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蘇 바둑판의 '捨石' 신세였던 한반도
컨텐츠 정보
- 0댓글
-
본문
美·蘇 바둑판의 '捨石' 신세였던 한반도
침략전쟁의 죗값으로 동서로 분단되었던 독일과 달리 왜 일본이 아닌 우리가 희생물이 되었을까? 1945년 8월 14일 미국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빌미로 소련에 38도선 분할 점령을 제안했고, 다음 날 스탈린은 이를 수락했다. 이 때문에 미국이 반공 보루 구축을 위해 분단을 주도했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이는 사실에 반(反)한다. 역사의 시곗바늘을 되돌려 보자.
미국이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한 까닭은
얄타협정에서 스탈린이 참전 시점으로 언급한 8월 15일 이전에 전쟁을 끝내 소련의 팽창을 막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수수방관하지
않았다. 두 번째 원폭이 나가사키에 떨어지기 하루 전인 8월 8일 소련군은 대일 선전포고와 함께 두만강을 건넜다. 미군이 1000㎞ 남쪽
오키나와에 머물던 당시 스탈린은 한반도 전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그 대가로 극동함대가 태평양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소야(宗谷)해협 통항권이 걸린 홋카이도 북부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9월 12일 런던 외상회의에서 스탈린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격분한 스탈린은 9월 20일 북한에 단독정부 수립 지령을 내렸으며 10월에는 팔로군에 만주 점령을 명했다. 이듬해 국공내전에서
팔로군이 패퇴하자 스탈린은 1948년까지 반격을 위한 후방 기지로 북한을 내주었다. 북한이 중국 내전의 연장 지역이 된 상황에서 남북 분단은
움직일 수 없는 현실로 굳어졌다. 통념과 달리 분단의 주도자는 소련이었다.
미국과 소련 모두 한반도에 적대적인 국가가 들어서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누가 분단을 주도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소련이 남한과 홋카이도 반쪽을 교환하려 했던 사실과 미국이 극동방위선에서 남한을
제외했던 애치슨라인이 명증(明證)하듯 미·소 모두에 한반도는 대마를 잡기 위해 버릴 수 있는 바둑판의 사석(捨石)이었다는 불편한 진실이 38도선
분할의 아픈 역사를 우리가 곱씹어야 할 이유이다.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豫其懲而毖役患)'는 경구처럼 대비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평화다.
<조선일보> 허동현의 '모던타임스'에서
※ 미 소간의 3.8선 획정 과정연합국들이 대체로 전후 한반도에 대한 4대국 신탁통치안에 묵시적인 합의를 구한 상태에서 1945년
8월 들어 상황은 예상과 달리 급박하게 전개된다. 8월 6일 결국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8일에는 소련이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와 함께
만주 일대에서 강력한 남진을 개시하고, 9일에는 나가사키에도 원폭이 투하되면서 10일 일본은 천황제 유지를 조건으로 항복할 의사가 있음을
공식적으로 연합국에 통보하게 된다.
1945년 7월 16일 원폭 실험이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에도 미국 참모 본부는 1946년 후반
경에야 일본이 항복할 것을 예상했다. 그 과정에서 100만에 가까운 사상자가 생겨날 것으로 예측하고 소련군의 참전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소련의 대공세로 한때 무적의 관동군이라 불리던 만주 지방의 일본군은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로 소련 극동군 25군 주력이
만주를 공격함과 동시에 일부 군대가 두만강을 건너 북한 땅으로 들어왔고 9일에는 하산호(張鼓峰)로부터 경흥(慶興), 청학(靑鶴),
아오지(阿吾地) 등을 공격했다. 그리고 10일 경흥을 점령하고 웅기(雄基), 나진(羅津) 방향으로 진격하게 되었다. 10일까지
바다와 하늘에서 웅기, 나진, 청진(淸津)을 공격하고 있었던 태평양 함대는 작전계획을 변경해 11일 웅기, 12일 나진, 13일 청진에 상륙하여
각각의 도시를 점령했다. 16일에는 원산항에 상륙하였고 그 후 23일에 개성(開城), 24일에 평양(平壤), 27일에 신의주(新義州) 등
소련군선견대가 주요 도시를
점령했다.
한편 10일경 일본측이 천황제 인정을 조건으로 항복할 의사가 있음을 표명하자 미국은 즉시 항복 준비
작업에 들어가 10일 밤 국무성과 육군성, 해군성
실무자들이 모여 동남아 일본군은 영국, 중국내 일본군은 중국, 소련과 접전 중인 일본군은 소련, 일본 본토의 일본군은 미국에게 항복하도록
결정하면서 한반도에서는 38선을 경계로 이북은 소련군에, 이남은 미군에 항복한다는 지침을 결정했다. 그 안을 제시한 것은 육군성의 본스틸 대령과
러스크 대령이었다고 한다. 이 안이 8월 11일 확정되어 8월 15일
일반 명령 1호로 필리핀에 있던 맥아더 사령부로 전달되었고 영국과 소련에게도
통고되었다.
|
관련자료
-
이전
-
다음
가정회 은행계좌
신한은행
100-036-411854
한국1800축복가정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