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사랑방 이야기-19. 三國統一은 虛構다

컨텐츠 정보

  • 0댓글

본문

사랑방 이야기-19. 三國統一虛構

          삼국통일은 허구다

1. 主張槪要

1. 당나라의 침략으로 고구려. 백제가 멸망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전체 영토의 75%을 잃었는데 어찌 신라의 삼국통일인가?

2. 백제 멸망 후 16년 동안, 그리고 고구려멸망 후 8년 동안 백제와 고구려는 당의 영토로 편입되었고, 신라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으며 전혀 항의를 하지 않았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신라는 통일의 의지를 전혀 없었는데 어찌 신라의 삼국통일인가?

3. 676년 신라가 당과 전쟁을 벌린 것도 당이 백제. 고구려 영토를 혼자 독식한 것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당이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드디어 신라를 집어 삼키려 했기 때문이다.

4. 턱없이 신라를 미화한 김부식의삼국사기에도, 고려. 조선시대에도 신라의 삼국의 통일이란 표현이 없었다. 일제시대부터 의도적으로 신라의 삼국통일이란 말을 쓰기 시작했다.

5. 일제가 신라의 삼국통일이란 표현을 쓰기 시작한 의도는 발해를 조선의 역사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한 술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금 중국이 고구려를 한국의 역사에서 떼어 내려고 하는 것처럼.... (일제는 조선통치기간동안 조선의 역사서, 특히 고대사와 관련된 서적을 20만 권이나 수거해 불태웠다. 조선역사의 말살을 위해서.)

6. 신라의 삼국통일이 아니라, 당나라의 고구려.백제 침략에 신라가 병참기지 역할을 한 것 뿐이고 (미국의 이라크 침공시 쿠웨이트 역할처럼), 그 삼국시대 이후는 남북국시대(북 발해, 남 신라)라고 해야 옳다.

-우리역사에서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됐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이것은 허구이다. 사실 신라는 당의 물자를 보급하는 병참 역할만 주로 했고, 실제로 신라가

참전해 전투를 한 것은 황산벌 전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고구려와 전쟁도 나당 연합군이 한 것이 아니었다. 신라는 당시 고구려와 전쟁에 참여한 적이 없었다.

 

삼국시대 고구려의 영토는 서쪽으로 몽골의 고비사막에 연접해 있었고, 서남쪽은 북경성 가까이, 북쪽은 흑룡강, 동북쪽은 사할린의 대안에 까지 이르고 있다. <三國志 魏志 東夷傳>

불행이도 이런 영토론은 세칭 재야 사학이라는 이름으로 밀려나 있다. 그러나 현행 국정교과서에 수록된 삼국의 영토는 52이다. 현재 남북한 면적이 22이니까 만주땅에 30의 영토가 있었다. 그런데 삼국 통일이 이뤄졌을 때의 면적은 약13이다.

그렇다면 삼국시대 총면적 52신라통일 이후에는 13로 줄어들었으니, 실제로 잃은 영토가 39가 된다. 우리는 결국 75%의 영토를 잃은 셈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춘추가 삼국전쟁을 일으키고 끝내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킴으로써 한국사의 뼈아픈 비극을 가져온 이유는 무엇일까?

김춘추의 딸이 백제와 국경인 대야성 도독 품석에게 출가하였는데, 선덕왕 11(642) 백제장군 윤충의 침략으로 일가가 몰살을 당하는 비극의 원한으로 김춘추가 당이라는 외세를 등에 업고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의 아들 문무왕(法敏) 때는 고구려마저 멸망시켜 삼국의 국토 75%를 잃게 되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영토의 상실 이외에도 웅혼(雄渾)한 대륙적 기마민족이 반도적 하천 문화의 농경민족으로 몰락했다.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중국의 연호를 쓰며, 중국의 복식을 받아들이고, 중국으로부터 왕위를 받는 소위 사왕(賜王)제도에 의한 종번(宗藩)관계가 형성됨으로써 그 광활하던 제국이 졸지에 약소국가로 몰락했다. 이는 남방민족이 외세를 등에 업고 북방민족을 멸망시킨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경순왕의 후손으로 턱없이 신라사를 미화하여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도 삼국통일이란 말을 쓰지 않았고,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도 삼국통일이란 말이 없었지만,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지 사학자들이 삼국통일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김춘추와 김유신을 영웅으로 우상화하기 시작했다.

 

일제는 한국을 강제 병탄한 직후인 191011월부터 다음해 12월까지 헌병과 경찰을 동원, 전국 각지의 서사, 향교, 서원 등에서 우리나라의 각종 사서 열전 충의록 등 20여만 권을 압수한 것을 비롯, 37년까지 5차례에 걸쳐 단군관계 기록 등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수많은 서적을 압수해 불태워 버린 사실이 밝혀졌다.

단군을 신화인 것처럼 조작, 조선 상고사를 말살했다.

이와 함께 일제는 새로 조선사를 편찬하면서 단군을 신화인 것처럼 조작, 조선 상고사를 말살했다.(중략)

조선에는 고래의 사서가 많으며 또한 새로이 저작된 것이 적지 않다. 그러한바 전자의 것은 독립시대의 저술로서 독자로 하여금 독립국의 구몽(舊夢)에 빠지게 하고 한국통사 등 후자는 인심을 심히 고혹케 한다. - ‘조선사 편찬 요지중에서

 

조선총독부가 191010월부터 발행한 관보를 통해 이 같은 사실이 확인됐다.

