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이야기-35. 연개소문(淵蓋蘇文), 당나라와 숙명적 대결을 펼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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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35. 연개소문(淵蓋蘇文), 당나라와 숙명적 대결을 펼치다
연개소문(淵蓋蘇文), 당나라와 숙명적 대결을 펼치다
▲ 반대파를 물리치고 최고의 권력을 차지한 연개소문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아버지는 연태조(蓮胎祚), 할아버지는 연자유(淵子遊)로 그의 집안은 고구려에서 높은 벼슬을 지낸 명문가였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개소문이라는 이름은 '갓 쉰'이라는 뜻으로, 그의 아버지 연태조가 쉰 살이 되었을 때 얻은 늦둥이라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또한 중국 역사서와 《삼국사기》에서는 그의 성(姓)을 연(淵) 대신 천(泉)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당나라 고조의 이름인 이연(李淵)의 '연' 자와 겹치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연개소문의 아버지 연태조는 고구려의 수상격인 대대로(大對盧)를 지냈는데, 그가 죽으면서 아들 연개소문에게 직위를 세습하려고 했다. 당시에는 관직의 직계 세습이 가능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여러 부족의 연합으로 탄생한 고대 국가로 관직을 세습하기 위해서는 부족장들의 재가가 필요했다. 그런데 여러 부족장들은 연개소문의 품성이 잔인하고 포악하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이에 연개소문은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다. 만약 자신이 직위를 계승한 후에 올바르지 못한 행동을 했을 때에는 여러 부족장들이 직에서 물러나라고 요구해도 반발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했다. 결국 이러한 태도는 반대파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연개소문은 간신히 대대로의 직에 오르게 되었다.
이때 고구려의 왕은 영류왕(榮留王)이었다. 고구려 27대 왕인 영류왕은 평원왕(平原王)의 둘째 아들이자 영양왕(嬰陽王)의 이복동생으로, 영양왕이 후사 없이 죽자 618년(영류왕 1) 왕위에 올랐다. 이 해 중국에서는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되었다. 영류왕은 당나라와 화친을 맺고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가려고 했다. 고구려가 수나라의 침략을 막아내기는 했지만, 전쟁이 남긴 상처는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래서 영류왕은 전쟁보다는 화친의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만약에 있을지도 모를 당나라의 침입을 경계하기 위해 요동 지역에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쌓았다. 천리장성의 축조 기간은 631년(영류왕 14)부터 646년(보장왕 5)까지 무려 16년이었다. 영류왕은 천리장성의 축조 책임을 연개소문에게 맡겼다.
그런데 연개소문은 영류왕과 달리 당나라에 대한 화친보다는 강경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다 보니 대당 외교 정책에 있어서 영류왕과 종종 의견 충돌이 있었다. 그것은 영류왕의 국정 운영에도 큰 부담이 되었다. 그러자 평소 연개소문을 경계하던 조정의 대신들이 그를 제거하도록 영류왕을 부추겼고, 마침내 영류왕은 연개소문을 죽일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미리 간파한 연개소문은 역으로 영류왕과 반대파들을 먼저 공격했다. 642년(영류왕 25), 연개소문은 자신이 지휘하는 군대의 사열식을 핑계로 술과 음식을 차려 놓고 여러 대신들을 초대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반대파들을 모두 죽였다. 이때 죽은 사람이 10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반대파 제거에 성공한 연개소문은 내친 김에 궁으로 쳐들어가 영류왕마저 죽이고 새 왕을 세웠다. 그가 바로 고구려의 마지막 왕 보장왕(寶臧王)이다. 보장왕은 영류왕의 조카로 연개소문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연개소문은 스스로 대막리지(大莫離支)에 오른 후 조정의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 당나라와 고구려의 관계
당나라는 선비족(鮮卑族) 출신인 고조(高祖) 이연(李淵)이 세운 나라다. 수나라는 고구려에 대한 무리한 원정으로 멸망을 자초했다. 반면 수나라에 이어 등장한 당나라는 고구려와 화친을 맺고자 했다. 영양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영류왕 역시 전쟁보다는 평화를 원했기 때문에 영류왕 재임 기간에는 두 나라 사이에 별다른 충돌이 없었다.
