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선생께 효孝를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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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선생께 효를 묻다.
茶山 丁若鏞先生의 勸孝文을 중심으로
효孝란 무엇인가?
요즈음 세상에서 인성회복(人性回復)을 위해 강조되고 교육 되어져야 할 대단히 중요한 가치의 질문이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농경문화 사회에서 가족이 함께하는 가정은 생활 자체가 효의 환경이었고 효행의 일상이었다. 따라서 요즈음처럼 굳이 효를 억지로 강조하거나 특별한 효 교육을 주창하여 시행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라고 생각된다. 다만 임금이나 군왕이 된 통치자가 효의 모범을 보이고, 또한 효(孝)는 백성들을 이끌어가는 통치자나 국가의 큰 정치적 사회적 덕목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모든 사회의 기강이 자연스럽게 세워지는 일이었다. 그러한 전통적 사회에서는 불효 한자와 효 한자에 대한 사회적 대접은 극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오늘처럼 억지 효를 강조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효는 행동이고 생활이지 수식된 말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효사상은 환국(桓國) 시대에는 오훈(五訓))에서, 배달국(倍達國) 시대에는 삼륜(三倫) 구서(九誓)에서, 단군(檀君) 시대에는 단군팔조교(檀君八條敎)에서 강조되어 백성들을 교화함으로써 효문화의 전통이 상고시대로부터 동이족(東夷族)에게 전수된 바로 우리의 것이지만, 그 효사상은 공부자(孔夫子)와 맹자(孟子)에서 학문적으로 정립되어 동양사상에서 효를 말할 때 유교 경전 즉 효경(孝經)이나 논어(論語) 등에서 효에 대한 확실한 사상적 전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효경대의(孝經大義) 序文에 曾子에게 두 책이 있는데 『대학과 효경』이다. 라고 하고 학문(學問)은 대학(大學)을 근본으로 삼고 행실은 효경(孝經)을 우선으로 삼는다 했다.(孔門之學은 惟曾氏得其宗하니라 曾氏之書有二하니 曰大學 曰孝經이라 經傳章句도 頗亦相似하니라 學은 以大學爲本하고 行은 以孝經爲先은 自天子至庶人히 一也라) 이어서 주문공(朱文公) 서문에는 부모를 잘 모시는 것이 효도다. 사람의 행실이 효도보다 큰 것이 없다. 요임금과 순임금은 큰 성인이시나 그 도가 효제(孝悌)에서 떠나지 아니 했고, 우(禹),탕(湯),문무(文武),주공(周公)이 공자(孔子)에 전하는 데에도 한 결같이 이 도로서 하였다고 했다.(善事父母爲孝니 人之行이 莫大於孝하니라 堯舜은 大聖人也로되 其道不過孝悌而已요 禹湯文武周公이 傳之孔子에도 壹以此道하니라. )
위에서 효제(孝悌)란 단어에 관심해보자.
효를 말할 때 항상 제(悌)의 뜻이 함께임을 주의 하자
논어 학이(學而) 2장에 유자(有子)가 말하였다.
“효도하고 공경하면서 윗사람을 범하기를 좋아하는 자 드무니, 윗사람을 범하지 않고서 난을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자는 있지 않다. 군자는 근본을 힘쓰니, 근본이 확립되면 인의 도가 발생하는 것이다. 효와 제는 그 인을 행하는 근본일 것이다.”(有子_曰 其爲人也_孝弟(悌)요 而好犯上者_鮮矣니 不好犯上이요 而好作亂者_未之有也니라. 君子는 務本이니 本立而道生하나니 孝弟也者는 其爲仁之本與인저)
효제(孝悌)에 관한 주(註)에 선사부모위효(善事父母爲孝)요, 선사형장위제(善事兄長爲悌)라. 즉 부모를 잘 섬기는 일이 효도가 되고, 형이나 어른을 잘 모시는 것이 공순이다. 라고 하였다. 논어에 나타난 공부자의 중심사상이 인(仁)이라는 것은 상식이다. 그 인의 실천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이 인간관계의 예(禮))인데, 그 예의 출발이 바로 효제(孝悌)라고 보면 될 것이다. 더러 효제충신(孝悌忠信)을 말하기도 하는데 충신은 효제의 확장된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 마치 천도(天道)의 원형이정(元亨利貞)에서 원은 형,이,정을 통섭하고 통하며, 인성(人性)의 인의예지(仁義禮智)에서 인이 의,예.지에 통하고 통섭하는 논리와 같다 할 것이다. 때문에 효제는 가정생활, 학교, 사회생활, 나아가 나라에 대해서 까지 어느 곳에서나 인간관계에서 효제(孝悌)로써 한다면 그것은 논어 이인편(里仁篇)의 충서(忠恕)를 일이관지(一以貫之)로 하는 바로 인(仁)의 실천이 될 것이다.
