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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24. ‘권력은 내 손안에..’ 한명회 (韓明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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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24. ‘권력은 내 손안에..’ 한명회 (韓明澮)

조선왕조실록에 무려 2,300여 건이나 등장하는 인물, 세조 대부터 성종 대까지 3대에 걸쳐 세상을 쥐락펴락했던 인물, 그가 바로 수양대군의 장자방으로서 계유정난을 주도했던 한명회이다. 그는 야심만만한 수양대군이 동생 안평대군의 기세에 눌리고 세종의 고명대신 김종서와 황보인의 견제로 옴짝달싹 못하고 있을 무렵 홀연히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여 일대 돌풍을 일으킨다. 계유정난을 배경으로 하는 현대의 사극 속에서 그는 유들유들한 표정으로 굳게 쥔 주먹을 쑥 내밀며 이렇게 소리친다.

세상이 바로 이 손 안에 있소이다.”

 

불안했던 단종 초기의 난세에 뛰어든 그는 남다른 자신감과 통찰력으로 수양대군을 권좌에 밀어올렸다. 이어서 충심으로 굳게 뭉친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을 분쇄하고,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과 금성대군 등 잠재적인 위협세력들을 모조리 제거했다. 이후 노련한 정치력을 발휘하여 세조의 철권통치를 뒷받침하면서 세종 이래 약화일로를 걷던 왕권을 곧추세웠다.

 

그와 같은 공적을 바탕으로 한명회는 세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으며, 두 딸을 예종과 성종에게 시집보내 권신과 외척으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다. 세조가 죽은 뒤에는 신숙주와 함께 예종과 성종 시대의 정국을 이끌었다.

 

한명회는 국가 경영에도 수완을 발휘하여 북방을 안정시켰고, 그가 만든 면리(面里) 제도는 오늘날까지 통용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사후 연산군으로부터 폐비 윤씨의 죽음을 방관했다는 죄목으로 부관참시라는 수난을 겪었고, 의리와 예도를 숭상하는 조선의 사관들에게 유능한 책사가 아니라 권모술수에 능한 모리배로 평가받았다.

 

1. 초라한 출발, 드높은 꿈

한명회(韓明澮)는 개국 당시 명나라에 파견되어 조선(朝鮮)’이란 국호를 확정짓고 돌아온 개국공신 한상질의 손자이다. 자는 자준(子濬), 본관은 청주, 호는 압구정(狎鷗亭압구(狎鷗사우당(四友堂)이다. 아버지는 사헌부감찰 출신으로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된 한기(韓起), 어머니는 예문관대제학 이적(李逖)의 딸인 여주 이씨이다.

 

1415(태종 15) 1025일 한성부에서 태어났는데 칠삭둥이인데다 병약했으므로 곧 죽을 줄 알고 버려두었는데, 그를 가엾게 여긴 늙은 여종이 거두어 키웠다. 태어날 때부터 배 위에 검은색 점이 몇 개 있었으므로 세간에 북두칠성의 정기를 품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어렸을 때부터 기억력이 비상하고 행동이 활달했으므로 종조부 한상덕이 장차 집안을 일으킬 인물이라 하여 집안에 들였고 종조부 한상환이 학문을 가르쳤다.

 

일찍이 부모를 잃고 동생 한명진과 함께 불행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다행히 한상덕의 지원을 받아 강원도 자망산에 은거하고 있던 유학자 유방선의 문하에서 지기인 권람, 서거정 등과 함께 공부했다. 유방선은 권근 변계량의 제자로 일찍이 세종이 집현전 학사를 보내 자문을 구하기도 했던 유현(儒賢)이었다. 그러나 친구 권람은 문종 원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집현전 교리가 되었지만 그는 낙방을 거듭했다. 이에 주변에서 비웃는 이들이 많았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고 마차에 술과 책을 싣고 천하를 주유하면서 비상의 그날을 기다렸다.

궁달은 다 때가 있는 법이다. 선비로서 어찌 부유(腐儒), 속사(俗士)들의 말 한 마디에 실망하고 비통하기를 즐겨하겠는가?”

한명회는 그렇듯 느긋한 태도를 견지했지만 좀처럼 그 때는 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38세 때인 1452년에 간신히 문음(門蔭)으로 경덕궁직(敬德宮直)을 얻었다. 경덕궁은 개성에 있던 태조 이성계의 잠저(潛邸)였다. 관리로서는 초라한 출발이었지만 그는 고위직에 있던 친구 권람에게 이렇게 큰소리를 쳤다.

문장과 도덕은 네게 양보하겠지만 정사만은 양보할 수 없다.”

2. 계유정난으로 날개를 달다

한명회가 관직에 나간 그해에 문종이 죽고 12세의 어린 단종이 보위에 올랐다. 당시 정권은 단종을 보좌하던 김종서와 황보인 등 고명대신들에게 주어져 있었다. 그로 인해 신권이 강화되면서 조정에서 멀어진 왕족들은 크게 불만을 품었다. 특히 세종 말기부터 신료들의 압박으로 부왕이 고통 받는 장면을 생생하게 목도했던 수양대군은 추락하는 왕실의 권위에 분개하면서 내심 권좌를 꿈꾸었다.

 

그 동안 재야를 전전하며 정세를 헤아리던 한명회는 풍운아 수양대군의 야망을 한 눈에 꿰뚫어보고 친구 권람을 통하여 그를 만난 뒤 노골적으로 야심을 부추겼다. 그때부터 한명회는 수양대군의 최측근 참모로서 왕권 탈취의 모든 단계를 진두지휘했다.

