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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26. 조선 임진왜란의 피로인 (被虜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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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26. 조선 임진왜란의 피로인 (被虜人)

임진왜란의 피로인 (被虜人)

피로인이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에 의해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들로, 일반적으로 조선에서는 피로(被虜), 피로조선인(被虜朝鮮人), 부로(俘虜), 부인(俘人)으로 불렀는데, 전쟁 중에 사로잡힌 사람을 뜻한다. 일본에서는 이케도리(), 포로(捕虜)라고 하는데, 포로란 전쟁에 참가한 군인을 지칭하므로, 전쟁 중에 일본군에 끌려간 민간인의 경우는 피로인(被虜人)이라고 부른다.

 

1. 내용

현재 조선피로인의 숫자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일본학자는 2-3, 한국학자는 10만에서 40까지 추정하고 있다. 조선피로인의 피랍이유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였다. 첫째, 전투중에 잡혀서 끌려간 경우, 둘째, 전투지역에서 군량수공·축성·잡역 등의 사역을 위한 경우, 셋째, 일본내에서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한 경우, 넷째, 도공등 기술자의 납치, 다섯째, 여자와 동자(童子) 중에 미모와 재능이 있는 경우, 여섯째, 전쟁 중에 일본인에게 협력한 경우, 일곱째, 노예매매를 목적으로 한 경우 등 다양하다.

 

일본에 끌려간 이후의 거주지역은 조선침략에 참가했던 다이묘(大名)들의 출신지역과 구주지역이 제일 많았고, 쇄환(刷還)된 피로인들은 조선사절의 사행로 주변에 많이 살았다. 피로인의 쇄환은 1604년 이전에는 강화를 요청하는 대마도 사절에 의해 주도되었고, 그 이후에는 탐적사(探敵使),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 통신사(通信使) 등 조선사절단에 의해 주도되었다. 쇄환된 피로인은 6천명을 넘지 않는데, 대마도사절에 의해 768, 탐적사 및 회답겸쇄환사에 의해 4,885, 통신사에 의해서는 14명이 돌아왔다.

 

2. 의의와 평가

쇄환 인원이 적은 이유는 일본측의 비협조적인 태도, 귀국을 원치 않는 경우, 조선정부의 피로인 정책부재, 피로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 소외 등이었다. 조선사회에서는 유교적 가치관에 의해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돌아왔다는 자체가 차별과 멸시의 대상이 되었다. 절의를 강조했던 가치관에서 조선사회에서는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또한 양반 중심의 신분제사회에 쇄환된 평민이나 천민이 설 자리는 없었다. 이 점에서 조선왕조의 피로인 쇄환정책은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3. 강항(姜沆)<간양록 看羊錄>

간양록(看羊錄)은 퇴계 이황의 문인 수은(睡隱) 강항(姜沆, 1567~1618)이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혀가 일본에서의 포로생활 경험과 현지 사정을 기록한 책이다. 기간은 15979월에서 16005월까지 약 28개월이다.

 

강항은 정유재란 때 분호조판서(分戶曹判書) 이광정(李光庭)의 종사관으로 전라북도 남원에서 군량보급에 힘쓰다가, 남원읍성이 함락된 뒤 고향인 영광으로 돌아가 김상준(金尙寯)과 함께 의병을 모집했다.

 

그러나 영광 인근 지역 또한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지자 가족을 데리고 바닷길로 남쪽으로 내려가던 중 적선을 만나게 되었다. 같이 가던 형제자매들이 바닷물에 뛰어들었으나 일본군이 끌어 올려 포로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강항은 부친이 탄 선박과 멀어지게 되었고, 그의 형제와 가족은 일본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의 일행은 이송되던 중 배 위에서 심한 갈증에 시달리던 어린 조카의 죽음을 목격했다.

 

<간양록>의 내용 일부

(1597914) 적은 이미 영광군을 불 지르고 산과 바다를 샅샅이 뒤져 사람들을 마구 찔러 죽였다. 나는 밤 열 시쯤에 배를 탔다.

 

(920) 해상의 왜선(倭船) 1천여 척이 이미 우수영에 당도했으므로 통제사는 중과부적으로 전략상 바다를 따라 서쪽으로 올라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중략)

 

(923) 대낮에 당두에서 또다시 논잠포로 향했으나 아버지께서 행여나 논잠포에 계신가 해서였다. 이때 안개 속에서 괴이한 배 한 척이 문득 나타나 쏜살같이 달려오니 사공이 놀라 왜선이라고 외쳤다. 나는 순간 포로가 될 위기를 벗어날 길이 없다고 생각해 이내 옷을 벗고 물속에 몸을 던졌다. 처자 형제 등 배의 남녀 태반이 나를 따라 함께 물에 투신했다. 그러나 물가라 물이 얕아 적이 모두 건져내어 배에 눕히고 꽁꽁 동여 세웠다.