이제 본 주제인 정약용선생께서 지으신 권효문에 대하여 이야기 해보자. 다산 정약용은 위대한 학자이자 저술가로서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책을 저술하였다. 또한 그는 조선시대 17세기 후반부터 胚胎된 실학사상을 집대성하여 朱子學(性理學)의 이론체계에서 벗어난 실학을 독자적인 철학체계로 체계화시킨 실학의 集大成者로 후인들에 의해 일컬어지고 있다. 실학사상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일어났던 두 차례의 전쟁, 즉 1592년과 1597년의 임진ㆍ정유왜란과 1627년과 1636년의 정묘ㆍ병자호란 이후 도탄에 빠져버린 절박한 사회현실과 이를 수습해야 할 정치 권력층의 정치 지도력의 한계성이 노출되면서 기존의 정치질서를 유지시키는 데 사상적 기반이 되어 온 성리학에 대한 반발에서 대두된 시대적 산물(産物)이라고 할 수 있다.
정약용 선생은 1789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로 급제(及第)하고 가주서(假注書)를 거쳐 검열(檢閱), 지평(持平), 1792년 수찬(修撰),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 1795년 병조참의,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으로 좌천, 규장각(奎章閣)의 부사직(副司直)을 맡았고 1797년 승지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자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사의를 표명하였다. 윤 6월에 곡산부사(谷山府使)로 있으면서 치적을 올렸다. 1799년 2월에 황주 영위사(黃州迎慰使)로 임명하는 교지를 받았고, 다시 병조참의(兵曹參議)를 거쳐 동부승지, 형조참의(刑曹參議)가 제수되었으나 또 다시 모함을 받아 사직하였다. 다산을 아끼던 정조(正祖)대왕이 1800년 6월 승하하자 1801년(순조 1) 신유교난(辛酉敎難) 때 장기(長鬐)에 유배되었는데 정 다산의 나이 40세였다. 10월, 황사영의 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으로 투옥되었다가 11월, 다산은 강진현(康津縣)으로 이배되었다. 그 곳 다산(茶山) 기슭에 있는 윤박(尹博)의 산정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하여 경학을 일으켰으며 학문체계는 유형원(柳馨遠)과 이익(李瀷)을 잇는 실학의 중농주의적 학풍을 계승한 것이며, 또한 박지원(朴趾源)을 대표로 하는 북학파(北學派)의 기술 도입론을 받아들여 실학을 집대성하였다.
위에 다산에 관한 부분적인 연보(年譜)에서 특히 다산선생이 황해도 곡산부사(谷山府使)로 좌천(左遷)되어 재직할 때에 “유곡산향교권효문(諭谷山鄕校勸孝文)”이란 글을 지었는데, 이글이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제1집 제22권에 수록되어 있다. 본고의 중심은 바로 이글을 소개하고자 하는데 있다.
