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이야기-17. 빨갱이 金大中과 박정희 神話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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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이야기-17. 빨갱이 金大中과 박정희 神話②
1) 김대중, 죽어서도 못 뗀 빨갱이 딱지
1957년 김대중은 명동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토머스 모어. 이상적인 정치세계 유토피아를 꿈꾼 잉글랜드의 대법관이자 정치인 토머스 모어는 교회의 수장령을 거부하다 처형 당했다. 토머스 모어 만큼이나 김대중의 인생은 굴곡이 심했다.
김대중은 우리 사회의 뜨거운 화두였다. 특히 ‘김대중 죽이기’는 한국 정치사를 관통하는 메커니즘 이기도 했다. 그를 ‘선생님’으로 추앙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반대편에는 그를 ‘빨갱이’ ‘지역감정의 주범’ ‘급진주의자’ ‘대통령 병자’ 등으로 몰아세우는 세력이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특히 이 사회 기득권일수록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 많았다.
‘김대중 죽이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71년 대선에서 DJ바람이 일면서부터다.
1971. 4월 대선은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국가와의 싸움이었다. 김후보가 선거공약을 발표하는날마다 간첩사건이 터졌다. 선거 4일 전 중앙정보부는 “김대중후보의 남북교류 4대국 안전보장안 등의 공약을 북한이 지지했다”라고 발표했다.
대선에서 DJ는 박정희에게 패했다. 하지만 차세대 지도자라는 DJ의 후광은 영남 패권주의자들에게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당시 중정 제1차장으로 근무했던 강창성 전 한나라당 의원은 “원칙대로 투.개표했다면 우리가 졌을지도 모른다.”라고 증언했다.
1971~87년은 DJ인생의 암흑기였다. DJ를 제거하려는 공작이 이어졌다. 6년간 투옥되었고 10년간 55회 가택연금을 당했다. 첫 고비는 1971. 5월에 당한 교통사고였다. 목포에서 총선 지원유세를 마친 그의 자동차는 중앙선을 넘어 돌진하는 14톤 덤프트럭을 피하려다 논에 처박혔다. 이 사고로 그는 골반을 크게 다쳐 평생 지팡이를 짚어야 했다. 사고 트럭이 공화당 의원 소유였다는게 밝혀졌지만, 사건은 미제로 남았다.
1973. 8월. DJ는 도쿄의 한 호텔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됐다. 요원들은 그를 살해하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자, 대북공작선 용금호에 태워 대한해협에서 수장하려 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개입으로 그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가 서거 직후 영국 파이넨셜 타임즈는 “김 전 대통령이 제임스 본드가 등장하는 007소설의 한 페이지에 나올법한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았다”라고 보도했다.
납치사건 이후 그는 동교동으로 돌아왔지만, 바로 가택연금과 징역살이를 번갈아 해야 했다. 1979. 10. 26. 박 전대통령이 시해된 후 DJ에게 봄이 오는 듯 했다. 하지만 전두환 등 신군부는 1980. 5. 18. DJ에게 총을 겨누었다. 군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이 그의 지령에서 시작됐다며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조작했다. 그는 군사재판 1.2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당시 지미카터 미국. 빌리 브란트 독일총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등이 구명 운동을 벌여 DJ는 목숨을 건지고 미국 망명길에 오를 수 있었다.
1985년 귀국해 민주화의 봄을 이끌었지만 그는 군사정권과 패권세력이 쳐놓은 덫과 평생을 싸워야 했다. 그를 지독하게 괴롭힌 것은 빨갱이라는 낙인이었다.
선거 때만 되면 언론은 사상검증이라는 이름으로 색깔론을 덧칠하기에 바빴다. 선거 때면 언론은 그와 관련해 사상 의혹들을 봇물처럼 쏟아냈다. 그 의혹들은 거의 국가안전기획부의 공작으로 밝혀졌다. 북풍 공작에 뒷돈을 댔던 권영해 전 안기부장. 안기부 전 1차장. 대공수사실장 등 고위 간부가 줄줄이 구속됐다.
DJ에 대한 색깔론은 그 뿌리가 깊고 넓다. 그는 측근들을 ‘동지’라고 불렀다. 즐겨 사용하던 ‘동지’ ‘대중’ ‘민중’이라는 단어조차 북한을 추종하는 증거가 됐다. 그가 주장한 공화국연방제는 북한의 고려민주연방공화국 방안과 비슷하며, 그가 세운 아태재단은 북한의 아태평화위원회와 이름이 비슷하다고 매도당하기도 했다. DJ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나중에 그런 용어를 그대로 쓸 줄 귀신이 아닌들 어떻게 미리 알 수 있었겠는가? 용어만 가지고 용공이라고 뒤집어씌운 것은 정말 부당하다”라고 말했다.
1949년 남로당에 가입하고 반란을 꾸민 죄로 사형을 선고 받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좌익 행위에 대한 비판은 언론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것과 크게 대비된다.
2) DJ라면 무조건 색안경 (지역감정 조장자. 대통령병 환자)
빨갱이라는 굴레만큼이나 DJ를 괴롭힌 것은 지역감정의 골을 깊게 팠다는 비난이다.
1990년 11월 국회 대표연설에서 그는 “박정희씨의 최대의 죄악. 영원히 역사에 용서받지 못할 죄악,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죄악은 지방색의 조성이다” 라고 말했다. DJ는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 측이 만들어낸 지역감정에 발목 잡혀 대권을 놓쳤다. 그는 지역감정의 최대 피해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호남의 확고한 지지에 힘입어 다시 일어섰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보수언론은 3金이 지역을 볼모로 토호정치를 한다는 비판에만 천착한다.
1987년 대선에서 YS와의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자 비난의 화살은 DJ에게 쏟아졌다. DJ가 YS를 지지했다면 지역감정 구도를 넘어섰을 것이라는 가설을 바탕에 두고 있다.
호남의 정서는 지역적. 패권적 지역주의가 아니라 저항에 가까웠다. 특정지역에서 20년 넘게 한 사람에게 90% 넘는 몰표를 던졌다는 것은 지역정치 만으로 설명하기 힘든 일이다.
한화갑 전 대표는 “표가 적은 지역은 지역주의를 조장해서 대결하면 무조건 불리하다. 무슨 이득이 있다고 DJ가 지역감정을 조장하는가?”라고 말했다.
DJ에 대한 또 하나 흔한 비방 중 하나는 ‘대통령병 환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 자리를 지키기 위해 18년간 독재한 박정희 전 대통령과 12년간 독재한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해서 그런 비난은 없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김 전 대통령의 일생은 실패와 고난의 연속이었다. 독재자들에 의해 5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고, 6년의 감옥살이. 40년 넘게 가택연금과 감시 속에서 살았다. 그의 인생은 이 땅의 민주주의이자 정의의 실현이었다. 나는 이 땅의 민주주의는 그에게 빚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그의 삶은 나에게도 많은 좌표가 되었다. 그가 남긴 교훈의 말이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고귀한 선물은 인간 사랑이다”
“서생처럼 고집스럽게 밀고 나가되 실천방법에 대해서는 상인과 같이 유연하라”
“용기는 모든 덕 중 최고의 덕이다”
“사람들이 나쁜 신문을 보지 않고, 또 집회에 나가고 하면 힘이 커진다. 작게는 인터넷에 글을 올리면 된다. 하다못해 담벼락을 쳐다보고 욕을 할 수도 있다.”
<주진우의 정통시사활극 주기자>에서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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