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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어느날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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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내나이는 스물 중반이었고 사는곳은 신림동

경찰 주택인 이모님댁이었다.

이종사촌 동생들이 어려서 늘 데리고 놀았는데

뭐~~애기보는것이 맞는말이다.

그날도 날씨는 청명 하고 햇볕이 좀 따갑기는한

여름초 였던것 같다...

동네 수퍼 앞에 여인들이 챙이 긴 모자를 쓰고 전단지 같은것을

들고 댕긴다....뭘까? 심심해 죽것는데 나한테도 좀 한장 주지..

서너명이 한조인것 같은데 여기 저기 동네에 깔려 있다.

그런데 묘하게도 나한테는 그 종이를 안준다,

나를 피해 다닌다. 왜 그럴까?

아무튼 그땐 그랬다. 그렇다고 따라가서 달라고 하긴 싫다,

내가 뭐시기가 아쉬워서~~~

지들이 아쉽지~~흥! ..

아무튼 이종 사촌 동생 을 데리고 집에 와서 딩굴 거리고

노래를 흥얼 댔다. 저녁이 되어 밥도 짓고 시골간 이모님께서 돌아 오셔서

또 딩굴 딩굴 놀았다.

직장 사표 내고 이젠 시집 가려고 집에 있는거다 .

천안 사는 큰 고모님이 경찰 하는 총각 한테 시집 가라고

하신다....생각좀 해보구요~~

하여간에 저녁이 되어 테레비를 틀었다 뉴스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 낮에 여의도 에서 치루어진 통일교회 행사 구국 세계대회는

문선명 목사의 연설을 듣기 위해 수많은 군중들로 붐비고 교통이 혼잡하니

돌아서 가주시를 바랍니다 하며 어쩌구 저쩌구

이러쿵 저러쿵 하더니 낮에 챙모자 씨고 활동한 여인들이 나온다.

아하??오늦낮에 바로 저거구나..근데 통일교는 뭐고 문선명은

또 뉘기여 첨들어 보는 단어 들이네 ..

내입에서 아버님 존함을 처음으로 부르던 순간이고 통일교회란 말도 처음으로

해본때가 그때다.......그런데 난 구국세계대회에 참석 못했다.

왜냐 하면 그때 신림동 에서 활동한 18 가정들이 내겐 그 전단지를

안주었기때문이다. 그거 누구여 그때 신림동 경찰 주택에서 활동한 성님들

나오랑께 그게 뉘기여 시방 나와보라구요...가만 안둘 것이여 그 역사적인 장소에 못갔으니.하하하하..

왜 나는 안주었는지 꼭 알고 싶다.....

지금은 2009년 그러니까 가설나무네 34년 전이네 ....

까마득한 옛날이야기 이다. 그러나 나는 그후 승공 연합을 통하여 교회 입교 하고

구국세계대회 책자를 보고 참 많이 눈물을 흘렸다.

너무도 감동 해서 ..그때 우리 뜻이 더 활성화 되어 우리나라를 구해야 했었는데..

너무 양반 처럼 당하기만 하고 남을 탓할줄 모르고

우리는 그저 섭리가 그러려니 늘 사탄이들에게 당하는 것이 당연 한줄 알았고

우린 그래서 하느님은 슬픈 하나님 하며 덤빌줄도 모르고 바보 처럼

살았네....이젠 그러지 마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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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2

parksinja님의 댓글

구국세게대회 야그가 나오니 정말 옛날 이야기 입니다...
휘장 두르고 전단지 돌리던 일이 떠 올렬집니다.
1800홈에 불이 붙었어요.

문정현님의 댓글

노숙언니!~

기억력이 어제일 처럼 30여년전의 일을
또렷하게 뉴스멘트까지 기억을 하시네요.
건필하이소.

1800 홈에 머물던 시간이
행복한 무대였다고 노래하면서... 그렇게
살아갑시다.