이 권효문(勸孝文)을 통해 효를 깨우치는 글에서 다산 선생은 효를 먼데서 찾지 않고 가정에서 부모봉양(父母奉養)을 확실히 한데서 찾아 강조했다. 학문한다는 자들에게 천리(天理)다. 음양(陰陽)이다. 태극팔쾌(太極八卦)다. 하도낙서(河圖洛書)등을 그려놓고 완색(玩索)한다며, 배우지 못한 자들을 속이고, 부모봉양을 게을리하는 것을 질타했다. 불효가 될 수 있는 두 가지 단초를 아내와 재물을 들었다. 갓 난 어린애일 때도 자기 부모를 사랑할 줄 알면서도 어른이 되어서는 오히려 부모를 멀리하는 것은 아내와 재물이 가리어 버리기 때문인데 본시 아내와 재물이란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함이었다고 했다. 내 아내가 효부(孝婦) 되기 위해서는 남편이 부모에 대한 효를 보이도록 하여 부부효(夫婦孝)를 강조하고, 효부 며느리가 되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남편의 책임이라고 했다. 그리고 형제는 같은 부모에게서 낳은 또 하나의 나(我)로 인식하여 형제화목(繼母의 자식들까지 포함)을 강조(强調)한 내용임을 볼 수 있다.
원문은 한국국역원의 문집총간(文集總刊)에서 다운 받아 서툴기 그지없지만 현토를 해보았다. 보시는 분들이 조금이라도 참고가 되었으면 하고 틀린 곳은 고쳐 읽으시기 바란다. 해석의 글은 박석무·정해렴 편역, 다산문학선집에서 참고하였다.
이번 사은정(思恩亭)에서 “부모님 은혜(恩惠)”라는 주제로 품격 높은 행사에 즈음하여 효(孝)는 의당 부모님 은혜(恩惠)에 대한 자식으로서의 보은행위(報恩行爲)라고 여길 때 고전(古典)에서 전통적 효에 대한 글을 접하여 소개할 수 있어서 다행한 일로 생각하였다. 또 정약용(丁若鏞)선생과 강진(康津)을 떼놓을 수 없는 인연(因緣)에서 강진을 찾는 문우(文友)들에게 훌륭한 내용을 소개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더없이 기뿐 일이다. 시대적으로 210여 년 전의 글이지만 차근차근 음미(吟味)하면서 읽어보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부끄러운 생각이나 마음을 들추어내어 각성(覺醒)을 요구하여 일용(日用)의 이륜(彛倫)이 퇴폐(頹廢)된 이 시대의 사회를 통렬(痛烈)하게 채찍질하고 있으니, 참으로 다산(茶山)선생의 시대를 내다보는 혜안(慧眼)을 숭경(崇敬)하여 받들지 않을 수 없다.
분명히 우리는 이 같은 내용을 오늘에 소개하여 법 삼게 하고, 또 이 같은 행사를 설시(設施)하는 목적이나 그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권장(勸獎)할 일이다.
효를 권장하는 글(諭谷山鄕校勸孝文)
효자가 자기 어버이를 봉양하는 일은 어버이의 뜻을 봉양함에 있다. 그러므로 성인(聖人)께서 먹고 입는 일만 봉양함을 무척 경계 삼도록 하셨다. 그러나 세상이 갈수록 쇠태하고 도덕이 미미하여, 먹고 입는 것만을 봉양하는 사람조차 도리어 찾아보기 어렵다. 먹고 입는 일만이라도 봉양할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역시 효자의 부류이리라.
더구나 일반 백성들의 뜻이란 대인군자(大人君子)와는 달라서 먹고 입는 일 말고는 별다른 뜻을 가지기가 어려워 곧 먹고 입는 일만 봉양해 드릴 수 있으면 더러는 뜻까지 함께 하여 봉양 받은 것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연약한 백성들이나 서민들이 어찌하여 먹고 입는 것에 대한 봉양만이라도 부지런히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맹자(孟子)의 말씀에 "5묘의 주택지의 담장 아래 뽕나무를 심으면 50세의 노인이 비단옷을 입을 수 있으며, 닭·개·돼지 등의 가축을 그때를 놓치지 않고 기른다면 70세 노인이 고기를 먹을 수 있을 거다"라고 하였다. 이는 곧 옛날의 훌륭한 임금들이 누에치기와 명주 짜기를 백성들에게 권하고 가축 기르기를 권했던 까닭은 바로 그런 일을 해서 그들의 부모를 봉양하게 하려는 것이지 이익을 늘리고 재산을 모으게 하려고 했음은 아니었다.
