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체적으로 보아야할 역사적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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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체적으로 보아야할 역사적 사실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Edward H. Carr)는 '과거의 사실'(fact of the past)과 '과거에 관한 사실'(fact about the past) 그리고 '역사의 사실'(historical fact)을 구분함으로써, 과거와 현재 사이의 역사학적 긴장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그가 주장하는 바는, 역사가는 '과거의 사실'에 접근하기 위해, 사료에 기록된 사실인 '과거에 관한 사실'을 재료로 삼아 연구하여 역사가 자신에 의해 재현된 '역사의 사실'을 구성해낸다는 것이다. 여기서 '역사의 사실'은 역사가의 당대적 상상력의 개입에 의해 재현된 또 하나의 '과거에 관한 사실'인 셈이다. 그리하여 그에게서 역사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대화'의 산물이 되는 것이다.
예수 연구사에서 이러한 긴장은 '역사의 예수' 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라는 이항 대립적 논제를 통해 이미 오래 전부터 제기된 바 있다. 전자가 과거의 사실에 초점이 있다면 후자는 그것의 현재화를 함축하고 있다. 여기서 예수와 (예수의 현재화의 주체로서의) 교회 사이에 예수 이해, 즉 예수 자신의 스스로에 대한 이해와 교회의 예수 이해 사이에는 '인식론적 단절'(epistemological berak)이 있었다는 것이다.
근대의 예수 역사학이 교회의 해석을 넘어 역사의 예수를 조명한다는 것은 이러한 인식론적 단절의 상황 속으로 개입해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시간의 방향에 거슬러서 케리그마적으로 해석되지 않은 예수를 조명하려 한다. 그것은 교회 이전으로 돌아가 '교회화된 예수가 아닌' '날 것 상태의 예수'를 찾아내려 하는 것이다. 요컨대 '예수 역사학'은 의도했건 아니건 '반교회주의'적 기조를 담고 있다.
♣ 마돈나와 아기(Madonna & Child)
장 푸케(Jean Fouquet) 마돈나와 아기(성모마리아와 아기예수)
모델은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의 정부 아네스로 추정됨
마리아가 십자가 아래에서 죽은 예수님을 안고 있는 장면이나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쓰러지면서 어린 시절 자신이 넘어졌을 때 마리아가 껴안아주던 것을 회상하는 장면에서도 느낄 수 있지만 예수님은 항상 마리아의 품 안에 있는 존재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는 묘사가 되고 있다.
또 마리아와 아들 예수님과의 관계를 패러디한 것으로 여겨지는 장면 곧 여성인 악마(사탄)의 품에 안긴 어린 마귀의 등장은 더욱 더 마리아와 ‘아들’의 관계를 상대적으로 강화시켜 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마지막 말씀을 하시고 돌아가실 때 십자가를 올려다보고 있던 마리아가 “내 살에서 나온 아들이요, 내 영에서 나온 자”(에머리히의 책에는 "the flesh of her flesh, the bone of her bone, the heart of her heart"로 기술되어 있음)라고 한 독백은 영화 속 여러 장면들에서 나타나는 모자관계를 결론지어주는 표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너무나도 반(反)성경적이며 특별한 ‘마리아와 예수’의 모자관계는 ‘마돈나와 아기’라는 관점에서 보면 충분히 수긍이 가게 된다.
천주교 국가로 알려진 나라에서는 한 여자가 아기를 안고 있는 동상을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다. 사실 루터의 개혁(Reformation) 이전의 모든 예술 특히 건축, 음악, 미술의 중심은 이 ‘마돈나와 아기’(Madonna & Child)로 가득 차 있다. 천주교도들은 물론 기독교인들까지도 마리아와 아기 예수로 잘못 알고 있는 이 ‘마돈나와 아기’의 뿌리는 옛 바빌론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는 이 어미(MOTHER, 계 17:5)라는 단어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로마라는 종교는 늘 ‘거룩한 어머니’(어미, 聖母, Holy Mother) 교회라고 불렀다. 천주교의 수많은 노트르담(Notre Dame/Our Lady/Maria/Semiramis) 사원(寺院, 절)들은 ‘아베 마리아’(Ave Maria)로 변신한 이 바빌론의 어미를 위해 건축되고 헌당되었다. 바빌론 종교는 구약에서는 사탄이 니므롯을 통해 여호와(LORD) 신앙을 대적하여 일어난 바빌론-“바빌론은 주의 손에 있어 온 땅을 취하게 한 금잔이라. 민족들이 그녀의 포도주를 마셨으므로 미쳤도다.”(렘51:7)-이며, 신약에서는 ‘신비의 큰 바빌론’(계17:5)으로 나타난다.
