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사랑방 이야기-23. 소혜왕후(昭惠王后), (인수대비) 조선왕실 여성의 기강을 잡다

컨텐츠 정보

  • 0댓글

본문

사랑방 이야기-23. 소혜왕후(昭惠王后), (인수대비) 조선왕실 여성의 기강을 잡다

소혜왕후(昭惠王后), (인수대비) 조선왕실 여성의 기강을 잡다

1. 소혜왕후

2. 소혜왕후의 집안, 청주 한씨 가문

3. 소혜왕후의 출생에서 대비가 되기까지

4. 여성 교훈서 내훈을 쓰다.

5. 엄격한 성격의 소유자, 결국 며느리를 죽이다.

6. 손자 연산군과의 갈등, 불행한 노년

    1. 소혜왕후(인수대비)

성종의 어머니이자 연산군의 할머니인 소혜왕후는 세조대와 성종대, 그리고 연산군대를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녀는 시아버지 수양대군이 세조로 등극하는 과정에서 친정식구들이 참여하는 것을 몸소 겪었던 세조의 큰 며느리이자, 세자였던 남편의 죽음으로 잃어버렸던 왕비의 자리를 자신의 어린 둘째 아들을 왕으로 만듦으로써 대비의 자리로 되찾았던 성종의 어머니이며, 부덕을 잃었다는 이유로 며느리 폐비윤씨(연산군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엄격한 시어머니였다.

그리고 그 결과 손자 연산군의 원망을 한 몸에 받으면서 불행한 노년을 보내야만 했던 연산군의 할머니로서 정치사와 궁중사의 한 가운데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녀는 왕실 여성들뿐만 아니라 사대부 여성들을 위한 교육서조차 제대로 없던 당시에 내훈(內訓)이라는 훈육서를 만듦으로써 우리나라 여성으로서 유교적 훈육서를 만든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소혜왕후가 만든 내훈은 조선시대 여성상을 정립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고, 내명부를 비롯한 양반여성들을 훈육하는 기본 윤리서의 역할을 하였다. 여기에서는 먼저 당대 최고의 가문을 자랑하던 청주 한씨 소혜왕후의 가문과 소혜왕후의 생애, 가족, 그녀가 내훈을 편찬하게 된 배경과 당시 궁중의 분위기 등등에 대해 얘기해 보고자 한다.

  2. 소혜왕후의 집안, 청주 한씨 가문

소혜왕후는 세종 19(1437)에 좌의정을 지낸 청주 한씨 서원부원군 한확(韓確)의 딸로 태어났다. 당시 청주 한씨는 성종대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에 의하면 당대 대표적인 거가대족(巨家大族)이었다.

    한확의 가계는 한란(韓蘭)을 시조로 한다. 한란은 나말려초의 인물로 928(태조11)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정벌할 때 공을 세워 개국벽상공신으로 삼중대광태위에 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청주 한씨는 고려 충렬왕대까지는 크게 떨치지 못하여 충선왕 즉위년에 공포된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재상지종 15가문에 들지 못하였다. 이후 한강(韓康)이 고려 충렬왕 때 판삼사사를 역임하면서 가문의 기반을 다졌다.

그는 충렬왕 76월에 지밀직사사로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원나라에 파견되었다.

청주 한씨 가문이 중국왕조와 관련을 갖게 된 것이다. 한강의 아들 한사기(韓謝奇)는 벼슬이 간의대부에 이르렀고 아들로 영()과 악()을 두었다. 한사기도 원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하였다. 또한 한사기의 아들이자 한확의 고조가 되는 한악은 수상인 중찬을 역임함으로써 가문의 지위를 더욱 높였다.

그는 당시 고려의 왕위를 노리고 있던 심양왕고()가 충숙왕을 참소하자 뛰어난 지략으로 위기를 모면하게 함으로써 인정을 받았다. 이때의 공으로 1등공신이 되어 선력좌리공신의 호를 받고 상당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는 한어와 몽고어에 능하였다고 하는데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확의 증조이자 한백륜의 고조인 한방신(韓方信)은 고려 후기 무신으로 공민왕 초에 자주 승진하여 추밀원직학사로 나가 동북면병마사가 되고, 홍건적의 난에 공을 세워 1등 공신에 책봉, 정당문학에 승진되었다. 그러나 아들 안()이 공민왕 시역(弑逆)에 가담한 것으로 인해 원주에 유배되었다가, 우왕이 보낸 이영(李英)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로 인해 한확의 조부이자 소혜왕후의 증조부인 한녕(韓寧)은 불운한 생활 속에서 성장하였다. 따라서 한확의 아버지이자 소혜왕후의 할아버지인 영정(永叮) 역시 어려운 시절을 보낸 듯 생몰이 불분명하며 그의 관력 또한 명확하지 않고, 다만 지순창군사를 지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영정은 아들 한확의 현달과 명황제의 후궁이 된 딸들의 후광으로 참판, 판서, 찬성, 서성부원군에 추봉되었으며, 대광보국숭록대부령의정부사(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에 증직되었다.

그는 확과 전, 질 등 32녀를 두었는데 장녀는 명나라 성조(영락제)의 후궁 여비(麗妃)가 되어 황비가 죽은 후 중궁의 내정을 전담하였고, 차녀는 명나라 선덕제의 후궁이 되었다. 소혜왕후의 가문은 한안이 공민왕 시해 사건으로 사사됨으로써 한때 위축되었지만 고모 두 명이 명나라 공녀로 들어가 명황제의 후궁이 됨으로써 명황실과 사돈관계를 맺는 등 새로운 도약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 조정에서 어느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올랐다.