요즘 가축 기르는 정책이 오랫동안 등한하여 없어져 가는 지경이지만, 그러나 간혹 여인들 중에 열심히 누에를 쳐 명주를 짜기도 하고 남자 중에는 가축 기르는 일에 힘쓰는 사람도 있다. 한 필의 비단을 짜내면 금방 시장에 달려가 팔아서 돈을 만들 생각이나 하고 병아리 한 마리라도 키워내면 문득 읍내에 들어가 돈으로 바꿀 생각이나 하고 있어, 저고리 하나라도 만들고 닭고깃국 한 그릇이라도 준비하여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릴 일은 하지 않고 있으니 역시 서글픈 일이 아닌가. 그 사람들 마음에는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아 아직 그러할 겨를이 없다고 여길 것인데, 이게 다른 날을 기다릴 수 있는 일이겠는가. 아아, 바람이 불면 나무는 항상 고요할 수 없는데 어버이 나이가 어떻게 오래도록 멈추어 있으랴. 참으로 어버이의 나이 먹어가는 하루라도 애석해하는 효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의당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음식의 미세한 맛인 시고 짜거나 달고 떫은 것에 대해서는 군자들이 결코 유념하지 않고 있는데, 『예기(禮記)』의 내칙(內則) 등과 같은 여려 편에서는 고기 굽는 일, 고깃국의 맛이나 생강·계피·양념. 식초. 간장의 품질 등을 세세하고 정밀하게 갖추어 번거롭고 복잡하며 정중함을 잃는 것을 꺼려하지 않았는데, 이건 왜 그렇게 하였을까. 그건 부모를 봉양하기 위함이었다.
요즘 사람들은 집안의 살림이 조금만 넉넉하여도 부녀자들이 손수 밥을 짓거나 반찬 장만하는 일을 하지 않고, 남자들은 더욱 고자세로 하여 남녀종들에게 맡겨 버린다. 혹 음식 맛이 떨어지고 혹 차고 더운 정도가 적당하지 못하여 부모로 하여금 수저를 던지고 식사를 물리침을 당하면 바로 그 남녀종들을 매질하여 꾸짖고는 끝내 자기들의 잘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이 또한 미혹된 일이 아니겠는가.
요즘 세상의 학자들이란 가까스로 학문한다는 명분으로, 문득 자기 자랑이나 하고, 천(天)이나 리(理)를 담설하며 음(陰)이다, 양(陽)이다 하며 벽 위에 태극팔괘(太極八卦)·하도낙서(河圖洛書) 따위의 그림을 그려놓고 스스로 일컫기를 완색(玩索)한다고 하면서 어리석은 사람들이나 속이고 있다.
그러나 자기 부모가 한창 춥다고 하소연하며 배고픔을 참다가 병이 깊어져도, 이내 게으름 피우며 보살펴 드리지도 않은 채 편안히 일도 않으니, 그러한 완색(玩索)은 부지런히 한다고 하나 학문하는 일과는 더욱 멀어져 버리는 것이다. 진실로 부모에게 효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비록 배우지 않은 사람이라도 나는 반드시 배운 사람이라고 말하겠다."