영류왕은 두 나라의 관계 정상화를 위해 수나라의 전쟁 포로 1만여 명을 당나라로 돌려보내는 등 적극적인 우호정책을 펼쳤다. 또한 626년(영류왕 9)에 고조의 차남인 이세민(李世民)이 당나라 2대 황제 태종에 오른 후에는 고구려 지도인 〈봉역도(封域圖)〉를 선물하기도 했다. 바로 이런 점들이 대당 강경파들의 반발을 샀다. 지도를 건넨다는 것은 적에게 군사기밀을 노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류왕은 당나라 태종이 보낸 사신이 고구려에 묻혀 있는 수나라 병사의 위령제를 지내고 고구려의 전승기념비를 허무는 것까지 허락했다. 대당 강경파들의 눈에는 이것이 고구려가 거둔 승리의 역사마저 부정하는 굴욕적 처사로 비춰졌다.
그러던 중 대당 강경파의 거두인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하니 고구려의 대당 정책이 강경책으로 변하였다. 당나라 태종은 이를 빌미로 고구려 정벌을 계획했다. 그러나 조정의 일부 대신이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반대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편 당나라가 중원의 새로운 패권자로 등장한 가운데, 고구려, 신라, 백제 세 나라는 계속해서 영토 분쟁을 겪으며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백제와 신라는 대당 강경파인 연개소문이 고구려의 정권을 장악하자 앞으로 닥칠 정세의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특히 신라는 백제와의 전쟁에 지쳐 있던 터라 고구려와 동맹 맺기를 바랐다. 신라의 선덕여왕은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로 보내 함께 백제를 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김춘추와 마주한 권력자 연개소문은 이를 거절했다. 고구려가 수나라와 전쟁을 치르는 동안 신라가 조금씩 침범하여 가져간 땅을 내놓지 않으면 동맹을 맺을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백제에서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의자왕은 성충(成忠)을 보내 동맹 맺자고 제안했고, 고구려는 이를 받아들였다. 고구려와 백제의 동맹은 신라에게 커다란 위협이었다.
▲ 연개소문, 당나라와의 전쟁에 돌입하다
고구려와의 동맹이 결렬되자 신라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백제가 우리의 40여 성을 점령하고 고구려와 연합해 조공하는 길을 막으려 한다."라며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당나라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신라와 화친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이런 요구를 받아들일 리 없었고, 심지어 사신을 가두기까지 했다. 이러한 연개소문의 강경한 태도에 화가 난 당나라 태종은 마침내 고구려 원정을 결심하였다.
644년(보장왕 3), 당 태종은 "고구려의 개소문이 임금을 죽이고 백성을 학대하니 인정상 이를 참을 수 없다."라고 밝히고, 원정대를 꾸려 고구려 공격을 명했다. 당의 고구려 원정대는 수나라의 대군과는 달리 정예부대로 꾸려졌다. 당시 당나라의 원정 병력에 대해서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형부상서 장량(張亮)을 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강(江)·회(淮)·영(嶺)·협(峽)의 군사 4만 명을 거느리게 하고,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에서 군사 3,000명을 모집했으며, 전함 500척은 내주(萊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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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관님의 댓글
섭리사 내외적으로 '역사의 교훈'은 그 의미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고 생각 합니다.
민족적으로나 섭리적으로 오늘의 상황은 매우 중요하고, 따라서 과거의 역사가 가르쳐주는 교훈이 그 만큼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분초를 다투는 정보시대에 요즈음은 긴 글이 인기가 없고 카톡대화방이나 밴드가 주류를 이루기 때문에 이곳 역시 외면당하기 십상입니다.
그러함에도 고집스럽게? 연재의 글을 올리는 이유는 '기록'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싶기도 합니다.
설교로서가 아니라 '대1800축복가정회'의 체면문제라고 감히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하고 싶은 얘기에 굶주리시는 자매형제님들이 많으실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처한 상황은 저 북쪽의 동토의 땅처럼, 얼음장 같은 분위기 일지도 모릅니다.
신심이 깊으신 분들께는 대단히 송구스러운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믿음은 고민하고 따지는곳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절대 복종과 신앙이라고 학습되어온 우리들이기에...
저의 당돌한 이런 견해를 회초리로 꾸짖어 주는 '관심'이라도 기대하고 싶습니다.
가섭의 미소를 감사하고 기대하는 文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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