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이야기-12. 오성 李恒福과 한음 李德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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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12. 오성 李恒福과 한음 李德馨
오성 이항복(李恒福)과 한음 이덕형(李德馨)에 관한 설화. 오성과 한음은 조선 선조 때 명신으로, 어려서부터 친구로 지내면서 장난이 심하고 기지가 뛰어나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몇 개의 이야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오성의 담력 :
한음으로부터 한밤중에 전염병으로 일가족이 몰살한 집에 시체 감장을 부탁받은 오성이 혼자 그 집에 이르러 시체를 감장하다가 갑자기 한 시체가 벌떡 일어나며 볼을 쥐어박는 바람에 혼비백산하였는데, 알고 보니 시체인 체 누워 있었던 한음의 장난이었다는 것이다. 오성의 아버지는 오성의 담력을 시험하려고 한밤중에 외딴 숲 속의 고목나무 구멍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아 오라고 시키고, 먼저 가서 나무 구멍 속에 숨어 있다가 오성이 구멍 속으로 손을 넣을 때 안에서 그의 손을 잡았는데, 오성은 놀라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체온이 느껴지자 귀신이 아니고 사람의 장난임을 알았다는 것이다.
② 오성에게 똥을 먹인 한음 부인 :
오성이 한음 부인과 정을 통하였다고 한음에게 말하자 이 말을 들은 한음 부인은 오성을 초청해서 떡에 똥을 넣어 오성에게 먹이고, 거짓말을 하는 입에는 똥이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③ 오성의 선보기 :
오성은 신붓감을 선보려고 인절미를 해서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고 몽둥이로 자기를 쫓으며 때리라고 시킨 뒤 도망치는 체하며 신부의 치마폭 속으로 들어갔다. 신부는 이에 당황하지 않고 “선을 보려면 겉선이나 보시지 속선까지 보십니까.”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④ 한음의 참을성 :
오성은 우연히 도깨비를 만나 장차 정승까지 하리란 예언을 듣는다. 그리고 한음에게 변소에서 자기는 불알을 당기는 도깨비를 만나 예언을 들었다고 하며 변소에 가서 앉아 있어 보라고 한 뒤 노끈으로 한음의 불알을 매어 당겼다. 한음이 아픔을 참고 견디자 정승까지 하겠다고 말한 뒤 한음에게 변소에서 일어난 일을 본 것 같이 말하였다. 이에 한음은 비로소 오성에게 속은 줄 알았다는 것이다.
⑤ 오성과 대장장이 :
오성은 어려서 대장간에 놀러 다니면서 대장장이가 만들어 놓은 정(釘)을 하나씩 궁둥이에 끼어다가 모아 놓았다. 정이 하나씩 없어지자 대장장이는 오성의 장난인 줄 알고 불에 달군 정을 맨 위에 놓아 오성의 볼기짝을 데이게 하였다. 뒷날 대장장이가 곤궁하게 되자 오성은 모아 놓았던 정을 도로 주어 곤궁을 면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⑥ 권율과 오성 :
오성 집의 감나무 가지가 권율의 집으로 휘어 들어갔는데 이 가지에 열린 감을 권율 집에서 차지하자, 오성은 권율이 있는 방문에 주먹을 찔러 넣고 “이 주먹이 누구 주먹이오?” 하고 물었다. 권율이 “네 주먹이지 누구 주먹이겠느냐.”라고 말하자 감을 가로챈 일을 추궁하였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오성과 부인이 서로 골탕 먹이는 이야기 등이 많이 있다. <오성과 한음설화>는 어린이들의 기지와 해학을 통하여 인간의 약점과 인간의 본성을 신선하게 조명한 우리의 귀중한 해학 문학으로서 가치를 가진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에서
이항복(李恒福)[1556~1618]은 고려 말 대학자 익제(益齊)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白沙)이며, 오성 부원군에 봉해져 오성 대감으로 알려져 있다. 1556년에 서울 서부 양생방[남대문 시장 주변]에서 출생하였다[문인 박미가 지은『백사 연보』와 『북천일록』참조]. 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소년 시절에는 부랑배의 우두머리로 보냈으나 곧 학업에 열중하였다.
1580년[25세]에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영의정 권철의 아들인 권율(權慄)의 사위가 되었고,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1590년에 호조 참의, 1592년에 임란시[도승지] 왕비, 왕자, 선조를 호종하였다. 이때 이덕형과 함께 명나라 원병을 건의하기도 하였고, 명의 사신 접대를 전담하였다. 이조참판, 형조판서, 대사헌, 병조판서[7회], 이조판서[1회] 겸 홍문관 대제학·예문관 대제학[1595년], 우의정[1598년, 오성 부원군]을 거쳐 영의정[1600년]에 올랐다.
1613년[광해군 5]에는 벼슬에서 물러나와 노원[상계동 지역]에 머물렀고, 10월에 한음이 세상을 떠나자 직접 염하고 장례를 주관하였다. 1616년에는 망우리에 동강 정사를 짓고 동강 노인으로 자처하며 지냈다. 그 후 인목 대비(仁穆大妃)의 폐위를 반대하다 1618년에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었다가[1월],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5월, 63세]. 1618년 8월에 포천 선영 부 묘소 좌측 을좌에 안장되었다.
이덕형(李德馨)[1561~1613]은 1561년에 서울 남부 성명방[동자동]에서 출생하였다. 유년 시절 한때 경상도 상주의 진외가에서 부친과 지냈으나 6세경에 상경하여 도저동에서 살았다.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었고 침착하였으며, 문학에 통달하여 어린 나이임에도 교우를 청하여 양사언(楊士彦)[1517~1584]과 막역한 사이였다고 한다. 1580년[20세]에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李山海)의 사위가 되었다. 선조의 신임이 두터웠다.
1591년[31세]에 예조참판이 되어 대제학을 겸하였다[최연소 문형, 유성룡의 후임, 3회]. 임진왜란 때에 왜장을 직접 만나기를 시도하기도 하였고, 선조를 호종하였고, 명군의 파병을 성사시켰다. 이여송(李如松)의 접빈관으로 활동하였고, 대사헌, 한성 판윤을 거쳐 병조 판서[1593년, 2회], 이조 판서, 우의정[1597년], 좌의정, 영의정[1602년, 3회]을 지냈다. 1613년에는 영창 대군의 처형과 인목 대비 폐모론을 이항복과 함께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삭탈되었고, 용진[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에 한음 별서[백사·노계·휴정 등이 가끔 내왕함]를 짓고 물러나 있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문익(文翼)이었다. 남인 출신으로 북인 영수 이산해의 사위가 되어 중간노선을 지키다가 뒤에 남인에 가담하였다. 글씨와 문장이 뛰어났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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