 

(924) 무안현의 한 해안가에 당도하니 땅 이름을 낙두(落頭)라고 했다. 이곳에는 적의 배 수천 척이 항구에 가득차서 붉은 기와 흰 기가 햇빛 아래 비치고, 우리나라 남녀가 반 수 이상 뒤섞여 있다. 양옆에는 어지러이 쌓인 시체가 산과 같고, 울음소리는 하늘에 사무쳐 파도와 같이 출렁이는 것 같았다. (중략)

 

둘째 형님의 아들 가련(可憐)은 나이가 여덟 살인데, 주리고 목말라서 짠 물을 마신 까닭으로 구토 설사하여 병이 나자, 적이 물속에 던지니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가 오래도록 끊어지지 아니했다.

 

강항은 일본 도착 후 오쓰성(大津城)에 갇혀 있다가 오사카를 거쳐 교토 후시미성(伏見城)으로 이송되었다. 강항은 그곳에서 승려이자 학자인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와 교유했으며, 사서오경을 일본어로 번역 간행하는 일에 참여하는 등 일본 주자학 발전에 기여했다. 훗날 일본 주자학의 태두가 되는 후지와라는 강항으로부터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

 

강항은 3년에 가까운 포로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의 정세와 사회상을 습득하고 정리하여 본국에 알렸다. 그는 후시미성에 억류되어 있을 때부터 현지의 관호(官號)와 형세 등을 적어 인편으로 서울에 보내고 있었다. 특히 학식이 높은 승려 요시히토(好仁)와 친교를 맺고 그에게 유학을 가르쳐 주는 한편 그에게서 들은 현지의 지리, 군사시설, 관제를 비롯한 정세와 정황을 비밀리에 인편으로 고국에 보고했다.

 

1600년 강항은 포로생활에서 풀려나 가족들과 함께 귀국했다. 강항이 적지에서 지켰던 절의와 그가 보낸 일본 관련 자료의 의미를 평가한 조정은 1602년에 그를 대구교수(大丘敎授)로 임명했다. 그러나 강항은 포로의 신세가 되어 죽음으로 절의를 지키지 목한 자신을 스스로 죄인이라 하여 얼마 후에 사임했고, 1608년에 순천교수(順天敎授)에 임명되었을 때에도 취임하지 않고 고향에서 독서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강항은 포로 시절에 보고 들은 바를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책을 건거록(巾車錄)’이라 이름 했다. ‘건거란 죄인이 타는 수레라는 뜻이다. 포로가 된 자신은 죄인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이름 지었다.

 

책은 일본 현지의 정세를 적어 고국에 있는 임금에게 올린 적중봉소(賊中封疎), 일본의 관직, 지도, 장수들의 특징 등을 기록한 적중견문록(賊中見聞錄), 귀국 후 조정에 올린 예승정원계사(詣承政院啓辭), 일본에서의 생활을 기록한 섭란사적(涉亂事迹), 귀환할 때 현지에 남아 있는 포로들에게 준 격문(檄文)인 고부인격(告俘人檄)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항 사거 후에 그의 제자 윤순거가 1654년에 편집하여 1656(효종 7)에 발간할 때 책의 제목을 간양록(看羊錄)’으로 고쳤다.

 

조용필의 간양록’ <작사:신봉승 작곡:조용필>

 

이국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서리고

어버이 한숨 쉬는 새벽 달일세

마음은 바람따라 고향으로 가는데

선영 뒷산에 잡초는 누가 뜯으리

어야어야어야 어야어야어야

어야어야어야 어야어야어야

 

피눈물로 한줄한줄 간양록을 적으니

님그린 뜻 바다되어 하늘에 달을 세라

어야어야어야 어야어야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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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정해관님의 댓글

 내외적인 혼란기일 수록 역사의 교훈은 질곡을 헤쳐 나가는데 매우 유용한 나침반이라고 생각합니다.

딱히 하는 일도 없는 산촌의 초로 인생이 역사에 흥미와 관심을 갖고 오늘의 난국(특히 우리 종단)에서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는 중국과 일본에 당했던  가슴아팠던 사연들이, 선민 유대민족은 우리와는 비교 불가능했던 슬픈 역사가 사랑방 이야기로, 한 뿌리의 3종교 이야기로 소개하고 싶은 사연들 입니다. 동기야 어쨌거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이존형님의 댓글

정해관형제님 꾸준히도 여전하십니다요.

그 정열이 어디서 나온답니까?

 

피로인이란 낱말을 처음 들어보군요.

그런 사연이 담긴, 선조들의 아픔과 애증이 담긴 것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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