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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雲巖) 정두흠(鄭斗欽) 先生의 ‘손명사(損命詞)’ 紹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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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雲巖) 정두흠(鄭斗欽) 先生의 ‘손명사(損命詞)’ 紹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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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一  

어떤 객이 와서 전하길 나라가 없어졌다 하기에

미칠듯한 심사에 눈물 흘리며 처참해지네

발꿈치 들고 어찌 청산의 흙을 밟으랴

문 걸어 닫고 대낮의 하늘을 보지 않네

 

有客來傳無國報(유객래전무국보)

癲狂心事淚凄然(전광심사루처연)

擧跟寧蹈靑山土(거근영도청산토)

閉戶不見白日天(폐호불견백일천)

 

황제를 업고 죽은 육수부의 정충에 부끄럽고

진나라 물리친 제나라 노충련의 대의를 생각하네

나라가 망함은 용납이 어렵고 구제할 수 없는 죄이니

이 몸 죽어 선현을 따르니만 못하리라

 

負帝貞忠慙陸秀(부제정충참육수)

攘秦大義憶齊連(양진대의억제련)

國破難容無求罪(국파난용무구죄)

莫如身死逐先賢(막여신사축선현)

 

第二

나라에 이 몸 의탁한지 몇 년 되었나

임금 사랑으로 늘 태평전승 빌었건만

굶주린 호랑이 목에 걸린 마지막 참상

하루아침에 오랑캐 손에 끝장이 났네

 

許國斯身問幾年(허국사신문기년)

愛君每祝太平宴(애군매축태평연)

一朝盡人洋夷手(일조진인양이수)

末境殘傷餓虎咽(말경잔상아호인)

 

예의와 의리 가련하다, 기자(箕子) 성인의 강역

그 누가 회복하랴, 조선하늘 사람 도리

사직이 무너졌으니 이 몸도 순신(殉身)하리라

신하로서 선제(先帝) 받들어 황천에서 살아가리.

 

禮義可憐箕聖域(예의가련기성역)

彛倫誰復漢陽天(이륜수복한양천)

屋社無歸身可殉(옥사무귀신가순)

下倍先帝地黃泉(하배선제지황천)

 

1) 전광(癲狂) : 미칠 전, 미칠 광

2) () : 발꿈치 근, (): 뛸 도

2) 육수부(陸秀夫) : 중국 남송 때의 정치가(1238~1279). 장세걸(張世傑)과 함께 집정하여 끝까지 원나라와 싸웠다. 지정(至正) 16(1279)에 애산(厓山)이 함락되자 위왕을 업고 함께 바다에 투신하여 죽었다.

3)攘秦大義憶齊連(양진대의억제련) : 노련(魯連)으로도 불린다. 전국 시대 제()나라 사람. 높은 절개를 지닌 선비로, 어려운 일을 풀고 분규를 해소하기를 좋아했다. 조효성왕(趙孝成王) 7년 조나라에 갔다가 진()나라가 한단(邯鄲)을 포위하는 위기를 만났다. ()나라 사신 신원연(新垣衍)이 진소왕(秦昭王)에게 황제가 될 것을 주청하자 그 이해관계를 따져 말하며 결코 진()나라가 황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면서 그렇게 된다면 차라리 동해 바다에 빠져 죽겠다(連有踏東海而死耳)고 하면서 조()나라의 평원군(平原君)을 설득했다.

 

마침 위나라 구원병이 오자 진()나라 군대가 철수했다. 그 후 제()나라 장군 전단(田單)이 제나라 땅을 회복하려고 요성(聊城)을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가 연수장(燕守將)에게 이해관계로 설득하니 싸우지 않고도 항복을 받아냈다. 전단이 제나라 왕에게 말해 상으로 작위를 주려고 했지만 바닷가로 달아나 여생을 마쳤다. 저서에 노중련자(魯仲連子)가 있었지만 없어졌고, 지금은 편집본만 전한다.

 

정두흠(鄭斗欽:18321910)선생은 장흥군 유치면 운월리 출신으로 1910년 경술년 한일합방 때 순절(殉節)한 애국지사이다.

 

젊은 날에 능주 開天寺등에서 공부하였고, 장흥부사 金箕晳의 눈에 띄었다. 16세에 남주독보(南州獨步)로 칭송받았으나, 1879(48)에 문과(을과 7)급제하였고, 1887년에 사헌부 지평, 宗廟大祭 대축관 등을 지냈다. 1892(61)걸해골(乞骸骨)로 사직을 구하고, ’귀전사(歸田辭)’와 더불어 은퇴하였다.

고향 운월리에 망화대(望華臺), 망화정을 세우고, 한양 조정과 나라를 걱정하며 인근에서 모인 제자들을 가르쳤다.

 

<운암집>에 당대 명망가, 판서, 고관이 등장한다. ‘민영환산정(山亭)에서 시회를 했다. ‘화서 이항로(1792~1868), 조성하(1845~1881). 이건창(1852~1898)’ 등과 종유 또는 교류하였다, 그 무렵 장흥부사 이학래, 이용태, 박헌양도 나온다. 몇 장흥출신 선비들과의 교류사정, 만시(挽詩)<운암집>에 등장한다. 그는 기울어가는 나라를 지켜보면서 上萬言疏, 請罷賣官疏, 請嚴邦憲疏등으로 그 나름 弊政改革을 주장했고, 憂國唱義 悲嘆詩도 여럿 남겼다.

 

<雲巖集>에는 6만시(挽詩)가 실려 있다. 국난수습에 애쓰다 돌아가시거나, 을사조약 울분으로 자결한 선현들, ‘신헌(1810~1884), 조병세(1827~1905), 민영환(1861~1905), 송연재(1836~1905), 홍만식(1842~1905), 김봉학(1871~1905)등이다. 매천 황현(梅泉,1855~1910) 역시 민영환, 홍만식, 조병세, 최익현, 이건창을 기리는 오애(五哀)를 남겼다.

 

雲巖1906년에 자결한 면암 최익현(1833~1906)’에 대해 憶勉庵淵齋(최익현,송병선) 兩先生도 남겼다. 雲巖 선생 당신도 결국 1910,10,25庚戌國恥 恥辱 앞에서 음독 자결하였다. 그 마지막 길에 손명사(損命詞) 2를 남겼다, “國破難容 無救罪 莫如身死 逐先賢(국파망국을 용납할 수 없거늘, 를 구할 수도 없으니, 先賢 따라 죽는 것보다 나을 일 없네)”라고 하셨다. 그 부인 韓氏國破夫死인데, 吾何獨生하리요라면서 같은 방법으로 뒤따랐다. 雲巖손명사(損命詞)’梅泉絶命詩 4對比될 수 있다.

 

雲巖 선생은 문과급제자 國祿之臣으로 제도권 관료인 반면에, 梅泉 선생은 司馬試에 그친 草野 선비라는 차이점이 있기에, 서로 지향점이 달랐던 것 같다. 雲巖은 군왕 측신으로서 忠君輔國, 梅泉은 지식인으로서 識者仁義에 가치를 더 두었다. 어쨌거나 梅泉의 직설 필치와 <梅泉野錄>의 명성을 감안하더라도 雲巖 선생과 손명사(損命詞)는 세간에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심지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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