유노숙님의 댓글

이경란/ 그 고생 하던 때가 왜 그립냐 하면 그때에 우리는 이상 세계를 꿈꾸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기 대문이고 그리고 젊었기 때문입니다.

고생 많으시지요? 늘 건강 하세요. 불청객이 들어 와서 선배님들 서러윤 세월 떠올리게 합니다.

이 경란님의 댓글

솔방울 장작 나무 떼는곳 방에다 가득하게 채워놓고 밤새도록 지키는데 인생을 배웁니다, 불씨는 어떻한 일이 있어도 꺼지지않아야 해요, 어찌 우리 그날을 잊을 수가 성동구 성동 교회에서 문 평래 회장님 무서운 회초리 아실런지요, 대원들 몰래 주체 만나러가고 인원 파악 대표로 나 맞은 기억 잊기로 하였는데 또 생각 하게 하시는 군요,우리 삼위기대 임 정순 민 경자, 정말 고생을하고 쓰레기 통 옆에서 졸던 그때가 그래도 좋았어요,

유노숙님의 댓글

kmryel.고종우 .안상선 .리플 감사합니다
하하하하..고종우언니.이거 계속 기다리면 누가 신림동에서 활동 했는지 나오겠네요.
허리 다치신데는 이젠 괜찮겠지요? 하하하하..

고종우님의 댓글

발뺌하자 아이들 처럼 나는 아냐 아니라구~~
나는 면목동에 서 활동했다구

푸른교회 지으며 기와 잇다가 지붕꼭대기 에 네명이 올라가니
가파른 에이 타입 성전 세워논 사다리가 일어서며
와르륵 무너지는 바람에 쿵~~꽝
그야말로 지붕에서 떨어져

일부는 타박 상 나는 허리가 다쳐서 활동은 제대로 못하고
면목교회 430 가정 백 장노님한테 침을 많이 맞았는데
그분 지금 어디계신지 갑자기 궁금 하네요.

kmryel님의 댓글

아 ! 그러셨구나 그때 나도 외국형제 자매들과 곳곳에 다녔지요.
18홈도 18대부터 상당히 활성화가 되어가고 있는 분위기이고 참여률이 많아지고 있어요
해가 지나면 방문하는 비율이 적어지지나 않을까 걱정을 했었는데, 몇형제 자매들의
열화와 같은 참여와 권유로 들어오는 분들도 많아지고 있고 좋아지고 있음이 기쁨니다.

유노숙님의 댓글

정해관 .조향삼. 이순희. 선배님들 늘 사랑방을 열어 놓고 사시는군요
글쎄 나한테만 그 전단지를 안주고 비켜 가니 참 희안합니다.

그해 11월 20 일에 입교는 했습니다. 묘한 인연으로요...근데 역시 인터넷은 18 선배님 시대인것
같습니다. 정말 잼있는 홈이네요...시원 시원 하구요..

이순희님의 댓글

구국세계대회를 다시한번 떠올리게 해주셨군요.
뜻을 좀 늦게알았다고 억을해할거 하나도없습니다.
지금 먼저 된자를 부끄럽게 하고있는거 같은데요뭐........

조항삼님의 댓글

묘한 에피소드가 비일비재 하겠지요. 추억의 한 장면을
Comic하게 묘사하셨군요.

누구 보다도 조상의 공적이 좋은 분 이시군요.

정해관님의 댓글

1975년! 하면 18가정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그런 해인데, 노숙씨가 역사적인 증언을 해주어 또 의미가 있네요. 유난히도 추웠던 그해 2월 8일에 천주사적인 뜻을 지닌 1800가정 축복식이 있었고, 아마도 현재까지의 기록으로는 가장 많은 수가 운집한 '여의도 구국세계대회'가 열리는 해 였어요.
그리고 그날 전단지를 주지 않았던 사유는 영계에 가면 확인 될테고, '적당한 때'에 뜻을 알게하여 6000가정의 복을 받도록 하신 '하늘 봉황'의 깊은 뜻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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