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과 그 리더십3. 양녕대군과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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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과 그 리더십3. 양녕대군과 세종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반복되는 역사에서 배우는 교훈?
1. 양녕이 폐세자된 진짜 이유
양녕이 대궐을 빠져 나간 것은 태종 9년의 일이었다. 열여섯살 때 일인데 민무구의 사건이 있은 다음 해였다. 이때 태종은 이렇게 양녕을 꾸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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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의 행동은 짐승과 같으나 모반 하려는 죄는 절대 없으므로 가까운 곳에 두려 했는데 다시 이런 일을 저지르니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다음부터 일을 저지르면 이 애비가 상관하지 않겠다. 법대로 할 것이니 그리 알라』
이런 최후통첩을 한 뒤에 태종은 양녕에게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나는 네가 달아난 뒤에 너의 생사를 알지 못해 눈물을 흘렸고 충녕 또한 곁에서 눈물을 흘렸다. 만일 네가 충녕이었다면 충녕처럼 걱정했겠는가』
태종이 양녕을 세자 자리에서 폐위할 때 그 교서(敎書)를 보면 양녕이 폐위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9년 뒤인 태종 14년의 장인 김한로 사건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어진 사람으로 세자를 세우는 것은 고금의 대의요 죄가 있어 세자를 바꾸는 것도 국가의 당연한 법이다. 내가 일찍이 큰 아들 제(양녕)를 세자로 삼았더니 관을 쓸 나이(15세)가 되어도 글읽기(學文)를 좋아하지 않고 노래와 여자(聲色)에 빠졌다. 나는 그것이 나이가 어린 탓이라 좀더 나이가 들면 고쳐지리라 생각했었으나 나이가 20이 지나서는 도리어 뭇 소인들과 사통(私通)하여 방자하게도 옳지 않은 일을 저질렀다. 지난 해 봄에 일이 드러나서 죽은 사람이 몇이나 되었는데 양녕이 그 잘못을 글로 써서 종묘에 고하고 내게도 고하였으므로 진심으로 뉘우치는가 싶었다. 그러나 얼마 아니되어 또 다시 간신(양녕의 장인 김한로)의 음모에 빠져서 죄를 범하니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부자지간의 정에 못이겨 양녕은 그냥 두고 김한로만 내쫓았었다. 그런데도 양녕은 마음을 고치기는커녕 원망과 노여움을 품고 분연히 글을 올리니 그 말이 심히 거만하고 무례하였다』
김한로 사건은 외척 사건인데 사건 내용은 양녕의 장인 김한로가 세자궁에 여자를 들여 놓았다는 지저분한 사건으로 결국 아들과 함께 전남 나주로 귀양가게 된다.
그러나 태종이 세자 양녕을 폐하려 할 때 청백리의 대명사 황희(黃喜) 정승이 반대했다. 이 일 또한 양녕의 세자 폐위 사건의 의문점이다. 보통 반대한 것이 아니다.
『임금의 맏아들은 나라의 대들보나 다름없는데 그렇게 쉽게 그것도 근 15년이나 왕위 계승자로 계셨던 분을 하루아침에 폐위하는 것은 부당하다』
태종은 진노하여 황희를 외방으로 내 쫓아 6년간이나 귀양살이를 시켰다. 그런데 이때 단 한 사람 유정현(柳廷顯)이 태종에게 찬성했다. 별로 눈에 띄지는 않았던 유정현이 온 조정 대신이 반대하는 가운데 홀로 찬성해 태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세종이 즉위한 뒤 일약 영의정으로 발탁되었다.
황희정승은 태종의 미움을 사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6년 뒤 태종이 다시 그를 불렀다. 모처럼 서울에 나타난 황희정승의 옷차림은 남루하기 짝이 없었으나 사람들은 황희정승이 본시 그렇게 청렴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별로 그를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고 하며, 태종은 즉시 그를 예조판서로 임명했다고 한다.
태종은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세자 양녕은 이미 장성하였으나 행실이 좋지 않아 왕위 계승자로서 적합하지 않으니 부득이 그를 대궐 밖에서 살도록 하고 셋째 아들 충녕은 자못 그 성품이 총명하여 효도하고 우애하며 학문을 좋아해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이 모두 촉망하니 왕위 계승자로 세우기로 하였습니다』고 보고하였다.
2. 양녕의 불효와 세종과의 관계
태종은 세종에게 양위한 뒤 세종 4년에 승하하였다. 그 때 양녕은 경기도 이천에 귀양살이하고 있었는데 슬퍼하지도 않고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소주를 마셨다. 이천군수가 이날 소주를 마신 동네 사람들을 잡아다 벌을 주었는데 양녕은 화가 나서 세종에게 글을 올려 『이천군수를 처벌하시오. 그러지 않으면 형제간 정의가 끊길 것이오』라고 위협했다. 세종은 묵묵부답했다.
이처럼 양녕이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세자에서 대군으로 강등되어 경기도 이천에 귀양살이를 하게 되는데 세종은 서울 동쪽 대궐 밖까지 나가 양녕을 맞아 들여 연회를 베풀어 위로하였다. 이때 대간들이 맹렬히 반대하였으나 세종은 이를 무릅쓰고 동생이 형에 대해 해야 할 도리를 다하는데 나쁠 것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세종이 김종서에게 한 말 가운데 이런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다.
