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이야기-18. 사랑과 改革을 추구한 悲運의 공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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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18. 사랑과 改革을 추구한 悲運의 공민왕
1. 槪要 : 공민왕(恭愍王, 1330년 5월 23일 (음력 5월 6일)[1] ~ 1374년 10월 27일 (음력 9월 22일), 재위: 1351년 ~ 1374년)은 고려의 제31대 국왕이다. 초명은 기(祺), 휘는 전(顓), 호는 이재(怡齋)와 익당(益堂), 우왕 2년에 조정에서 올린 시호는 인문의무용지명열경효대왕(仁文義武勇智明烈敬孝大王)이며, 같은 왕 11년에 명에서 받은 시호는 공민왕(恭愍王)이다. 충숙왕의 차남이며, 몽골식 이름은 바얀 테무르(伯顔 帖木兒, 몽골어:ᠪᠠᠢᠠᠨᠲᠥᠮᠥᠷ、Bayan Temür)이다
즉위 초반에는 무신 정권의 세력 기반을 혁파하고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국을 선언하였으며 승려 신돈을 등용하여 개혁정책을 펼쳤으나 노국대장공주의 死後 개혁의지를 상실하였다. 한때 신돈 등을 등용하여 권문세족과 부패 관료와 외척을 정리하고 신진사대부를 중용하는 등의 개혁정책을 폈으나, 신돈과 의사 충돌로 제거하였다.
이후 남색과 술, 향락에 탐닉하던 중 1374년 홍륜, 최만생의 쿠데타로 의하여 시해 당했다. 영특하고 다재다능했으며, 특히 그림과 서예는 당대 최고의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는 아들 모니노(우왕)가 신돈의 시비인 반야의 소생이라는 점 때문에 정통성 논란이 나타난다.
1351년부터 1374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351년부터 1365년까지 친정을 하였고 한때 1364년 숙부 덕흥군(德興君)이 실권 탈취 기도를 했다가 실패한 바 있으며 1365년부터 1371년까지 신돈(辛旽)이 실권을 맡았고 신돈을 축출한 1371년부터 1374년 붕어할 때까지 다시 친정을 하였다.
2. 공민왕의 改革
공민왕의 개혁(恭愍王-改革)은 고려 제31대 왕 공민왕이 단행한 국정의 개혁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개혁이 우왕 이후에까지 이어진다. 공민왕은 충혜왕 복위 2년(1341) 원나라의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비로 맞고 충정왕 3년(1351) 원나라의 지원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즉위 후에는 주권 회복 정책을 강력히 기도하였다. 공민왕은 대륙의 정세가 동요하자 이를 이용하여 몽골의 기반을 끊고 완전한 독립을 회복하기 위하여 과감한 혁신정치를 단행하였다. 즉 공민왕은 몽골의 풍습·연호·관제를 폐지하고 문종 때의 옛날 제도로 복구시켰으며, 정동행성·쌍성총관부를 철폐했다. 또 기철(奇轍)을 위시한 친원파를 일소하고, 명(明)과 협력하여 요동(遼東)의 원을 공략했다.
동왕 18년(1369) 이인임(李仁任), 이성계(李成桂)로 하여금 동녕부를 정벌케 하는 한편 정방(政房)을 폐지하여 권문세가의 세력을 억압했다.
그는 또 신돈(辛旽)을 등용하여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 귀족들이 겸병한 토지를 소유자에게 반환시키고 불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등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그 후 홍건적(紅巾賊)과 왜구(倭寇)의 침입을 받아 국력이 소모되었다.
고려의 대표적 화가이며 글씨에도 능했던 공민왕의 개혁은 권문세가의 반대에 부딪혀 신돈이 죽임을 당하고 그마저 드디어 죽임을 당하여 만족할 만한 결실을 보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났다.
