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역사9. 오스만 제국의 쇠퇴(비엔나 공성의 실패와 카를로비츠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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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역사9. 오스만 제국의 쇠퇴(비엔나 공성의 실패와 카를로비츠 조약)
1) 제국의 쇠퇴
콘스탄티노플의 정복(1453)에서 소쿨루 메흐메트 파샤의 암살(1579)까지 오스만제국은 성장과 번성을 계속해 왔다. 더욱이 술탄 슐레이만의 통치기에 제국은 로마와 몽골제국 시대를 능가하는 최전성기에 도달했다. 이후 부분적인 정복과 팽창이 중단된 것은 아니었지만, 명재상 소쿨루의 죽음을 기점으로 오스만제국은 군사. 행정. 재정 면에서 혼란이 가중되면서 서서히, 그리고 장기적인 쇠퇴기를 맞게 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쇠퇴요인은 술탄 자신의 능력과 권위가 점차 약화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술탄 슐레이만은 초기의 대정복사업을 마무리하고, 술탄에게 집중된 국가업무를 재상에게 위임하면서 점차 하렘(Harem, 궁녀들이 거처하는 금지된 내궁)에서 쾌락과 휴식을 취하는 경향을 보였다. 재상의 권한과 역할이 당연히 강조되었다. 그는 술탄을 대신한 제2인자로서 공적인 업무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제국 내의 이질적 민족과 다양한 집단의 정신적 구심체로서 술탄의 위치를 대신할 수는 없었다. 결국 정치적 충성심의 분산과 중앙권력의 약화는 제국의 쇠퇴로 연결되었다. 여기다 유럽의 새로운 변화와 기술적 혁신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던 요인도 무시될 수 없다.
당시 유럽은 지리상의 발견에 따른 부의 축적과 신기술 개발로 무기 체제와 과학기술에서 혁신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스만은 유럽에 대한 전통적인 문화적 우월의식과 자만으로 유럽인의 발전상에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2) 경제적 혼란
정치와 군부의 부패 및 무질서는 곧바로 16~17세기의 경제적 혼란으로 연결되었다. 최초의 경제적 위기는 16세기 말에 시작되었는데, 이때 네델란드와 영국이 서아시아로 통하는 오스만의 주요 고대 교역로를 봉쇄하여, 오스만 경제에 매우 심한 타격을 입혔다. 이와 함께 세력이 강대해진 유럽 국가들과의 전쟁이 승산없이 장기화되거나, 오스만군이 패배하는 경우가 잦아지면서 점령지에서의 세금과 연공. 조공 등을 통한 국고의 수입이 현저하게 감소되었다.
오스만의 유럽 변방은 제국의 정치적. 경제적 안정을 확보하는 근간이었다. 오스만 전사들은 성전(Jihad)을 외치며, 야만과 불신의 질곡 속에 허덕이는 유럽인들에게 이슬람을 전달하는 성스런 사명감을 느낄 수 있었고, 그곳에서 탈취되는 전리품의 분배는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이 때문에 유럽 변방은 전사들과 이슬람 성직자 계층을 위한 훌륭한 개척지였고, 국가와 개인에게 경제적 보상까지 보장해 주는 매력적인 정복지였다. 따라서 유럽 변방의 상실 자체가 주는 정치적. 경제적 의미는 매우 심각한 것이었다.
특히 이 시기는 유럽국가가 지리상의 발견 이후 동방 식민지로부터 조달한 풍부한 물자로 경제적 번성을 누렸던 반면, 유럽의 은이 대량으로 오스만 제국으로 유입되면서 오스만의 기준 은화인 아크체의 가치가 크게 떨어졌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예니체리 군인들이 조세 의무가 있는 티마르 토지를 사유화하면서 심화된 정부의 재정적자였다.
인플레이션은 또 오스만의 전통 산업과 무역의 퇴조를 초래하였다. 엄격한 가격억제 정책에 따라 제품의 품질이 저하되었고, 저가의 고품질 유럽 상품이 오스만과의 자유무역협정에 의해 대량으로 오스만 시장에 유입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스만제국의 제조업은 거의 도산 상태에서 급격한 퇴조의 길을 걸었다.
3) 개혁운동
17세기에 시도되었던 개혁안들의 골자는 크게 3분야로 집약된다. 오스만제국의 번영을 뒷받침 했던 카누니 술탄 슐레이만의 법전에 충실할 것, 행정과 군대업무에 일대 혁신을 단행할 것, 예니체리 제도와 티마르 토지제도를 전면적으로 수정 보완할 것 등이다.