『만일 차례로 말하면 바로 내 자리가 양녕이 앉아야 할 자리 아닌가. 그런데 양녕 형님은 지금 시골에서 적적하게 귀양살이를 하고 있네. 더구나 일반 백성의 경우라도 형제 사이에는 잘못한 것을 서로 덮어 주고 잘한 것을 드러내줄 뿐 아니라 뇌물을 써서라도 끌어내주는 법인데 하물며 내가 일국의 임금으로서 형제간에 백성만 못한 짓을 해서야 되겠는가. 경은 이 뜻을 알아서 여러 사람에게 타이르라. 나는 형을 서울로 모셔서 만나 보도록 하겠다』
양녕대군이 한 번은 평안도를 유람하게 되는데 서울을 떠날 때 세종과 작별인사를 했다. 세종은 형인 양녕대군에게 『제발 여색을 조심하십시오』라고 당부하고 몰래 평안도 관찰사에게 명하기를 『만일 양녕대군이 기생을 가까이 하거든 즉시 그 기생을 역마에 태워 서울로 올려 보내라』고 하였다. 양녕은 세종과의 약속도 있고 해서 가는 곳마다 기생의 수청을 물리치고 근신하였다. 그런데 평양북도 정주에 이르렀을 때 양녕의 마음을 사로잡는 절세의 미인이 나타났다. 양녕은 이 여인을 보는 순간 첫눈에 반했고 그날로 동침하고 나서 귀신도 모르리라 자신했다. 그래서 시를 지어 하룻밤 풋사랑을 읊기를 『아무리 달이 밝다 하나 우리 두 사람의 베개를 들여다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밤바람은 어이해서 신방을 가린 엷은 휘장을 걷어 올리는가』라 하였다. 그러나 이튿날 정주수령은 이 기생을 역마에 태워 서울로 올려 보냈다. 세종이 명하기를 『너는 양녕대군이 읊은 시를 노래로 불러 익혀두라』 하였다.
양녕은 이런 사실도 전혀 모르고 유유히 서울에 돌아와 세종을 알현했다.
세종:“잘 다녀 오셨습니까. 제가 신신 당부한 말씀은 잘 지켜주셨는지요?”
양녕:“물론입니다. 어찌 어명을 어기겠습니까. 한 번도 여색을 가까이 한 일이 없습니다.”
세종:“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 제가 형님의 노고를 덜어 드리고자 가무를 준비하였습니다.”
양녕은 기생이 나와 노래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누군지 몰랐다. 그런데 가사를 들어 보니 자신이 지은 시구가 아닌가. 깜짝 놀란 양녕은 그만 땅에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세종은 웃으며 뜰에 내려와 형님의 손을 잡고 위로하면서 그날 밤 그 기생을 양녕댁에 보냈다고 한다.
※양녕대군에 대한 다른 시각
만일 양녕대군이 태종으로부터 왕위계승을 하였다면 조선 27명의 임금 중에서 누구보다도 훌륭한 임금이 되었을 것으로 보며 조선의 역사도 크게 달라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어떤 면으로 보면 동생인 세종(世宗)보다 더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인물이라고 본다. 사실 세종은 한글창제 혼천의, 해시계, 물시계, 측우기 등의 업적으로 역사에 크게 클로즈업 되었지만 53년간 재임 중에 몸이 너무 비대하고 건강이 좋지 못하여 매우 소극적인 정치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양녕대군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영특하여 장차 임금이될 훌륭한 자질을 갖추었다고 한다. 양녕대군의 약사(略史) 기록을 보면 15세의 나이에 왕세자로서 명(明)나라에 가서 황제를 만났던 사실이 있다. 명나라 황제는 몸소 무영전(武英殿)에 나와서 양녕대군의 손을 잡고 “이는 어진 왕자로구나” 하며 격려하고 “나는 너의 아버지와 같다”고 말하면서 칠언고시(七言古詩)를 지어 주었는데 그 시(詩)에서 “나이는 열다섯에 불과하나 재능은 성숙하였구나! 하고 극구 칭찬하였다.
장성하면서 대군은 아버지인 태종(太宗)의 왕권 다툼으로 야기되는 피바람나는 골육상쟁(骨肉相爭)을 보게 되고 정치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동생 충녕(후일 세종대왕)이 성군의 자질이 있음을 보고 스스로 세자(世子)자리를 양보하고 기행(奇行)을 일삼으며 주유천하(周遊天下)를 하게 된다. 양녕대군이 동생 충녕에게 세자자리를 양보한 것을 두고 후세의 뜻있는 선비들은 그의 큰 덕(至德)이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주(周)나라의 태백(泰伯)에 못지않다하여 “동방의 태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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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배님의 댓글
역사의 반복은 이루지 않으면 안될 꼭 필요한 것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이루기 위한 반복이라고 봅니다
아담 해와가 선악과 따먹고 타락하지 않고 생명과를 이루었으면
동시성의 역사는 없었을 것이기에 재반복 재도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생 60년이면 인격완성과 영인체완성을 할수있는데 6000년이 됐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생각과 행동 습관을 가지고 누가 가르처 주는 내용만 외워서 반복하면
똑같은 실패를 반복하게 되기 때문에 무엇이 잘못됐는지 점검하여 고처나가야 하지않을까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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