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이야기-27. 양대 胡亂과 환향녀還鄕女 (화냥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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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27. 양대 胡亂과 환향녀還鄕女 (화냥년)
양대 胡亂과 환향녀還鄕女 (화냥년)
인조는 정치나, 특히 외교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 당파 싸움에 휘말려 왕이 된 임금으로 서인들이 하자는 대로만 할 수 밖에 없었고 서인들이 권력을 잡고자 반역을 한 명분은 광해군이 배은망덕 하게도 명나라와 손을 끊고 오랑캐 인 후금(청)과 손을 잡으려 했다는 것이니 인조 반정 후에도 계속 다 망해가는 명나라를 받들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다 평안도를 지키던 이괄이 자신의 자존심 문제로 난을 일으켜 국경 방비가 소홀해졌고, 이는 곧 후금의 침략으로 이어졌다.
1.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년 후금은 그렇지 않아도 자기네와 우호적이던 광해군을 퇴위 시키고 친명파들이 정권을 쥔데 대한 불만으로 군사를 일으켜 조선을 침략했다.
그러나 인조가 강화도로 재빨리 피난을 가자 후금은 사신을 보내 명나라의 장수를 자신들에게 보내고 명나라를 치는데 군사를 보태어 명과 손을 끊은 것을 실증으로 보여 달라고 했다.
그러자 다급해진 조선의 조정에서는 후금이 명나라와 적대하지 않으면, 후금과 형제의 약속을 하겠다는 어정쩡한 답을 보냈다.
그러나 명은 사실상 망하는 나라였으니 명나라를 적대시 하고 말것도 없었고, 아직까지 자기네 후금을 오랑캐 취급하던 조선 조정에서는 오랑캐라던 자신들을 형제국으로 한다니 후금은 물러갔다. 이를 정묘호란이라고 한다.
2. 병자호란 (丙子胡亂)
조선 조정에서는 지나족인 명나라만 자기네 상국이고 후금은 여전한 오랑캐 취급을 하여 후금의 사신이 오면 오랑캐는 사대문 안에 들어오게 할 수도 없다며 여진히 괄시 하니 후금이 그냥 있을리 없었다.
정묘호란이 있은 뒤 6년 후인 1636년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이라고 바꾼 뒤 화가 머리끝 까지 난 청은 조선에게 이번에는 형제국이 아니라 아예 청의 신하가 되고, 공물과 군사까지 바치라고 요구해왔다.
그러나 조선 조정에서는 오랑캐 한테는 형제국도 할 수 없는데 신하국이란 말도 되지 않는 말이었다. 즉 조선은 오직 지나족 명나라의 신하국일 뿐이었다.
이에 청나라는 1636년 12월 1일, 12만 대군을 일으켜 압록강을 건너왔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것이다.
조정은 곧 왕족 등을 강화도에 먼저 피신시켰다. 그리고 인조와 신하들도 곧 그 뒤를 따르려 했는데, 어느 새 청나라 군이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막아버렸다.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세자와 많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에 피신했다. 그러나 살을 에이는 듯 한 추위와 얼마 되지 않는 양곡으로 더 이상 버틸수 없는 인조는 지금의 서울송파에서 항복을 했다. 그리고 전쟁사에서 참을 수 없는 굴욕인 아홉번 엎드리고 세번 절하는 구곡삼배를 하며 청나라의 황제에게 무릎을 꿇었고 이 사실을 기록한 것이 바로 삼전도 비이다.
3. 이 땅 여인들의 수난사. 還鄕女(화냥년)
화냥년은 '환향녀'에서 나온 말이고, 이는 우리 역사를 통해서 너무나 많이 일어났던 이 땅 여인들의 비극이다.
지도층이 서로 권력 다툼이나 하고 양반 체면만 따지다가 국가를 지키지 못하고 외세에 국권을 잃으면서 생긴 이 땅 여인들의 비극이다.
먼저는 고려가 강동성(江東城)에 있는 거란족(契丹族)을 평정할 때 몽골의 지원을 받으면서 서로 관계를 갖게 된 이후, 몽골은 고려에게 계속 압력을 가하고 과다한 공물(貢物)을 요구하여 왔는데, 이 공물 중에는 많은 여자도 달라는 것이 있었다.