무신 독재 혁파 : 즉위한 지 두 달 뒤인 이듬해 2월부터 그는 전격적으로 개혁작업에 돌입해 2월 초하루에는 무신정권의 최우가 설치하여 인사행정을 맡아오던 정방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개혁조서를 선포하여 토지와 노비에 관한 제반 문제를 해결할 것을 명령하였다.
3. 암살 기도와 여진족 정벌
원나라에서는 고분고분하지 않는 그를 폐출하고 덕흥군(德興君) 등을 추대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1363년초 그는 왜구 토벌을 계획하였으나 일시 중단하였다.
1363년 음력 3월, 김용이 원나라의 지원을 받던 덕흥군과 내응하여 흥왕사에서 공민왕의 시해를 기도했으나 최영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러자 덕흥군은 1364년 음력 1월 원나라의 지원을 받아 최유와 함께 원나라군 1만 명을 이끌고 고려의 서북면에 침입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최영과 이성계에 의해 섬멸되었다. 고려 출신으로 원나라의 장군이 되었던 최유는 고려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1364년 음력 1월, 여진의 대추장 김삼선(金三善), 김삼개(金三介) 형제가 고려의 동북면에 침입하였으나 이성계 휘하의 고려군에게 대패하였다. 또한 같은 달 원의 동녕로 만호 박백야대(朴伯也大)가 고려의 서북면 연주(평안북도 영변)을 침입하였다. 이는 원나라가 고려에 행한 최후의 공격이었다. 그러나 이 공격은 최영이 지휘하는 고려군에 의해 참패로 끝났다. 같은 해 음력 5월에는 김속명이 이끄는 고려군이 진해에 침입했던 3천 명의 왜구를 격파하였다.
4. 改革의 失敗
홍건적과 왜구의 계속적인 침범은 고려의 국력을 소모시켰다. 1365년(공민왕 14),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던 노국대장공주가 드디어 회임을 하였다. 그러나 노국대장공주는 난산 끝에 사망하고 말았다.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은 공민왕에게 극심한 충격을 주었다. 그는 노국대장공주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통곡했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노국대장공주는 인덕왕후(仁德王后)로 추존되었으며, 공민왕은 서거한 왕후를 추모하는 불사(佛事)에 전력을 기울였다. 왕비의 사후 그는 술과 색으로 시름을 달랬고, 예쁜 여자들을 왕궁으로 출입시키기도 했다.
끝없는 상심에 빠졌던 공민왕은 1365년 음력 5월 을사환국(乙巳換局)을 통해 신돈(辛旽)을 등용하였다. 영산 출신 승려였던 신돈은 당시 살아있는 부처라는 소문이 있었고 그 소문을 들은 공민왕은 직접 영산까지 내려가 신돈과 만나 대담하였으며, 신돈을 개경으로 불러들여 시국을 논하였는데 그의 달변이 왕의 마음에 들게 된다. 왕은 신돈을 환속시킨 뒤 수정리순론도섭리보세공신(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에 책록하고 영도첨의사사(領都僉議使司) 판감찰사사(判監察司事)제조승록사사(提調僧錄司事) 겸 판서운관사(判書雲觀使) 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에 임명했다.
공민왕은 개혁추진을 위해 신돈을 기용했다. 그는 어머니가 절의 노비였고, 자신은 중으로서 아버지는 권문세족이었지만 본인은 노비의 몸에서 난 서자였으므로 권문세족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1366년 신돈의 건의로 전민변정도감이 설치되었다. 수상직과 감찰서와 서운관의 수장직을 겸한 신돈은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1366년)하여 권문세족들이 불법으로 겸병한 토지를 원소유자에게 환원시키는 한편 억울하게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해방시켰고, 또한 성균관을 다시 설치하였다. 신돈은 민중들에게 '성인' 칭송을 받았다. 결국 신돈의 개혁으로 권문세족과 신흥 무인세력은 힘을 잃게 되었고, 이들은 곧 신돈의 정책에 대해 거세게 반발하였다.
1371년 음력 7월 신해환국(辛亥換局)으로 신돈이 유배된 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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