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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36. 백제의 충신 계백(階伯)장군과 성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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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36. 백제의 충신 계백(階伯)장군과 성충

 

1. 계백(階伯) 장군 <출생? 사망660(의자왕 20)>

요약 : 황산벌에서 나당연합군을 방어하다가 패하여 죽었다.

계백은 기울어져 가는 백제를 구하고자 결사대 5,000명을 뽑아 거느리고 황산벌 싸움에 나갔다. 출전하기 전에 자기의 처자들이 패전 뒤 노비가 되어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 하여 미리 자기 손으로 죽였으며, 자신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굳게 맹세했다.

그가 이끄는 결사대는 신라 김유신의 5만여 군사와 4차례나 싸워 이겼다. 그러나 결국 나이 어린 화랑 반굴·관창의 전사로 전의를 불태우며 노도처럼 밀려드는 신라군을 당하지 못하고 패배,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근래에 복원된 계백장군의 묘, 충남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나당연합군의 침입

554년 성왕(聖王)이 관산성(管山城)에서 전사한 뒤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매우 나빠졌다. 641년 의자왕(義慈王)의 즉위 이래 백제는 고구려와 제휴하면서 신라를 자주 공격했다. 그러나 고립된 신라가 당나라와 협력하여 고구려·백제 두 나라를 노리면서 상황은 크게 변했다.

 

더욱이 의자왕의 실정으로 국내가 혼란해지고, 고구려가 연개소문의 정변 등 국내 문제로 백제와의 동맹에 소극적으로 되자 백제의 위기는 점차 현실화되었다. 결국 660(의자왕 20) 소정방(蘇定方)과 김유신(金庾信)의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炭峴)과 백강(白江)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왕은 유배되어 있던 흥수(興首)를 불러 대책을 물었다. 흥수는 신라군을 탄현에서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부패한 대신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따라서 백제군은 요충지를 잃고 패배했다.

황산벌전투

 

<충남 부여읍에 있는 계백 장군 동상>

계백은 기울어져 가는 백제를 구하고자 결사대 5,000명을 뽑아 거느리고 황산벌 싸움에 나갔다. 출전하기 전에 자기의 처자들이 패전 뒤 노비가 되어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 하여 미리 자기 손으로 죽였으며, 자신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굳게 맹세했다. 병사들에게도 "옛날에 월왕(越王) 구천(句踐)5,000명의 군사로 오왕(吳王) 부차(夫差)70만 대군을 무찔렀다. 오늘 각자 분전하여 승리를 거두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라"고 격려했다. 그가 이끄는 결사대는 신라 김유신의 5만여 군사와 4차례나 싸워 이겼다. 그러나 결국 나이 어린 화랑 반굴(盤屈관창의 전사로 전의를 불태우며 노도처럼 밀려드는 신라군을 당하지 못하고 패배,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이 패전으로 백제는 마지막 희망마저 잃고, 나당연합군에게 사비성이 함락됨으로써 멸망하고 말았다. 백제의 멸망은 결과적으로 고구려를 고립시켰으며 고구려의 멸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나라를 위해 장렬한 죽음을 택한 계백의 생애는 후대인들에게 높이 칭송되었고, 특히 조선시대 유학자 서거정(徐居正)은 백제가 망할 때 홀로 절개를 지킨 계백의 행동을 높이 평가하여 "나라와 더불어 죽은 자"라고 칭송했다.

 

부여 의열사(義烈祠연산 충곡서원(忠谷書院)에 제향 되었다.

 

2. 성충 (成忠)

일명 정충(淨忠)’이라고도 한다. 656년 좌평(佐平)으로 있을 때 왕이 신라와의 싸움에서 연승하여 자만과 주색에 빠지자 국운이 위태로워짐을 극간하다가 투옥되었다.

옥중에서 단식을 하다가 죽음에 임박하여 왕에게 글을 올리기를 충신은 죽더라도 임금을 잊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죽으면서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신이 항상 시세의 흐름을 볼 적에 멀지 않아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그때 군대를 사용함에 있어서는 그 지리적 조건을 잘 이용하여야 하는데, 강 상류에서 적병을 맞이하면 나라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만일, 적군이 쳐들어오면 육로로는 탄현(炭峴)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에 못 들어오게 한 뒤,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싸우면 틀림없이 이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결국 660년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수도 사비(泗沘)로 쳐들어오고, 당나라 군대도 기벌포를 지나 사비성으로 쳐들어와 백제는 멸망하였다. 왕은 그때서야 성충의 충언을 따르지 아니한 것을 후회하였다. 현재 부여에서는 그를 흥수(興首계백(階伯)과 함께 삼충사(三忠祠)에 모시고 제사를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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