효자의 행동으로서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거나 어버이의 똥을 맛보아 병세를 살피는 일 같은 것은 정말로 훌륭하고 기특한 품행이 아니랄 수는 없으나, 그러나 순(舜)임금·증자(曾子)·윤자기(尹子奇)·민자건(閔子騫)과 같은 옛날의 효자들은 왜 그러한 일을 하지 않았을까? 만약 살아계실 때 섬기고 죽어서 장례 치르고 제사지내는 일들을 예로써 하여 백가지 행실이 모두 갖추어져 있어 하나라도 모자람이 없는 사람이라면, 비록 한가지의 기이한 품행이 없다 하더라도 그런 사람이 바로 효자인 것이다. 또 얼음 속에서 잉어가 뛰어나오고, 눈 속에서 죽순이 솟아나오고, 꿩이 던져지고, 호랑이가 타라고 땅을 긁는 것과 같은 자취는 옛날 사람들의 특이한 신령스러움이 나타났던 일이지 어떻게 그러한 일이 항상 있을 수 있는 일이겠는가. 고을이나 마을에서 효행한 사람을 칭송함에 옛날의 기적과 같은 그런 소리를 답습하고 있는데, 더러는 사실과 달라서 사람 된 자가 설사 그러한 기적이 있었다 하더라도 의당 자신의 비밀로 가려 두고 남들이 알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불효의 단초가 되는 것으로 두 가지가 있는데 아내와 재물이 바로 그거다. "젖먹이 어린이도 자기 어버이 사랑할 줄 모르는 아이가 없다."라하니 이는 젖먹이의 어리석음으로도 오히려 부모 사랑할 줄을 안다는 말이다. 내가 볼 때 젖먹이의 어린애 때조차도 자기 어버이를 사랑할 줄 알면서 어른이 되어서는 반대로 더러 그걸 모른다고 한다면 무엇 때문일까. 아내와 재물이 가리어 버리기 때문이다. 아내와 재물이라는 것은 본래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내란 장차 시켜서 살아계시는 동안에는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게 하고, 돌아가신 뒤에는 제사지내고 자식을 낳아 길러서 조상을 잇게 하려는 거다. 재물이란 장차 부모에게 옷과 음식을 해드리게 하려는 것이요, 부모의 장례나 제사의 비용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아내가 없고 재물이 없다면 사람의 자식이 되어 어떻게 효도를 할 수 있겠는가. 다만 아내를 자기 개인의 아내로만 해버리고 재물을 자기 개인의 재물로만 해버려 부모가 자기의 아내를 편하게 해주지 않는 걸 보고서는 원망하고, 부모가 자기의 아내를 수고스럽게 하는 것을 보고는 부모를 비난한다.
소곤소곤 안방에서만 가까이 붙어 지내며 자기 부모를 외면해 버리는데, 이게 바로 불효하는 원인이다. 부모가 자기의 재물을 축내는 걸 보면 인색해지고 부모가 자기의 재물을 다른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보고서는 걱정스러워 상자 속에다 비밀히 단단히 은닉시켜 두고는 부모를 외면해 버리니, 이것은 불효하기 때문이다.
아내란 바로 내 부모의 며느리다. 내가 어떻게 내 것으로만 하며, 재물이란 바로 내 부모가 일으켜 놓으신 것이니. 내가 어떻게 내 것으로만 해버릴 것인가. 나란 바로 내 부모의 유형(遺形)이니, 내 몸이 어떻게 나 혼자만의 몸이겠는가. 참으로 이런 점을 알아야 효도할 수 있게 된다.
어떤 친구 한 사람이 어느 날 그대를 위험스러운 횡액으로부터 구해 주었거든 그대는 그 친구에게 은혜 갚으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인가. 또 어떤 친구 한 사람이 어느 날 그대에게 백냥의 재물을 도와주었다면, 그대는 그 친구에게 은혜 갚으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인가, 심지어 종이나 노예 등이 더러 너의 병을 간호해 주며 너의 입에 떡을 먹여주었다고 하면, 너는 입이 닳도록 그들의 공을 칭찬하며 못내 아끼는 정을 품을 것이다.
아아, 인생이 지극히 위험스러워서 조심조심 보살피기 힘 드는 일은 갓난아기 때보다 더 심함이 없다. 자기 부모로 하여금 일각이라도 사랑스럽게 돌봐주고 보호하는 일을 잊어먹게 한다면 갓난애가 어떻게 안전하겠는가.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대체로 맨손으로 태어난다. 옷을 입혀 주고 먹여주며 아울러 전답과 집을 물려주지만, 비록 만 냥의 돈을 물려주지 않았다고 부모가 아닐 것인가.
지난번에 친구의 하루 동안 은혜에 대해서는 죽을 때까지 잊지 않고, 지난번의 종이나 노예의 하루 동안의 수고에 대해서는 마음에 새기고 잊을 줄 모르며, 지금 부모야말로 호천망극(昊天罔極)의 은혜인데도 망연하게 잊어먹고는 마치 당연히 해주어야 했던 일인 것처럼 생각하고 숫제 그 만분의 하나라도 보답해 드리려고 하지 않으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이치인가. 사람의 자식이 되어 어찌 이 문제에 대하여 심사숙고해 보지 않을 건가.
