로 참가했다. 1963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이 되면서 시쓰기보다 〈한국문화사대계〉를 기획하고 추진하는 데 힘썼다. 그뒤 1965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편찬위원, 1966년 민족문화추진위원회 편집위원, 1968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68년 토혈로 사망하여 경기도 양주군 마석리에 안장되었고, 1972년 서울 남산에 시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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