조선총독부는 당초 3년 계획으로 한국의 고사서류를 모두 씨를 말리려했으나 전국도처에 산재해 있는 관련 서적이 수색할 때마다 계속 쏟아져 나오자 그 기간을 조선사편찬이 완료되기 직전인 1937년까지 연장했다.

일제는 연 259명을 동원해 출장 보내 1921년부터 37년까지 수색하여 입수한 사서만도 경기도에서 1,427, 충북 235, 충남 332, 전북 441, 전남 650, 경북 615, 경남 197, 황해 22, 평남 4, 평북 69, 강원 83, 함남 534, 함북 20책 등 4,950책이고 수색범위는 대마도(127)까지 뻗쳤다.

 

2. 新羅人 시각 그대로 답습한 三國統一論

현 국사학계의 통설로 자리 잡은 삼국통일 예찬론은 일제 식민사학의 논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일찍이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가 그의 저서 조선사”(朝鮮史)에서 삼국의 불안전한 통합을 신라의 삼국통일로 규정했다. 그 후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신라의 반도통일등으로 다시 정리하였다. 친일 사학자들도 근대사학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 그 논리를 그대로 수용했다. 그러나 일본인 학자들의 신라 삼국통일론은 그들의 전략적 목표인 만주, 즉 발해의 역사를 한국사의 범주에서 배제하려는 만선사관(滿鮮史觀)의 추악한 음모의 산물이었다. 현재의 삼국통일 예찬론이 차지하는 사학사적 위치는 자명해진 셈이다.

 

3. 삼국 통합은 한반도정책의 부산물

의자왕은 그 아버지인 무왕의 뒤를 이어 641년 왕위에 오르자마자 신라에 대한 공격을 한층 강화하였다. 그는 즉위한 이듬해 내신좌평 기미(岐味) 등 유력한 귀족 40여명을 숙청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동시에 각 지역을 순행하면서 백성들을 위무하고 죄수들을 다시 심사하여 사형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풀어주는 민심수습책을 펼치는 등 국내정치의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의자왕은 2(642) 7월에 이런 조치를 토대로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하여 40여 성을 함락하였다. 이어 다음 달에는 윤충(允忠)을 보내어 신라 공격의 전략적 요충인 대야성(大耶城·경남 합천)을 확보하였다. 이에 신라는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청병하였지만 거부당했다. 오히려 그 다음해 백제가 고구려와 화친관계를 맺고 신라에 대한 공격을 본격화했다.

 

신라의 김춘추가 제안한 동맹관계를 고구려가 거부한 이유는 백제 성왕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한강 유역의 반환문제 때문이었다. 고구려가 신라에 빼앗긴 한강 유역의 반환을 요구하고 나서는 바람에 김춘추는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김춘추는 진덕여왕 2(648) 구원을 요청하기 위하여 당나라로 들어갔다. 고구려 정복에 골몰하고 있던 당 태종으로서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당의 입장에서는 고구려의 배후에 있는 신라를 자신의 세력권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당나라로서는 고구려를 정복하지 않는 한 자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가 유지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신흥세력인 북방의 돌궐(突厥)과 연합하여 중국대륙을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제국을 건설하려는 야심을 가졌던 당 태종은 국내의 반전론과 민심을 무마하는 한편 돌궐 등 주변 민족을 정복하면서 고구려 침략을 준비하고 있었다.

 

4. 한강 이남 영유가 三國統合戰果

관련자료

댓글 1

정해관님의 댓글

 베이컨은 영미 근대철학자로서, 경험론의 아버지라 불린다. 귀납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려하는데, 스콜라철학을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운 점이 많이 있었다. 그것들을 정리해서 '4대우상'이라 하였다.

4대우상은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을 말한다

1. 종족의우상 -(인간적편견) 이때 종족은 우리 종족인 인간을 말한다. 즉 인간주의 사고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편견과 선입견을 말한다. 예를 들면 베짱이는 게으르다든지, 번개가 치면 하늘이 화를 내고 있다든지 하는 표현 등이 이에 해당한다.

2. 동굴의우상 - (개인적편견) 이 때 동굴은 우리나라 속담 중 우물안 개구리의 우물 같은 뜻이다. 즉 동굴에 갖혀서 자기식대로 이해하고 자기가 배우고 아는대로만 모든 것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식이다.

3. 시장의우상 - (언어적편견) 시장에 가면 많은 사람들이 언어로 사람을 현혹시키고 잘못된 정보가 나돌기도 하며 이게 진실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를 시장의 우상이라고 베이컨은 말하였다. 즉 언어사용에서 오는 현혹이나 오해, 그리고 소문 등에 의한 진실 왜곡이 속한다.

4. 극장의우상 - (권위로부터오는편견) 극장에 가면 배우들이 참 멋있어 보인다. 그처럼 극장의 우상이란 다른 사람의 권위(돈 명예 지위 직업 등) 때문에 현혹되거나 선입견을 갖게 되어 오는 편견을 말한다. 히틀러도 이 극장의 우상을 잘 이용해 사람들을 현혹시킨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사랑방 이야기는 어떤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이나 편견의 시정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는 서원의 발로입니다.

 

 

 


가정회 은행계좌

신한은행

100-036-411854

한국1800축복가정회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