비록 고질적이고 구조적인 병폐는 일시적인 처방으로 근절되지 못했지만, 17세기의 국가 재건의 노력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부패한 관리들이 대거 숙청되고, 토지제도는 군과 행정의 발전을 위한 방향으로 개편되었으며, 변방의 반란과 탈법행위는 진압 되었다. 농민은 농토로 복귀하였고, 수확이 증대되었다. 화폐의 함량이 원래의 가치대로 환원되자 무역과 제조업도 활성화 되는등 상당한 가시적인 개혁효과가 나타났다.
특히 1656년에 원로 정치인 쾨프륄뤼 메흐메트 파샤가 새 재상으로 임명되면서 새로운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메흐메트 파샤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일가가 재상으로 봉직하면서 광범위한 개혁을 시도한 시기(1656~1683)를 흔히 ‘쾨프륄뤼 개혁시대’라 부른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 시도로 오스만 제국은 내부 문제를 상당히 해결하고 발전의 기틀을 잡았으나, 그 개혁정책들은 근원적이라기보다는 단기적인 사후 처방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제국의 기초를 다지는 획기적인 변혁으로 거듭나지는 못했다. 이미 이때 유럽은 중세 봉건사회가 와해되고, 국왕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한 절대주의 왕정, 절대국가 개념을 확립시키고 있었다. 개혁론자들은 이러한 국가개념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한 개념을 설정하고 적용하려는 시도는 19세기가 되어서야 태동했다.
4) 유럽전선의 붕괴(1683~1792)와 카를로비츠 조약
17세기의 개혁운동은 약화되어가던 오스만제국의 회복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재상 카라 무스타파 파샤(1676~1683)의 적극적인 정복정책으로 오스만제국은 중부유럽으로 재진입했고, 1683년에는 비엔나를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비엔나 공략은 실패했다. 이를 계기로 오스만군은 급격히 수세에 몰리면서 장기간에 걸친 유럽의 집요한 도전을 받게 되었고, 영토도 차츰 축소되어 갔다.
오스만군의 비엔나 공략 패배는 유럽인들에게 새로운 자신감을 심어 주었으며, 반오스만 유럽 동맹이 결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동맹에 합스부르크와 베네치아, 말타, 그리고 1696년에는 러시아도 가담했다. 오스만과 접경하고 있는 각 유럽동맹은 사방에서 대공세를 취하여 오스만과의 오랜 공방전을 서서히 승리로 이끌어 나갔다.
1683년 오스만의 제2차 비엔나 포위로 시작된 유럽 동맹국과의 전쟁은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의 체결로 종식되었다. 이 조약으로 오스만은 유럽에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이후 유럽은 오스만의 위협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제 18세기 내내 오스만은 유럽과의 전쟁에 시달리면서 자국 영토를 하나씩 잃어갔다. 유럽과 러시아는 발칸반도의 그리스정교나 기독교 복속민들의 반란을 지원하고 유도하여 오스만제국의 와해를 더욱 부채질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특히 발칸반도와 흑해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던 러시아와의 전쟁이 빈번하였다.
러시아는 1770년 지중해에서 오스만 해군을 격파하고 흑해와 크림반도를 차지하였다. 1774년 러시아와 오스만 사이에 체결된 퀴칙 카이나르자 조약으로 러시아의 남하정책이 성공을 거두면서 발칸 반도와 흑해 북부에 대한 오스만의 통제권은 러시아로 넘어갔다. 1798년에는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략함으로써 이슬람 영토에 대한 유럽의 공격이 본격화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중앙정부의 약화는 지방 호족들의 반란으로 연결되어 18세기에 들어와 혼란은 가중되었다. 북아프리카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고, 이집트에서는 오스만의 총독인 무함마드 알 리가 독자 노선을 내세웠다.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보수적인 와하비 이슬람이 생겨나 오스만 중앙정부를 조롱하였고, 이라크와 시리아에서도 오스만의 영향력이 사라졌다.
오스만제국의 후퇴로 생겨난 힘의 공백을 둘러싸고 유럽 각국의 치열한 각축전이 본격화 되었다. 소위 동방문제라고 일컬어지는 발칸 및 서아시아에서의 유럽의 이해관계는 제1차 세계대전 말까지 유럽 정치의 기본 현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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