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원빌딩 이상화 경비원
컨텐츠 정보
- 0댓글
-
본문
통일그룹 본부가 있는 도원빌딩에 이상화 경비원이 있습니다.
경비원으로 근무한지 일년이 조금 지난 것 같습니다.
금년 나이 60인 그 사람을 여기 올리고자 합니다.
1960년대 중반 광주에 있는 사레지오고등학교 3학년 겨울 방학때
그의 집 근방 시내버스 승강장에서 광주 중앙여고생이 큰 화판을 들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집에 돌아온 후 그 여학생을 잊을 수가 없어서 이름도 모르는 그 여학생 이름을 희경이라고 짓고 매일 매일 그 여학생을 그리워 하면서 생활보고 겸 사랑을 고백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새벽 교회 종소리에 깨어나서는 희경이가 밖에서 상화씨 하며 부르는 것으로 착각하고 가게에서 구입한 마리아상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그리움에 젖은 시를 쓰기도 했습니다.
대학을 전남대 상대를 갔는데 선배들이 신입생 환영파티를 열어 준다고 초청한 술집에서 여자가 옆에 앉는 것을 질색을 하고 튀어 나오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만약에 희경이가 지나가다가 그 모습을 본다면 얼마나 실망하겠는가고 스스로 질책을 한 것입니다.
평소 충장로 번화가를 지나가더라도 옆을 보거나 지나가는 여자를 쳐다보지 안했습니다.
항상 희경이가 자기를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였습니다.
그러다가 교회에 입교했고 학훈단 교육을 받고 장교로 입대했지만 여자 친구는 없었습니다.
언젠가 만날지도 모른다는 희경이에 대한 사랑과 기대가 조금은 걱정스러운 방향으로 갔습니다. 옆에서 보는 저의 생각도 걱정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 써 놓은 희경이에 대한 온갖 문서들을 없애고 희경이를 죽여야 네가 산다는 말을 심각하게 전하면서 결단을 촉구했습니다.
얼마후 희경이는 죽었다고 선언하는 간단한 의식을 둘이서 행하고 이제부터는 희경이가 없는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고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희경이 관련한 문서도 없애 버린 것입니다. 대위로 예편한 후 세상 기업체에 취직했습니다.
몇년이 흐른 후 1800가정 약혼이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먼저 약혼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늦게라도 축복에 참여하겠다고 해서 어떻게해서 서류를 접수하고 맨 나중에 참여했습니다.
아버님께서 그 사람을 보시더니 네가 정할래 내가 정해 줄까 물으셨는데 자기가 정하겠다고 해서 한 사람을 지목했습니다. 그 사람은 학력이 국졸이였기때문에 후회하지않겠는가 세번을 물으시고 원하는데로 허락해 주셨습니다.
축복 행사장에 처가집에서는 많이 왔는데 친가에서는 한 명도 오지않았습니다. 가문이 다 반대한 것입니다. 부인 임지가 결정되고 매월 임지에 가서 담임 목사님에게 그 동안 문제가 없었는지 묻고 이 번 달에는 이런 책을 읽게해달라고 책도 사주기도 했습니다. 당시 전신환으로 생활비들을 보낼 때인데 이 사람은 매 월 임지에 가서 생활비와 용돈을 직접 전해 주면서 책을 많이 읽으라고 권하기도 했습니다.
임지생활이 중반에 접어들 무렵 부친이 전직 경찰관이였는데 혈압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남이였기에 상주가 되어 그 동안 결혼문제로 소원했던 가족과의 관계도 어느 정도 정상화 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지만 장례식을 끝내고 이혼을 결심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누구의 설득도 통하지 안했고 끝내 적당한 위자료를 주고 이혼을 했습니다. 아직 혼인 신고도 안했지만 도의상 위자료는 줘야한다는 자신의 판단으로 그렇게 마무리를 했습니다.
이혼한 분이 6천가정때 축복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후 세상으로 결혼을 했습니다.
그 후 360만쌍때 기성축복을 받았습니다.
슬픈 소식은 6천가정때 축복받은 분이 첫애기 출산과정에 잘못되어 승화하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도 나중에야 이 소식을 들었지만 안타까움만 더 했을 뿐 어쩔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드리는 것이였습니다.
이상화씨는 로켓트 건전지 회사를 모기업으로 한 세방그룹에서 순탄한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그룹 상무로 퇴직한 후 6개월을 보낸후 도원빌딩 경비로 근무하겠다는 것을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고 본인의 솔직한 마음인 것을 알고 다리를 놓아주었습니다.
평소 아는 식구들도 많이 출입하는 곳에서 경비원으로서의 도리를 다 한다는 것이 쉽지않겠지만 본인은 늘 입가에 웃음을 잃지않고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절도있는 경례를 합니다.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청소년 시절 희경이를 생각하면서 자기를 지켜낸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그렇게 하기 어려운 일을 한 것 같아 나의 목회생활 중 가끔씩 생각케 되는 대목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한강로 교회 장로로 40년 우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관련자료
-
이전
-
다음
가정회 은행계좌
신한은행
100-036-411854
한국1800축복가정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