남자들이 장인·장모에게 겉으로는 건성건성 하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은근한 정을 두고 있다. 부인들은 시부모에게 겉으로는 존경하는 것처럼 하지만 속으로는 비난할 점만 가지고 있으니, 이거야말로 참으로 미혹된 일이다. 『예기(禮記)』에 "며느리가 시부모 섬기는 일을 친정 부모 섬기듯 한다."라고 하였으니, 정말로 시부모에게 불효하는 사람은 그 부모에게 하는 일도 알아볼 만하다.
시부모는 자기 며느리를 자기 자식같이 보기 때문에 바라는 바가 매우 깊다. 그러나 며느리는 시부모 보기를 친부모와는 다르게 하기 때문에 그 바램에 부응하지를 못하니, 이렇게 정이 붙지를 않아 가도(家道)가 어그러져 버린다.
참으로 아내로 하여금 자기 남편이 뜻이 한 결같이 효도하려는 마음만 있고 딴 마음이 없음을 알게 해준다면 남편의 환심을 사려고 해서라도 효성으로 시부모 섬기는 일을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니, 그렇게 오래 하다 보면 물이 들고 감화되어 흔연히 저절로 효부가 되리라. 이로 본다면, 며느리의 불효는 그 남편이 불효한다는 명확한 증거다. 무슨 말이 더 있겠는가.
순임금은 어떻게 효도했을까. 계모를 아주 잘 섬겼었다. 윤자기는 어떻게 효도했을까. 계모를 아주 잘 섬겼었다. 왕상(王祥)은 어떻게 효도했을까. 계모를 아주 잘 섬겼었다. 계모의 마음에 맞도록 하지 못하는 사람은 항상 계모를 귀찮게 여기니, 장차 그렇게만 한다면 어떨 것인가. 계모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 데는 방법이 있으니, 계모의 아들과 지극한 우애를 하기만 한다면 계모를 기쁘게 해 줄 수 있다.
순임금이나 윤자기는 모두 이 방법으로써 효도의 극치를 이룩했었다. 그러한 처지에 있는 사람은 거의 깜짝 놀라듯 깨우치리라. 만약 계모에게 자식이 없는 이는 그 마음이 진실로 갈라지지 않을 것이다.
요즈음 부부간에는 좋아서 화합함이 마치 금슬(琴瑟)을 두드리는 것 같음이 있으나 형제간에는 서로 물리쳐 전혀 화목하지 못하고, 친구들과는 붓 쫓아다니면서 죽고 살기를 허여하면서도 형제간에는 지나는 길손처럼 여겨버리니, 그렇게 되면 성인들이 교(敎)를 세워놓은 뜻이 어떻게 되어버리겠는가. 성인들이 다섯 가지 가르침을 세워놓을 때 아내와 친구는 넣지도 않았다. 다섯 가지 가르침이란 아버지·어머니·형님·아우·자식이었다.
형제란 나와 부모를 함께 하고 있으니, 이 또한 나일뿐이다. 형은 나보다 먼저 나온 사람이고 아우는 나보다 뒤에 나온 사람이다. 얼굴 모습이나 나이가 다소 약간 다르지만 참으로 구분하여 두 사람으로 여기고 서로 우애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내가 나를 멀리 함이다. 어찌 미혹한 짓이 아니랴.