※케리그마 (Kerygma)
"선포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헬라어 낱말에서 나온 명사로서, 현대 개신교 신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용어이다
케리그마라는 용어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에 현대 개신교 신학의 중심점의 위치를 차지하였다. 첫째, 성서비평(Biblical Criticism), 특히 양식사 비평(Form Criticism)은 신약의 많은 부분이 케리그마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즉, 복음서의 내용은 객관적인 역사적 기록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의의를 선포한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선포의 뒤에 있는 진정한 역사적 예수의 상을 찾아내려 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기독교를 그와 같은 사실적인 데에 기초하려는 것은(자유주의 신학에서 하고 있듯이) 신약의 메시지 그 자체를 왜곡시킬 것이다. 둘째, 케리그마가 기본적으로 청중들에게, 이전의 자기 이해를 버리고 자신을 의롭게 된 죄인으로 받아들이라는 내용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은, 실존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신학자들에게 있어서는 실로 고무적인 일이었다. 왜냐하면, 케리그마는 사람의 지성에 호소하는 가르침이나 도그마가 아니라, 새로운 생활에의 부름이기 때문이다. 이는 지성의 동의를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결단을 요구한다.
이러한 실존주의(Existentialism)적인 경향 때문에 불트만(Rudolf Bultmann)을 비롯한 신학자들은, 신약성경의 케리그마는 지성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믿어야 하는 교리로 굳어질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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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관님의 댓글
참 바람직하지 아니한 관행들이 계속 됨에 대하여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어떤 글을 올려 놓고서 논쟁거리가 생기면 금방 삭제해 버리는 사태 얘기 입니다.
원리가 가르치는 말 그대로 모든 인간은 하늘부모님의 유일무이한 가치의 개성진리체인 까닭에 생각도 각각의 개성적일 수 있다는 점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것 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나의 견해와 다른 상대의 주장도 절대부정하는 습관은 곤란하디고 생각 합니다.
아마도 이 홈의 책임자는 '논쟁' 자체에 대하여 터부시하는 신념이 있으신가 봅니다.
그런데 이 홈의 활성화에는 '논쟁거리 이상의 묘약은 없다고 생각 합니다.
아울러 '삭제의 권한'은 복수의 위원회(홈관리 위원회가 엄존한데, 그곳의 합의 결정을 거치지 아니함)를 통한 '민주적 방식'으로 해야 한다고 이해 합니다.
사실 위 본문은 어느 분이 제 견해로는 상당히 '편향된 주장'을 하셔서 약간 간접적인 반대논리의 일환으로 소개하고자 했는데, 정작 문제의 그 글은 삭제 되었나 보네요.
글을 쓰신 분이 자진 삭제할 자유야 당연히 주어져야 겠지만, 몇일 전 저의 글의 일부처럼, 홈관리 책임자가 임의로(집행부 간부를 포함) 삭제 혹은 일부 가감한다면 '문제'라는 얘깁니다.
대단히 미안한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사이비 종교 집단이나 북쪽 김가 집단만이 유일사상에 젖어 따르는 사람들을 집단 최면에 빠뜨리며, 오로지 하나의 생각과 길 만을 강조한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현재의 집행부 이래 그 정기적이던 홈관리위원회 한번 열리지 아니함도 시정되어야할 사항이라고 여깁니다.
아예 폐기해 버리든가...
'살아있는 언론'이 요즈음과 같은 정보시대에는 이 홈과 같다는 점을 상기 시킵니다.
'야단법석' '백가쟁명'... 개성진리체의 살아있는 인간들의 활기찬 모습이지 다소 시끄럽다고 두려워 함은 자신이 없는 증좌 라고 비판받아도 할 말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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