이것에 분개한 고려에서는 앞뒤 계산도 해보지 않고 몽골의 사신 저고여(著古與)를 암살해버렸다. 이 몽골 사신이 피살되자 두 나라의 국교는 단절되었고, 고려 고종 18년부터 30여 년간 몽골의 고려 침입이 여러 차례 계속되었다.
고려가 몽골군을 격퇴할 수는 없었으니 몽골군이 처 들어올 때마다 고려 여인들은 수 없이 수난을 당했다.
고려에서는 군사적으로 당할 수 없으니 차라리 화평 정책을 썼다. 수많은 공물(貢物)을 바치기로 했는데 이 물목에는 여자들이 많았고, 이들은 몽골군의 위안부가 되었다. 결국 고려는 몽골의 여자나 조달하는 부마국(駙馬國)으로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몽골군은 조약 이외에도 수많은 고려 여인을 더 요구했다.
고려에서는 할 수 없이 결혼도감(結婚都監)과 과부 처녀를 징발하는 과부처녀 추고별감(寡婦處女推考別監) 등 특별 관청을 설치하여 여자를 징발하였고, 충렬왕 때부터 공민왕 초기에 이르기까지 원나라로 보낸 처녀진공사(處女進貢使)의 왕래 횟수는 50회 이상에 이르렀다.
몽골족을 야만족으로 보는 고려 여자들은 이에 응하지 않았고, 그래서 공녀가 부족해지자 역적의 부인이나 첩, 그리고 승려의 애인이나 딸까지 충당하는 일도 있었고, 그래도 여자가 모자라자 충렬왕 때는 온 나라 안에 금혼령(禁婚令)을 내리고 처녀등록제를 실시하였다.
공녀가 부족하자 공녀의 나이를 내려 13~15세까지의 어린 소녀까지도 대상으로 징발하였으므로, 이 연령의 소녀를 가진 집안에서는 금혼령이 내리기 전에 미리 혼인시킴으로써 10세가 되면 혼인시키는 조혼(早婚)의 풍습과 데릴사위 등의 관습이 생기게 되었다.
고려 때 이 공녀들은 어쩌다 궁중에 들어가 시녀가 되기도 하였는데, 그 중 가장 출세를 한 사람이 바로 기 황후이고 그는 결국 원나라와 고려까지도 망치게 했다.
그러나 이 여자들이 어느 정도 늙으면 새 어린 소녀들과 교체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그들 덕분에 정조를 보전했으면서도 그들을 가장 괄시한 것은 역시 이기심 많은 여자들이었다.
즉, 아무 남자나 상대하던 여성이니 자기 남편도 유혹할까 미리 겁을 냈기 때문이다.
고향에 돌아온 공녀들은 부모형제가 있는 동네에는 들어오지 못했다. 부모형제조차도 가족 중에 그런 더러운 여자가 있다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동구 밖에서 술과 몸을 팔아 가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지나족인 명(明)나라도 원나라와 마찬가지로 예쁜 소녀들을 골라 바치라고 요구했고, 조선에서는 명나라가 상국이니 이를 바쳐야만 했으며, 이들도 어느 정도 늙으면 돌아오는 것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음은 고향에 돌아온 여자란 뜻의 '환향녀(還鄕女)'라는 본격적인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이조 인조, 병자호란 때부터였다.
즉, 청나라는 만주족(滿洲族) 누르하치(奴兒哈赤)가 세운 정복왕조(征服王朝)인데, 이 만주인은 고구려 또는 발해의 유민들이 많았고, 이들은 수렵, 어로를 주된 생업으로 하는 족속이었다. 이들은 본래 여진(女眞), 또는 여직(女直)이라 불리었다. 그 일부는 화북(華北)으로 진출하여 금(金)왕조를 세웠으나, 만주에 잔류한 대부분 한민족들은 농사를 지을 줄 모르는 현지인을 가르쳐가며 점차 정착농업을 영위하였다.
