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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22. 청주 韓氏의 起源과 주요 人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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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22. 청주 韓氏起源과 주요 人物

     청주 韓氏起源과 주요 人物

청주 한씨의 시작은 멀리 고조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주 한씨세적연보청주 한씨의 시조 한란은 기자 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의 먼 후예라고 한다. 번조선의 왕이었던 기준이 연나라에서 망명해온 위만에게 속아 나라를 빼앗기자 좌우 궁인宮人들과 잔병殘兵들을 거느리고 해로를 따라 마한의 왕도인 월지국月支國으로 들어가서 이를 습격하여 깨뜨리고 그곳의 왕이 되었다. 신채호는 마한과 백제의 국경이 웅천熊川(지금의 공주)이니, 월지국은 그 부근으로 추정하였다. 기준은 나라 이름을 그대로 마한馬韓이라 하고 동시에 왕조는 한씨가 세습하여 국민들이 한씨 왕의 존재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준이 국민들의 불평을 무마하기 위하여 자신의 본래 성인 기씨箕氏를 버리고 한씨韓氏로 성을 바꾸었다. 이 마한도 177년 만인 9대 계왕에 이르러 백제 온조왕에게 망한다. 이때 8대 원왕元王의 세 아들 우성友誠·우평友平 ·우량友諒3형제가 각각 고구려와 백제, 신라로 귀의해 우평은 북원 선우씨, 우성은 행주 기씨, 우량은 상당上黨(지금의 청주) 한씨가 되어 이로부터 청주 한씨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선우, , 한씨는 모두가 기준의 한 핏줄을 받은 후예로 지금도 통혼을 하지 않는 것을 관례로 삼고 있다. 우량의 31세 손 지원의 네 아들 중 한란은 청주 한씨의 중시조가 된다.

 

그러나 청주 한씨의 득성 연원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진 게 없다. 청주 한씨 세보에 의하면 준왕이 마한의 왕이 되었을 때 자신을 한왕韓王이라고 한 것과 위만에게 억류당한 그의 가족이 한씨韓氏라 한 사실로 미루어 준왕 이전부터 한씨 성을 썼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하였다. 학계에서는 한씨가 한국의 고유한 씨족이라는 것이 통설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종래 기씨조선箕氏朝鮮으로 알려졌던 고조선사회는 실상 한씨조선이고, 준왕은 기준箕準이 아니라 한준韓準이라는 것이다. 고조선의 한씨는 마치 부여의 해씨解氏, 고구려의 고씨高氏, 백제의 부여씨扶餘氏 신라의 박씨朴氏, 김씨金氏, 발해의 대씨大氏, 고려의 왕씨王氏 조선의 이씨李氏와 마찬가지로 한국 고유의 대성大姓이라는 것이다.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는 기준 이전부터 있었던 한씨와 기준의 관계, 기준과 기자의 관계 등이다. 한씨 성의 대부분이 청주 한씨이고 그로부터 평산, 한양, 안변, 양주, 곡산, 홍산, 대흥, 부안, 개성, 함흥, 금산, 단주 등 10여 본이 분관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곡산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환보(합본)되었다.

 

중시조 한란韓蘭 : 기준의 40세 손이자 우량의 32세 손이다. 지금의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난곡리 태생이다. 공은 중년에 청주 방서동方西洞에 이거하였다. 태봉왕 궁예를 이어 태조 왕건이 즉위할 때 그의 공도 있었다고 한다. 태조 210월 배현경이 평양에 축성하는 이점을 의논하니 왕이 한란과 염상에게 영을 내려 현지에 가서 독려케 하였다. 염상이 중도에 병이 나서 강윤형을 대신 보내 평양성을 완성케 하니 태조는 평양을 서경西京이라 하였다. 그후 청주 방서동에 내려와서 수년 동안 농사를 지으며 무농정務農亭에서 향학을 일으키고 용개평야龍開平野의 농토를 개척하여 부호가 되었다. 태조 11년 왕건이 견훤을 치러갈 때 정벌군의 군량미를 대주고 종군하여 전공을 세웠다. 나중에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 삼중대광태위三重大匡太尉에 녹훈되었다. 시호는 위양威襄이다. 묘는 충북 청원군 남일면 가산리에 있고 청주 방서동에 무농정과 방정方井 제단비祭壇碑가 있다. 영동군 난곡리 입구에는 탄생지 유허비遺墟碑가 있다. 중시조 한란의 신도비문神道碑文충효덕례忠孝德禮하여 이선기행以善其行하고 근근공검勤謹恭儉하여 이업기가以業其家하라는 내용이 있다. 청주 한씨에서는 이중 충효덕례 근근공검을 따서 문중의 종훈宗訓으로 삼고 있다.

 

성씨의 변천과정

청주 한씨의 세계世系는 시조 한란의 후대에서 30여 파로 나뉘는데, 그 중 후손이 많기로는 양절공파襄節公派韓確, 문정공파文靖公派, 충간공파忠簡公派, 몽계공파夢溪公派, 관북파5, 충성공파忠成公派 6파가 청주 한씨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고려조와 조선조 전반기에 수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고려조에 명인 14, 조선조에 상신(의정부, 좌우의정) 13, 왕비 6, 부마 4, 공신 24, 대제학 1명을 포함하여 수많은 학자, 문필, 서예가를 남겼다. 청주 한씨의 역사에서 특이한 점은 이 집안이 왕비와 부마를 많이 배출한 점이다. 이러한 혼인을 통한 세력기반은 중국에까지 연결되어 명 황제의 후궁으로 2명의 청주 한씨가 있었다. 청주 한씨의 분포지역을 보면 충간공파는 충남·경기, 문정공파는 강원·경남, 몽계공파는 경상도 상주·합천, 관북파는 평안북도 안변 및 함경도 함흥·영흥, 충성공파는 충남·부산, 양절공파는 전국 각처에 각각 분포되어 있다. 대표적인 집성촌은 청주 방서동 마을이다. 일명 대머리 마을로도 불리는 이곳은 1세 한란이 터를 잡은 뒤 오랫동안 지켜온 청주 한씨의 터전이다. 그밖에도 제주에 많이 살고 있는데, 이 일문一門은 고려 말기 예문관 대제학으로서 태조太祖를 섬기지 않아 유배된 천(한란의 11)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양절공파 한확韓確(한란의 13세손) 파조 한확은 세종 때 병조·이조판서를 거쳐 단종 때 우의정을 지내고, 세조 때 좌의정을 지냈다. 1437(세종 19)에 둘째 딸이 세종의 후궁 소생인 계양군桂陽君과 혼인하였고, 1455(단종 3)에는 여섯째 딸(인수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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