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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행적과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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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매력적이다. 그러나 누구도 한꺼번에 두켤레의 신발을 신을 수는 없다. 


세계적인 기부의 왕으로 알려진 찰스 프란시스 척 피니(Charles Francis Chuck Feeney)의 언어입니다. 


 "죽어서 하는 것보다 살아서 하는 기부가 더 보람있고 즐겁다" 라는 소신과 신념으로 살아온 그는 그 소신의 실천으로 가진 재산 전부를 마저 기부하고, 5남매를 훌륭하게 길러낸 아내 다니엘 피니와 함께 재단 소유의 임대아파트에서 만년의 삶을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일랜드 출신으로 이민 노동자였고, 그는 1931년, 뉴저지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그가 태어난 때에는 대공황의 시기로서, 미국 경제가 역사상 최악의 늪에 빠져들고 있는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아버지가 뉴저지의 작은 보험회사에서 일을 하였고, 어머니는 간호사였던 탓으로 그리 넉넉치는 않았으나 어려운 대공황기를 버텨낼 수는 있을 정도였다 합니다. 물론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말입니다. 


그같이 어려운 환경을 보고 자란 탓인지, 어렸을 적부터 그는 자신의 생활비는 스스로 해결하야 한다는 강한 자립의지를 세웠고, 그것은 그로 하여금 소년 시절부터 크리스마스 카드나 우산 등을 파는 소년 비즈니스맨이 되게 합니다. .  


그는 코넬대학 호텔경영학과를 진학하게 되었고, 재학시절에도 샌드위치 장사로 사업가의 기질을 발휘하면서 돈을 벌어들이게 됩니다. 이는 타고난 사업가의 기질과 수완이 드러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장면 중 하나라할 것입니다. . 


대학공부를 마친 후,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 공군으로 근무했던 경험과 기반을 살려 미군 함정에서 면세 술을 파는 것으로 비즈니스맨으로서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고, 그것을 기초하여 29세의 젊은 나이였던 1960도에 친구와 함께 DFS(,Deputy Free Shopper Group)를 창업하게 됩니다. 다시말하면 면세점 공동창업을 한 셈입니다. .  


그같이 사업이 성장해감에따라 그는 1970년대에 연간 30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회사로 그 업체를 키워냈고, 직원만도 5천 여명을 거느리는 기업이 되게 하였으며, 1988년도엔 무려 1조 5천억원(13억 달러)에 달하는 자산가치를 지닌 대기업으로 육성시키기는 데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그해 포브스는 23번째의 부자 순위에 그의 이름을 오르게 하였으니 그의 비즈니스 능력과 안목은 정말이지 탁월했다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쓰지 않고 아낄 줄만 아는 그 습관성 절약정신과 신념은 누구도 따를 수 없었고, 흉내낼 수조차 없을 만큼 철저했던 것으로, 그의 삶과 생활은 구두쇠라는 별명이 붙어다닐만큼 검소했다 합니다. 구두쇠로써, 수전노의 다름 아니었다할 정도로 말입니다. 


실제로 그는 직원들에게 서류작성시 지면의 뒷면까지 꽉 채워쓰게 하였을 뿐 아니라, 소송에 휘말렸을 땐 변호사 수임료까지 깍아내리려 했던 것으로 유명세를 타기도 합니다. 심지어 그는 경제인 모임 자리에서 찻값이나 식사비용을 내지 않으려는 속셈으로 자리를 먼저 뜨는 무경우 사태를 일으키는 행동까지를 서슴지 않았고, 그같은 사실은 소문이 되어 널리 퍼져나가게 된 것으로 그 소문은 그의 이미지가 되었는다는 것입니다. 


그때문에 당시 그는 냉혹한 자로서, 돈만 아는 무자비한 갑부로 평가되어 알려지고 있었고, 그것 또한 소문이 돼 재계는 물론, 시장에까지 널리 퍼져나가게 됐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그는 1997년,  DFS(면세점)를 매각하는 과정에서 법적문제에 휘말리게 됩니다. 그때문에 그의 회계장부는 언론을 통해 낱낱히 공개 되어 미 전역으로 퍼져나가게 되었고, 그것은 미국사회를 충격에 빠져들게 했던 것입니다. 미국사회가 발칵 뒤집히다시피 했다 하니까요. 


