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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황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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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
관련이슈 : 설왕설래
말은 중요하다. 의사소통의 주요 수단이 말이기에 그렇다. 말 한마디가 상대에게 기쁨을 주기도 하고, 절망감을 안기기도 한다. 하지만 말을 아무리 잘해도 그 혀끝에 독이 묻어 있으면 위험하다. 폭력보다 더 무서운 게 말일 수도 있다. 그래서 말은 인격이자 생명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좋은 말,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따뜻한 말, 우정과 사랑이 담긴 말,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하도록 해야 한다.
문제는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는 일이 일어날 때다. 웬만큼 수양이 없이는 독한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부어야 속병이 없을 텐데. 어떻게 해야 할까. 중국이 낳은 문호 루쉰은 충고한다. “말로써는 충분한 분노를 표현할 수 없다. 침묵만이 최고의 경멸이다.” 침묵, 곧 무언(無言)이다. 부딪치고 원한의 골을 깊이 파는 것에 견줄 수 없을 만큼 좋은 방법이다. 더 좋은 대안도 있다.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도록 자기 마음 그릇의 크기를 키우는 일이다. 경청이다.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은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유교의 인(仁)이자, 서구의 관용 정신이다. 불가에서 욕심·화냄·어리석음의 이른바 삼독(三毒)을 경계하라는 것도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소통하고자 하는 커뮤니케이션 욕구가 있다. 그렇다고 아무 말이나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소통은 자신이 일방적으로 말하기 위한 게 아니다. 상대방의 말을 제대로 들으면서 서로 이해하고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이해받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의 인간관계에서 소통은 언제나 안갯속에 있다. 가족끼리도 대화가 제대로 안 되는 경우가 적잖다. 하물며 복잡다기한 오늘날의 사회생활에 있어서랴. 소통의 문제는 우리 사회의 인류학적 문제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임금 종사자는 의사소통에 뛰어나다는 한국고용정보원의 분석 자료가 나왔다. 좋은 직업을 갖고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선 언행에 신뢰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런 인재가 모이면 회사도 발전할 것이다. ‘구변 좋고 믿음 주는 현대판 소진·장의를 찾습니다!’
황종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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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개
정해관님의 댓글
否卦 蘇秦將遊說六國 卜得之後 果爲相矣
춘추시대 연의 책사 소진이 장차 여섯나라를 유설하고자 천지부괘를 얻으니
여섯나라를 설득하여 동맹을 맺고 봉토를 받았다
소진(蘇秦) (?∼?)
중국 전국시대 중엽에 활약한 종횡가(縱橫家).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사람. 장의(長儀)와 함께 귀곡자(鬼谷子)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처음에 진나라 혜왕(惠王)을 비롯하여 제후 밑에서 유세를 하였으나 채용되지는 않았다.
그 후, 강국인 진(秦)과 한(韓)의 두 나라가 서로 교전하고 있어서 산동 지방의 제국들은 진나라의 침략을 두려워하고 있던 때이므로, 소진은 연(燕)나라의 문후(文侯)에게 6국 합종(合縱)의 이익을 설득하여 합종책을 성사시켰다. 다시 조趙 漢 魏 齊 楚의 여러 나라를 설복하는데도 성공하여, 드디어 서기전 333년 연나라에서 초나라에 이르는 남북선상(南北線上)의 6국의 재상이 되었고, 스스로 무안군(武安君)이라 칭하여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이 때문에 동방으로 진출을 꾀하던 진나라는 십 수년간 그 진출을 저지당했다. 그러나 그의 합종책은 장의 등이 헌책한 연형책(連衡策 : 連橫策이라고도 함)에 패배하여 실패하였다.
장의 [張儀, ?~BC 309]
중국 전국시대 위나라의 모사. 소진의 주선으로 진나라에서 벼슬살이를 하게 되어 혜문왕 때 재상이 되었다. 연횡책을 주창하면서, 위 · 조 · 한나라 등 동서로 잇닿은 6국을 설득, 진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동맹관계를 맺게 하였다.
(국적) 중국 전국시대 위(魏)
(활동분야) 정치
종횡가(縱橫家)의 비조. 합종책(合從策)을 제창한 소진(蘇秦)과 더불어 귀곡선생(鬼谷先生)에게 사사하였다. 처음에 초(楚)나라에 가서 벽(璧:옥으로 만든 儀器)을 훔친 혐의를 받고 태형(苔刑)의 벌을 받은 뒤 추방되었으나 제후에 대한 유세(遊說)를 계속하였다. 소진의 주선으로 진(秦)나라에서 벼슬살이를 하게 되어 혜문왕(惠文王) 때 재상이 되었다.
연횡책(連衡策)을 주창하면서, 위(魏)·조(趙)·한(韓)나라 등 동서[橫]로 잇닿은 6국을 설득, 진(秦)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동맹관계를 맺게 하였다. 혜왕이 죽은 뒤 실각, 위나라로 피신하였으며 재상이 된 1년 만에 죽었다. *
춘추시대 연의 책사 소진이 장차 여섯나라를 유설하고자 천지부괘를 얻으니
여섯나라를 설득하여 동맹을 맺고 봉토를 받았다
소진(蘇秦) (?∼?)
중국 전국시대 중엽에 활약한 종횡가(縱橫家).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사람. 장의(長儀)와 함께 귀곡자(鬼谷子)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처음에 진나라 혜왕(惠王)을 비롯하여 제후 밑에서 유세를 하였으나 채용되지는 않았다.
그 후, 강국인 진(秦)과 한(韓)의 두 나라가 서로 교전하고 있어서 산동 지방의 제국들은 진나라의 침략을 두려워하고 있던 때이므로, 소진은 연(燕)나라의 문후(文侯)에게 6국 합종(合縱)의 이익을 설득하여 합종책을 성사시켰다. 다시 조趙 漢 魏 齊 楚의 여러 나라를 설복하는데도 성공하여, 드디어 서기전 333년 연나라에서 초나라에 이르는 남북선상(南北線上)의 6국의 재상이 되었고, 스스로 무안군(武安君)이라 칭하여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이 때문에 동방으로 진출을 꾀하던 진나라는 십 수년간 그 진출을 저지당했다. 그러나 그의 합종책은 장의 등이 헌책한 연형책(連衡策 : 連橫策이라고도 함)에 패배하여 실패하였다.
장의 [張儀, ?~BC 309]
중국 전국시대 위나라의 모사. 소진의 주선으로 진나라에서 벼슬살이를 하게 되어 혜문왕 때 재상이 되었다. 연횡책을 주창하면서, 위 · 조 · 한나라 등 동서로 잇닿은 6국을 설득, 진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동맹관계를 맺게 하였다.
(국적) 중국 전국시대 위(魏)
(활동분야) 정치
종횡가(縱橫家)의 비조. 합종책(合從策)을 제창한 소진(蘇秦)과 더불어 귀곡선생(鬼谷先生)에게 사사하였다. 처음에 초(楚)나라에 가서 벽(璧:옥으로 만든 儀器)을 훔친 혐의를 받고 태형(苔刑)의 벌을 받은 뒤 추방되었으나 제후에 대한 유세(遊說)를 계속하였다. 소진의 주선으로 진(秦)나라에서 벼슬살이를 하게 되어 혜문왕(惠文王) 때 재상이 되었다.
연횡책(連衡策)을 주창하면서, 위(魏)·조(趙)·한(韓)나라 등 동서[橫]로 잇닿은 6국을 설득, 진(秦)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동맹관계를 맺게 하였다. 혜왕이 죽은 뒤 실각, 위나라로 피신하였으며 재상이 된 1년 만에 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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