지나족 명나라는 여진족의 여러 부족에 대하여 시종 분열정책을 취하였으나, 조선의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만주에 대한 명나라의 통제력이 이완된 틈을 타서 건주좌위(建州佐衛)의 수장(首長) 누르하치가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스스로 한(汗)의 위(位)에 올라 국호를 후금(後金)이라 하고, 선양[瀋陽]에 도읍하였다. 이 사람이 청나라의 태조이다.
이 청나라가 세워지기 전 만주족들은 사실 고구려나 발해의 유민들이 많았으므로 그래서 우리는 다 같이 아기 엉덩이에 푸른 점이 있는 같은 핏줄이니, 조선이 들어와 합병해 통치해주길 바랐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할 때도 수없이 신숙주, 성삼문을 만주로 보내 우리 뿌리 말을 찾았던 그 만주인들이다.
이때 조선에서 그들 요구대로 말뚝 하나만 박았으면 지금 만주 땅은 우리 땅이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그 잘난 선비들은 상전국인 지나족 명나라가 그들을 오랑캐 야인으로 보고 있으니 우리도 그들이 비록 발해 유민이라 하더라도 오랑캐로 봐야 한다며 받아주지 않자, 그들은 조선의 국경을 침범해와 노략질을 해가기도 했다.
이순신 장군은 초기에 그들에게 회유 정책을 쓰려 했다가 당정의 반대에 휘말리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삭탈관직까지 되었으며, 원균 같은 이는 그 야인들 목을 수 없이 많이 자른 것을 큰 전공으로 자랑 삼았다.
선조의 임진왜란이 끝이 난 다음, 광해군 당시에는 명나라는 다 망해가고 있었고, 청나라의
세는 날로 떨쳐갔다.
청나라에서도 처음에는 조선과 형제국이 될 것을 원했다. 상전 국가가 아닌 형제 국가였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사가 우리를 도와준 것보다 피해를 준 것이 더 많았고, 또 국가 안보를 위해서도 다 망해가는 명나라를 더 이상 상전 국가로 섬길 필요를 느끼지 않아, 지나족인 명나라와 관계를 끊고 차라리 청나라와 형제국을 맺으려 했다.
그러나 정권욕에 눈이 어두운 신하들이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도와주었다는 의리를 핑계로 광해군을 배은망덕한 자라 하며 몰아내고 인조를 세워 자기네 마음대로 정권을 휘둘렀고, 청나라 사신이 오자 "오랑캐 주제에 어딜 오는냐"고 만나주지도 않은 채 쫓아버렸다. 가히 호랑이 앞에 쥐새끼가 까분 격이었다.
결국 청나라 군사들은 물밀듯이 쳐들어 왔다.
그리고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버틸 대로 버티었으나 결국 수많은 어린 아이들과 백성들이 그 혹독한 추위에 얼어죽고 굶어죽자, 인조는 한강 가의 나루터인 삼전도(三田渡)에 나아가 청나라와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으면서 인조는 청태종의 요청에 따라 무릎을 꿇고 세 번 절하고 이마를 아홉 번 땅에 대는(三拜九叩頭禮) 항복의 수욕(受辱)을 겪었다. 즉, 그렇게 앞뒤 계산도 없이 양반의 예의와 의리와 체면만 따지던 신하들이 자기네 백성을 다 죽이고 자기네 임금을 이렇게 처참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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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관님의 댓글
'회절강(回節江) : '절개를 회복하는 강' : 기독교의 세례와 통일교의 '축복'과 매우 유사한 개념이겠죠?
문제는 그 절개를 잃고 싶어 잃은게 아니고, 중심인물 즉 국가 지도자들의 잘못으로 어쩔수 없이 죄인 아닌 죄인이 된 셈인데, 합리적 현실주의자 최명길의 주장대로 회절강 의식을 통해 '용서하고 사랑'해야지, 정조를 잃었으니까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옳다는 주장은 매우 비인간적이었다고 생각 됩니다만...
지금 우리 종단에서도 그 회절강과 같은 의식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양쪽'에서 제기되는 '비극적 상황'이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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