한악의 아들 가운데 한공의(韓公義)와 한방신(韓方信)의 후손들이 조선 초기에 국구(國舅)가 되었다.

즉 한악의 아들 한공의는 딸들을 예종과 성종에게 시집보낸 한명회의 증조가 되고, 한방신은 딸을 세조의 아들 덕종에게 시집보낸 한확의 증조이자 딸을 예종에게 시집보낸 한백륜의 고조가 된다.

따라서 세조 ~성종대 세자빈 및 왕비를 배출한 청주한씨 가문 출신의 한확(1400~1456), 한명회(1415~1487), 한백륜(1427~1474)은 모두 한악을 공동 조상으로 하는 친인척들이 된다.

이들 3사람의 관계를 살펴보면 한확은 한악의 4대손이 되고, 한명회와 한백륜은 5대손이 된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한악을 공동 조상으로 하며, 한확이 한명회나 한백륜에 비해 한 항렬이 앞선 인물이 된다. 한확과 한명회는 9촌간이 되고, 한확과 한백륜은 7촌간, 한명회와 한백륜은 10촌간이 된다.

    청주한씨 가문이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소혜왕후의 아버지 한확과 한명회가 세조의 왕위찬탈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이를 주도하면서부터였다. 즉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성공시키고 나아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계승에 성공하자 이를 주도했던 한명회와 한확을 중심으로 청주한씨들이 대거 공신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한명회와 한백륜도 세조와 사돈이 됨으로써 왕실의 외척으로 성장 하였다.

​  3. 소혜왕후의 출생에서 대비가 되기까지

출생 : 소혜왕후는 세종 10(1437)에 한확의 6째 막내딸로 출생하였다.

개인적으로 그녀의 집안이 명황실과 사돈관계를 맺고 최고의 지위와 부를 누리던 전성기였다. 그녀는 세조를 비롯한 조선왕조와 밀접한 관계를 맺은 청주한씨 가문에서 태어나 유교적인 교육을 받으면서 어려서부터 정치적 영향력과 권력의 힘을 경험하면서 성장하였다.

소혜왕후는 두 고모가 명나라 황제의 후궁이 되었고 아버지가 명나라에서 벼슬을 지내기도 했던 매우 특이하고도 지위가 높은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어머니 홍씨가 소혜왕후가 13살 될 즈음에 죽음으로 인해 성장에 어려움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결혼과 남편의 죽음 : 소혜왕후는 세조가 아직 수양대군의 신분으로 잠저에 있을 때인 문종 즉위년(1450)13살의 나이로 한살 아래인 수양대군의 맏아들 도원군(桃源君) ()(1438~1457)과 혼인하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수양 대군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르자 남편 도원군은 의경세자로 책봉되었고 자신은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어 수빈(粹嬪)이 되었다.

세조의 즉위에는 명황실에 누이를 보낸 한확을 비롯하여 한명회 등 청주 한씨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때 그녀는 왕실 가족의 일원으로 정치의 한 가운데에서 계유정난, 단종의 폐위, 시아버지 세조의 즉위 등 정치와 권력의 힘을 직접 경험하며 살아남는 법을 배웠을 것으로 보인다.

세조는 24월에 명나라에 고명관복채단의 흠사(欽賜)를 사례하고 세자 책봉을 주청하는 표문을 올리게 하였는데, 한확이 표문을 받들고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명나라에 가서 세자 책봉을 주청하였다. 그러나 그 해 세자의 고명을 들고 명나라에 들어갔던 한확이 9월에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 이때 소혜왕후는 19살이었다.

그녀는 결혼 직후 연이어 맏아들 월산대군과 명숙공주를 낳았고, 세조 3(1457) 7월에 둘째 아들이자 후에 성종이 되는 자을산군을 출산하였다. 그러나 두 달도 안 되어 9월에 남편 의경세자가 질병으로 20세의 나이로 죽자 그녀는 20세로 청상이 되었다. 아버지와 남편이 연이어 죽는 불행을 겪어야만 했다. 더욱이 남편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요절함으로써 왕비가 될 희망을 접어야 했다.

남편 의경세자가 죽자 차기 왕이 될 세자의 자리는 의경세자의 맏아들인 월산대군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8살 난 세조의 둘째 아들인 해양대군 즉 예종에게 넘어갔다. 따라서 소혜왕후는 자식들을 데리고 궁 밖 사가(私家)로 물러나야 했다. 왕세자빈으로서의 지위는 불과 3년 정도에 불과하였다.

    <?xml:namespace prefix = o />

궁 밖 私家에서의 생활 : 20살의 청상과부로 설움을 안고 궁궐을 떠나온 그녀는 두 아들을 데리고 지금은 덕수궁이 된 사가로 돌아왔다. 다시 궁궐로 들어가는 것은 거의 요원한 일이 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세조의 맏며느리로서의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자식들의 교육과 자신의 학문 연마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맏아들 월산대군은 평양군 박중선의 딸과 혼인시키고, 둘째 아들 자을산군은 세조 13(1467)에 당대 최고의 권력자이자 예종의 장인이었던 한명회의 둘째 딸과 혼인시켰다.

  한명회는 해양대군(

관련자료

가정회 은행계좌

신한은행

100-036-411854

한국1800축복가정회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