나무 한 그루가 여기에 있는데, 가지 하나는 번성하게 자라서 꽃이 무성하게 되었지만, 다른 가지 하나는 시든 듯 말라빠져 고목이 되었다면 사람들이 안타깝게 탄식하며 애석하게 여기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지금 형제 여러 사람이 있어 어떤 사람은 부자가 되어 편안히 즐기고 어떤 사람은 가난하여 괴롭게 애쓰는데, 서로 돌보아 주지 않고 각각 자기 아내와 자식들만 돌보고 있는 사람이라면, 사람들이 그들을 보기를 어찌 지각없는 초목을 보는 것 같이만 여길 것인가. 특별히 대면해서는 감히 한탄하면서 허물을 떨쳐버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부끄럽고 두려운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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諭谷山鄕校勸孝文 『第一集詩文集 第二十二卷○文集』
孝子之養其親은。在於養志라。故聖人深以養口體爲戒라。然世衰道微하여。養口體者로도 却自難得이라。有能養口體者면。斯亦孝子之徒耳리라。況凡民之志란。異於大人君子하여。口體之外에。鮮有他志하여。卽能養口體이면。或未嘗不竝志而受養也라。小民匹庶。盍亦孳孳於口體之養이리요。
孟子曰 “五畝之宅에。樹牆下以桑이면。五十者可以衣帛矣며。雞豚狗彘之畜을。無失其時면。七十者可以食肉矣”라。卽聖王之所以勸民蠶績하고。勸民畜牧者는。正使之養其父母요。而非欲其興利營貲也라。
今種畜之政이。久已疎廢나。然間亦有女勤蠶績하고。男務畜牧者라。得一匹帛하면。便思走市販貨하고。得一雛雞면。便思入城取錢하며。而未或製一襦(유)具一臛(확)하여。以悅其父母하니。不亦悲哉아。其意以爲家力未贍하여。姑不暇爲나。此將有待於他日乎아。嗚呼라。風樹不能常靜이어늘。親年豈得長駐하랴。苟有愛日之孝者라면。宜靜思之라。
飮食之微의。其酸鹹甘濇은。君子不必留意나。而禮記如內則諸篇엔。其論爒羹胾(정료갱자)之味와。薑桂虀鹽醯漿(강계제염장)之品을。瑣細精核하여。不嫌其煩複鄭重者하니。此何以哉아。爲其養父母也라。
今人家貲小嬴에。婦女不親饔膳하고。男子尤落落焉하여。唯婢僕是委라。 或滋味乖和하고。或冷熱不適하여。致令父母投筯却食이면。方且打罵其婢僕하여。終不能自知其罪하니。不亦惑與아。
近世學者란。纔名爲學으로。便自矜重하고。談天說理하며。曰陰曰陽하며。壁上圖畫太極八卦河圖洛書之屬하고。自稱玩索이라하여。以欺愚蒙이라。而其父母方且呼寒忍飢하며。疾病疴癢하여도。乃漫不省察하고。恬不勞動하니。卽其玩索彌勤이나。而彌與學遠矣라。苟於父母能孝者라면。雖曰不學이라도。吾必謂之學矣로리라。
孝子之行으로。如斷指嘗糞은。未嘗非卓卓奇節이나。然大舜.曾參.尹子奇.閔子騫之爲孝也는。何嘗由是哉아。若夫生事之死葬之祭之以禮는。百行全備하여。無一觖欠者이면。雖無一節之奇라도。斯孝子矣라。又如氷鯉.雪筍.雉投.虎跪之蹟은。此在古人에。特著靈異이니。安得每有此事아。州里稱揚人孝行者로대。動襲前芳하고。或爽事實하여。爲人子者設有此等奇蹟이라도。宜自祕諱하여。勿令人知也라。
不孝之端有二하니。曰妻曰財是也라。孩提之童이라도。莫不知愛其親이라하니。此言以孩提之蒙騃 (매)라도 而猶能知愛也라。以余觀之컨데。唯孩提之童에도。知愛其親터니。及其長也하얀。反或不 知하니。此曷故焉고。以妻與財之爲蔽也라。唯妻與財는。本所以孝父母也라。
妻者將使之生具甘旨하고。沒奉祭祀하며。產育子姓하여。以繼其先也요。財者將以給父母之衣食이며。供父母之葬祭也라。非妻非財면。人子何以孝焉고。唯自私其妻하고。自私其財하여。見父母之未安其妻也則怨焉하고。見父母之勞苦其妻也則訕焉이라。
