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과 문명의 야만성 폭로--세계일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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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과 문명의 야만성 폭로"
하나님과 제국-종교와 폭력의 관련성 정면으로 거론
예수가 천명한 ‘하나님 나라’ 새롭게 해석
예수가 천명한 ‘하나님 나라’ 새롭게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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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최고의 혁명적 지식인으로 꼽히는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1892∼1940)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문명의 기록치고 야만의 기록이 아닌 게 없다”고 했다. 고통스럽지만 그의 단정은 부인하기 어렵다. 세계 각 나라 각 민족의 역사는 대부분 전쟁사와 겹친다. 심지어 세상을 창조한 신의 말씀을 기록했다는 ‘성서’의 창세기마저 첫 인간 아담 가정의 형제 간 살인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명명할 때만 하더라도, 소련만 망하면 세계평화가 올 줄 알았다. 하지만 소련은 해체됐지만 세상에 평화는 오지 않았다. 각국 지도자들은 너나없이 평화를 외치지만 전쟁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지구촌을 뒤덮은 종교인들은 모두 사랑과 평화를 내세우지만 세상은 점점 험악해져만 가고 있다. 왜 그럴까.
‘하나님과 제국’(존 도미니크 크로산 지음, 이종욱 옮김, 포이에마)과 ‘희생양은 필요한가?-성경에 나타난 폭력과 구원’(라이문트 슈바거 지음, 손희송 옮김, 가톨릭대출판부)은 세계 곳곳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전쟁과 테러, 각종 범죄의 근원을 캔 저서들이다. 특히 너무 벅차서인지, 보복이 두려워서인지 대부분 건드리길 주저하는 종교와 폭력과의 관련성을 정면으로 거론한다.
“나의 결론은 좋은 소식도 있고, 나쁜 소식도 있다는 것이다. 나쁜 소식은 우리의 문제가 인간의 문명만큼이나 심각하다는 것이다. 예수는 이 문제를 빌라도에게 ‘이 세상’의 폭력이라고 설명했다. 좋은 소식은 인간 문명의 폭력적인 정상성이 인간 본성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은 아니라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과 인간의 진화는 그 점에서 일치한다. 우리가 약 6000년 전에 큰 강의 범람원을 따라 문명을 창출했으니, 우리는 또한 그 문명을 없앨 수도 있다. 즉 대안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말이다. 기독교 신앙의 도전에서 우리는 변화된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데 협력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인간 진화의 도전에서 우리는 변화된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고, 만들고, 향유하도록 후기 문명에 초대되었다.”
예수의 생애와 사상을 연구해온 ‘역사적 예수 연구’의 선구자인 존 도미니크 크로산은 ‘하나님과 제국’에서 로마제국의 역사와 정치, 유대인과 유대교를 사례로 제국과 문명의 야만성을 폭로하고, 예수가 천명한 ‘하나님 나라’를 새롭게 해석한다. ‘승리에 의한 평화’를 추구한 로마의 제국신학과 ‘정의에 의한 평화’를 추구하는 하나님 나라를 대비시켜 오늘날 세계 정치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제국과 문명의 폭력을 꼬집는다.
“예수는 처음에 하나님의 임박한 강림을 말하는 세례 요한의 신학을 받아들였으나, 요한에게 일어난 일을 보고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신학으로 옮겨갔다. 요한은 하나님의 강림을 예상했지만, 하나님 대신에 안티파스의 기병대가 왔다. 요한은 처형되었고, 복수하는 하나님은 아직 오지 않았다. 아마 예수는 그것이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는 임박한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현존하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로마제국이 기원전 190년에 조성을 시작한 1만5000명 수용 규모의 히에라폴리스 원형극장 입구. 당시엔 이런 극장이 다수 건립돼 대중 집회를 자주 가졌다.
그는 오랜 시간 로마제국을 지탱해온 이데올로기적 힘의 근간으로 ‘종교, 전쟁, 승리, 평화’로 압축되는 로마의 제국신학을 도출해낸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추구한 평화는 ‘승리에 의한 평화’였고, 이는 필연적으로 반복적인 폭력의 확대를 불러왔다. 예수는 바로 이런 로마의 제국신학에 대항하여 ‘종교, 비폭력, 정의, 평화’로 대변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요한이 생각한 것처럼 부패한 세상을 모두 쓸어버린 뒤 도래할 하늘나라가 아니라, 예수와 함께 지금 이 세상에서 이미 시작되었고 신과 인간이 협력하여 완성해 나가야 할 실재였다.크로산은 툭하면 폭력으로 보복하는 하나님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실제로 성경에는 소수를 위해 힘과 폭력으로 다수를 ‘멸절시키는’ 노아식 해결책과 정의와 평화를 실천하는 소수를 통해 다수를 ‘변화시키는’ 아브라함식 해결책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노아식 해결책은 실패했고, 이후 하나님은 아브라함식 해결책으로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결국, 성경이 제시하는 것은 폭력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문명의 정상성과 맞서 싸우는 비폭력적 하나님이다.
저자는 이쯤 해서 기독교 국가인 미국의 제국화에 앞장서는 미국 기독교인 혹은 기독교도 미국인에게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성경을 먹고 자란 기독교인의 폭력이 어떻게 정당할 수 있느냐는 질책이다.
“고대 로마제국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했는데, 어떻게 우리가 새로운 로마제국인 미국에서 그의 충실한 신자가 될 수 있는가? 성경은 폭력적인가, 비폭력적인가? 성경을 먹고 자란 기독교인의 폭력이 새로운 로마제국이 되려는 미국의 오만한 폭력을 지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아가 이를 선동하고 있지는 않은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상. 예수는 억울하게 죽어가면서도 즉각적인 보복 다짐이나 응징보다는 ‘비폭력적 사랑’으로 대응했다.
“성경에 나타난 하느님의 폭력성은 단지 이념적 과장이나 한 시대정신의 발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인간의 폭력성이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슈바거는 “예수는 하느님의 진노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 의해서 ‘죄로 만들어졌다’. 사람들은 예수를 단죄하고 처형하면서 모든 악을 본능적으로 예수에게 전가하였고, 이렇게 그를 희생양으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예수는 자신이 당한 불의에 대해 비폭력적 사랑으로 대응하였고, 그럼으로써 악을 선으로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이에는 이로, 폭력에는 폭력으로’라는 구약시대의 정의가 아닌, 2000년 전 예수가 행한 신약시대의 ‘비폭력적 사랑’이 다시 요구되는 이유이다.
조정진 기자 jjj@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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