 

당시 수양대군의 세력은 안평대군에 비해 턱없이 빈약했다. 한명회는 수양대군에게 활쏘기 훈련을 빌미 삼아 모화관과 훈련원에 가서 무사들에게 술과 안주를 대접하게 함으로써 많은 인원을 끌어 모았다. 그 결과 내금위 무사 양정을 비롯하여 홍윤성, 홍달손 등 당대에 내로라하는 무사 30여 명이 수양대군의 심복이 되었다.

 

수양대군은 또 한명회의 조언에 따라 신숙주, 정인지, 정창손 등 유력한 집현전 학사들을 포섭했고, 김종서와 황보인의 경계심을 늦추기 위해 명나라 사신을 자청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조정에 안평대군을 지지하는 신료들이 많았으므로 거사를 망설이자 한명회가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길가에 집을 지으면 3년이 지나도 완성되지 않습니다. 대군께서는 속히 결단하십시오.”

 

1453(단종 1) 1010, 결심을 굳힌 수양대군은 휘하 무사들을 이끌고 밤늦게 김종서의 집을 찾아가 김종서와 아들 김승규를 제거했다. 이어서 당시 경혜공주궁에 머물고 있던 단종에게 안평대군이 난을 일으켰다고 거짓 보고하여 환궁하게 한 다음, 경복궁을 장악하고 승지 최항과 환관 전균을 통해 어명으로 중신들을 대궐로 불러들였다.

 

이때 한명회는 수양대군의 정적으로 지목한 사람들의 명단을 적은 살생부(殺生簿)를 들고 그들의 생사를 관장했다. 쿠데타 모의 과정에서 그는 신하들의 성향과 능력, 세조에 대한 지지, 설득의 가능성 여부 등을 파악하여 살생부를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생사의 갈림길은 근정문 좌우에 있는 출입문이었다.

 

이때 친수양대군파로 분류된 정인지, 이계전, 이순지 등은 근정문 왼쪽 문으로 들어와 무사했지만 정적으로 분류된 황보인과 조극관, 이양 등은 근정문 오른쪽 문으로 들어왔다가 한명회의 신호에 따라 홍윤성과 함귀, 구치관의 철퇴를 맞고 목숨을 잃었다.

 

한명회는 이어서 입궐하지 않은 윤처공, 이명민, 조번, 원구, 김연 등의 집에 무사를 보내 일가를 몰살시켰고, 문종의 비석 제작을 감독하던 민신을 창으로 찔러 죽였으며, 안평대군에게 역모 혐의를 씌워 강화도로 귀양 보냈다. 마지막으로 그때까지 살아있던 김종서를 추적하여 죽임으로서 역사에 계유정난으로 이름 지어진 유혈 쿠데타를 마무리했다. 그날의 공적으로 한명회는 종8품 군기녹사(軍器錄事)를 거쳐 종4품 사복시소윤(司僕寺少尹)이 되었다. 그때부터 보잘 것 없는 궁지기의 초고속 출세 행진이 시작되었다.

3.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을 분쇄하다

일거에 정적들을 도륙하고 정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영의정이 되어 조정을 주물렀다. 이윽고 한명회의 사주를 받은 공신들은 단종에게 연일 왕위를 내놓으라고 겁박했다. 그들의 서슬퍼런 공세를 견디지 못한 단종은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다.

 

과거 세종으로부터 단종을 지켜달라는 부탁을 받았던 성삼문은 예방승지로서 세조에게 옥새를 전달하며 통곡했다. 그때부터 성삼문은 아버지 성승과 함께 집현전 학사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김문기, 김질 등을 끌어들여 은밀히 단종복위운동을 개시했다.

 

1456(세조 2) 6월 세조가 창덕궁 광연루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송별연을 베풀 때 별운검으로 성승과 유응부가 결정되자 성삼문은 당일로 거사를 확정지었다. 이때 기이한 낌새를 눈치챈 한명회는 신숙주와 함께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세조를 설득하여 별운검을 폐지하고 연회에 세자를 불참하도록 함으로써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그로 인해 거사 날짜가 연기되자 불안감을 느낀 김질이 장인 정창손을 통해 세조에게 고변함으로써 거사 계획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그해 62, 경자(庚子), 실록에 선연히 박혀있는 두 글자가 뒤이을 참사를 예고하고 있다.

낮이 어두웠다.[晝晦]’

 

평소 아꼈던 집현전 학사들의 모의를 알게 된 세조는 격노했다. 그리하여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관련자 70여 명을 죽이거나 귀양 보냈고, 그들의 16세 이상의 아들을 모조리 처형했으며, 15세 이하의 아들과 부인, 식솔들을 공신들의 노비로 삼았다. 특히 성삼문의 가문은 아버지 성승을 비롯하여 형 성삼고, 동생 성삼빙, 성삼성과 조카 등 남자는 젖먹이까지도 살해해 버렸다.

 

이어서 사육신의 거사를 묵인한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시키고 영월로 귀양 보냈다. 얼마 후 금성대군과 순흥 부사 이보흠이 주도한 단종복위운동이 발각되자 단종은 폐서인되었고, 17세에 청령포의 고혼이 되었다. 선혈이 낭자했던 이 비극적인 사건은 후대에 세조의 원죄보다 한명회의 간교함과 세종에 대한 신숙주의 불충을 증명하는 단서로 더 많이 애용되었다.

 

4. 국가 경영 능력을 발휘하다

한명회는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을 분쇄한 공적으로 그해 겨울 도승지가 되었고, 1457(세조 3)부터 조정을 주도하면서 위정자로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당시 세조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재상 중심의 의정부의 기능을 축소하는 대신 육조직계제를 실시하여 만기를 친람했다. 또 유명무실했던 체찰사(體察使) 제도를 활성화시켜 지방감찰제도를 강화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통제권도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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