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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침 이후 3일간 이승만 대통령의 행적 - 남정옥(국방부 책임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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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침 이후 3일간(72시간), 이승만 대통령의 행적 

 

이 자료는 제 52회 이승만 포럼에서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이 발표한 논문이다

 

그는 남침 이후 이승만의 3일간의 행적은 국군 통수권자로서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수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이승만의 전시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그의 논문은 한국사회에 6. 25 당시의 이승만 전()대통령의 행보에 대해 오해가 만연해 있는 상황에서 지대한 가치가 있다는 판단하에 그의 연구 내용을 옮긴다.

 

   필자 : 남정옥(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 머리말

 

6·25전쟁은 소련의 스탈린(Joseph V. Stalin)과 마오쩌둥 (毛澤東),  그리고 미국에 대항한 이승만의 전쟁이었다.

이승만(李承晩, 1875-1965)31개월간의 전쟁동안 김일성으로 하여금 전쟁을 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스탈린과 마오쩌둥, 그리고 북진통일을 가로막은 워싱턴과 대립하며, 대한민국의 운명과 우리 민족의 생존권을 놓고 싸우고 또 싸웠다

이른바 벼랑 끝 전략을 구사했다

대표적인 것이 유엔군에서 국군철수와 국군 단독의 북진통일

그리고 반공포로석방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승만의 뛰어난 지도력에 의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을 극적으로 살려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의 지위를 누릴 수 있도록 튼튼한 안보적 토대와 경제적 기틀을 마련했다.

이른바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따른 한미동맹, 국군 20개 사단의 증강과 ·공군의 

현대화, 그리고 전후 복구 및 경제 부흥을 위한 토대 마련이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이승만의 업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그를 옹호하는 학자들은 이승만을, 외교의 신대한민국의 국부· 아시아의 지도자·  20세기의 영웅,  조지 워싱턴·토머스 제퍼슨· 아브라함 링컨을 모두 합친 만큼의 위인한국의 조지 워싱턴,  6·25동란을 수습한 절대 공로자로 격찬 하고 있다.


그럼에도 국내 사회 및 학계 일각에서는 전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 인색하기 

그지없다

그들은 오로지 이승만의 정치적 흠집 내지는 결점만을 찾아내는데 혈안(血眼)이 되어 

있다.

이승만의 전시 업적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이 없거나 이를 무시한다

그들에게는 이승만의 과오만 필요했다

오랜 노력 끝에 그들이 얻어낸 성과가 바로, 이승만 때리기에 유용한 것들이다.

이른바 이승만을, 전쟁에 대비하지 못한 무능한 대통령, 남침이후 별로 하는 것 없이 서울시민을 내팽개치고 피란을 간 무책임한 지도자,  한강교를 조기에 폭파하여 서울시민을 공산치하에서 죽음으로 몰아넣은 무정한 대통령, 전쟁 중에는 장기집권을 위해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킨 권력욕의 화신(化身) 등으로 보고 있다.

 

그 중에서도 남침직후 이승만의 과오 및 잘못된 행적에 대부분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승만은 이들 비난세력이 말한 것처럼 용렬하고 무능한 인물이었던가

정말로 그는 남침직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일신(一身)의 안위를 위해 피란을 갔던 대통령이었는가

그것은 신뢰성이 있는 것인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가

이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이 이 글을 쓰게 된 배경이자 동기이다.

그럼에도 논란이 되고 있는 남침 직후 이승만의 3일간의 행적에 대한 연구는 거의 전무하다

기록도 거의 없고,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도 희박하다

그나마 남아 있는 기록도 종합되지 않고, 단편적으로 떨어져 있다.

더욱이 있는 것조차도 서로 내용이 틀리다

출처가 불명확하니 어떤 것이 맞는지도 모른다

이는 당시의 국가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는데다이승만 대통령 자신의 기록도 온전히 보존되지 않는데도 기인하고 있다.

몇 안 되는 이에 대한 기록들도 당시의 상황을 전체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이제까지 이들 자료가 남침이후 이승만의 3일간의 행적을 더듬는 중요한 자료로서 역할을 해왔다

그러하다보니 역사가 오도(誤導)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 자료로는 6·25전쟁 당시 이승만 주변을 맴돌던 인사들의 증언이나, 그들이 쓴 회고록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이들 증언들의 대부분은 당시의 상황을 전체적으로 조망하지 못한데다사실과 다른 단편적인 오류들이 많이 뒤섞여 있다는 단점이 있다.

특히 이를 담고 있는 증언록들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작성된 탓으로, 기억의 한계 탓인지 내용과 시간이 뒤바뀌어져 있거나, 사실이 다르게 잘못 기록된 부분들이 많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이승만은 남침직후 별로 할 일 없이 경무대에 있다가 서울시민을 버리고 도망간 지도자, 한강교를 폭파한 지도자로 인식하기에 좋은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그들 자료로는 그렇게 밖에 이승만을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접하고 있는  6·25전쟁 직후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역사의 나상(裸像)’이다.


그렇다고 자료가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제까지 이승만의 72시간 행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자료는 많지는 않았지만 있었다

다만 늦게 공개되었거나여기 저기 파편처럼 산재 되어 있어 이를 종합적으로 맞추지 못했을 뿐이다.

이들 몇 개 되지 않는 자료로는무초 대사와 미 국무부간의 전문자료 21(6.25.10:006.27.08:00)1976년에 발간된 미 국무부의 대외자료(FRUS: Foreign Relations of United States)에 포함되어 있는데이는 전쟁 초기 이승만의 행적을 알게 하는데 매우 귀중한 기초 사료이다.


또한 전쟁 초기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의 동정을 알 수 있는 자료가 1977년 국방부에서 발행한 6·25전쟁사 공간사와 기록물이 있다.

또 단편적이긴 하나 당시 주미대사관의 한표육(韓豹頊) 참사관이 1984년에 쓴 회고록 

성격의 책인한미외교 요람기가 있는데, 이는 이승만과 주미대사관의 전화통화기록이 시간과 장소 그리고 내용이 비교적 자세히 남아 있어,  당시 이승만의 대미외교의 일면을 읽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최근 발간된 남시욱 교수의  6·25전쟁과 미국(청미디어, 2015)도 이 시기의 이승만의 행적을 파악하는데 유용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남침직후 이승만의 3, 72시간의 행적을 고찰하는데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남침 직후 이승만의 행적에 대해 과거에 잘못 알려진 것을 바로잡고

묻혀 있는 것을 새로 발굴하는 이승만 역사의 복원 작업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 역사에서 이승만이 제대로 된 역사 인물로 자리를 잡기를 기대 해 

본다.

나아가 이승만이 미국 명문대학(조지워싱턴·하버드·프린스턴)을 나온 당대의 뛰어난 

국제정치학자로서 국제정세를 꿰뚫고 있는 위대한 지도자인지아닌지를 

밝혀보고자 한다.

  

          글 정리 : 송 산 (한국 근현대사 연구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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