竊竊昵昵於閨房之內하며。而外其父母하니。玆其所以不孝也라。見父母之損削其財也則慳(간)焉하고。見父母之派散其財也則憂焉하며。隱匿堅祕於箱篋之中하여。而外其父母하니。玆其所以不孝也라。
妻歟是吾父母之婦媳也니。吾安得而私焉이며。財歟是吾父母之產業也니。吾安得而私焉이리오。吾歟是吾父母之遺形也니。吾安得而私之리오。苟知是也라야。斯可孝矣라。
有友焉이。一日救汝於危險之厄커든。汝其不德此友而圖報乎아。有友焉이。一日遺汝以百金之財커든。汝其不德此友而圖報乎아。以至僕隷之賤이。有或護汝于疾病하며。啗汝以餅餌者면。汝罔不嘖嘖稱功하며。眷眷銜愛矣리라。嗚呼라。人生之至危至險하여。凜凜乎不可保者는。莫甚於嬰孩之時也라。使其父母로。一刻而忘眷顧拯護也면。則孩子安能全矣리요。人之生世也엔。蓋赤手耳라。衣之食之하며。竝田宅而遺之라。雖萬金不留焉者라도。非父母乎아。
曩在友也엔。一日之德而終身不忘하고。曩在僕隷也엔。一日之勞而銘心不衰하며。今於父母也엔。則昊天罔極이나。而漠然相忘하고。若固有之하여。曾不欲酬謝其萬一하니。此何理也아。爲人子者가。盍亦三思(深思熟考)리요。
男子之於妻父母에。外似疎薄이나。而內有隱情이요。婦人之於舅姑에。外似尊敬이나。而內有潛訕하니。誠可惑也라。禮曰 “婦事舅姑커든。如事父母”라하니。苟於舅姑不孝者는。其於父母可知也라。
舅姑視其婦爲己子라。故望之至深이라。乃婦人之視舅姑엔。異於天屬이라。故不副其望하니。於是乎情意不孚而家道亂矣라。
誠使婦人知其夫子之志가。壹於孝而不貳焉이면。則欲得歡心으로。不能不孝養舅姑리니。及其久也면。浸染感化하여。渾然天成이라。由是觀之컨데。婦之不孝는。明徵其夫子之不孝也니。何辭焉이리요。
大舜曷孝焉고。以善事繼母也라。尹子奇曷孝焉고。以善事繼母也라。王祥曷孝焉고。以善事繼母也라。不得於繼母者는。每以繼母爲諉하니。將如彼何哉아。悅其心에 有道하니。能於繼母之子에。極其友愛면。則繼母可底豫也라。
大舜,子奇。皆以是道達焉이라。遭 其地者는。庶犁然悟矣리라。若夫繼母之無子者는。其志固不分也라。
今有夫婦好合이。如鼓瑟琴이나。而兄弟却不和翕하고。朋友馳逐하여。許以死生이나。而兄弟視如行路者하니。其與聖人立敎之意何如哉아。聖人之立五敎也에。妻與友不與焉이라。五敎者는。父母兄弟子也라。
兄弟者란。與我同父母하니。是亦我而已矣라。兄者先至之我也오。弟者後至之我也라。特貌與齒暫異耳이나。苟分而二之하여。不相友愛면。是以我疎我矣라。豈非惑歟인져。
有一樹於此면。其一枝蔚然榮茂하고。其一枝悴然枯槁하면。人莫不咨嗟而憐惜之라。
今有兄弟數人하여。或豪富逸樂하고。或貧匱勞苦하며。而不相眷顧하여。各私其妻子者라면。人之視之를。豈唯草木之無知哉아。特不敢對面咨嗟以離尤耳라도。不愧懼哉아。
2016년 6월 일
崔 鐘 萬 整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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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2016년 여름 강진읍 춘전리 사은정(思恩亭:주인 김득환)에서 “부모님 은혜(恩惠)”라는 주제로 열리는 행사를 위해 기고한 내용입니다.
내용상 많이 구태한 글이지만 우리 민족에게 효(孝) 라는 주제는 떼놓을 수 없는 원형문화로 효주제의 연구발전을 위해 그 접근을 위해 참고되기를 바라면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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