뉴욕컨설팅이란 회사 이름으로 15년 동안 무려 2천 9백회의 지출로 자그마치 40억 달러(4조 4천억원)의 거액이 은밀하게 빠져나간 탓으로 사람들은 그가 그 엄청난,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액수의 그 돈을 비자금으로 빼돌렸을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거액의 실체는 곧 드러나게 되었고, 그로인해 미 전역은 또 한번 놀라움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 엄청난 액수의 전액이 기부금으로 빠져나갔음이 확인됐기 때문입니다. 

 

그는 1982년, 아틀란틱 재단을 설립하여 그 재단을 통해 세계 각국에 있는 자신의 자산 99%를 기부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모교인 코넬대학에 6억 달러, 캘리포니아 대학에 1억 3천만 달러, 스탠포드 대학에 6천만 달러, 그리고 아버지의 조국인 아일랜드 고등교육원에 10억 달러를 기부하였던 것으로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억만장자가 될 수 있도록 교육을 제공한 코넬대학에 감사의 뜻을 전한다며 머를 숙였다 합니다. 


부유한 자의 겸손, 가진 자의 고개숙임, 정말이지 이는 만인이 공경해야할 삶의 정신이요 태도로써, 본받아야할 값을 지닌 참의 모습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무엇이 됐든  얻기 위한 고개숙임은 일반화된 것으로 허다하게 볼 수 있지만, 가진 것 모두를 주고 베풀면서도 고개를 숙이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님은 물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선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 시조로써, 아담과 이브를 세세토록 후세대의 본이 되는 인간상이 되게 하려 했던 게 창조주의 꿈이었다면, 바로 이같은 행적의 모습이 그들에게 갖춰질 행의 덕목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계명으로 주신 명을 믿음으로 숙성해야할 과정에서 갖춰지게 해야할 것으로 말입니다. 한 생을 살아가는 동안 누리기 위해 필요했고, 누리기 위해 취했던 그 모든 당대의 소유를 두고 간다는 것으로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1990년대 중반부터 미국과 아일랜드를 넘어 베트남과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의 개발도상국으로 기부를 확대시키면서 그 나라의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수술비를 제공하였고, 급성 전염병 퇴치를 위해 거액의 기금을 쾌척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비밀리에 시작했던 그의 기부행적은 결국 드러나게 됐지만, 그래도 그는 끝까지 자신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도록 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기부를 해왔고, 알려질 경우 해오던 기부를 끊겠노라는 엄포아닌 엄포까지 가하면서 비밀리에 되어지기를 그토록 원했으나, 결국 알려지게 되면서 그의 기부행적은 더욱 존경 받게 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1980년대부터 35년 동안 기부해온 액수가 무려 9조 5천억원 정도나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2000년도부터는 매월 11억원을 기부하게 되었고, 그것은 자신이 죽기 전,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스스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선 그만큼의 액수를 기부해야만 그 약속을 이룰 수 있다는 계산상의 판단이 그렇게 섰기 때문에 그같은 액수를 책정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찰스 척 피니의 소원은 2016년도에 이뤄지게 된 것으로 마지막 재산인 80억 원까지 모교인 코넬대학에 마저 기부함으로서 그 꿈은 비로소 성취됐다 합니다. 


그는 현재 재단 소유의 임대아파트에서 아내와 함께 살아가고 있으며, 1만 4천원짜리 손목시계를 차고 다니면서 이동할 때는 버스를 타고, 비행기를 탈 때엔 이코노미 석을 타고 다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말했다 합니다. "돈은 매력적이다. 그러나 누구도 한꺼번에 두 켤레의 신발을 신을 수는 없다" 라고 말입니다. 


그때문이 그분의 삶이 늘 검소했고, 겸손했으며, 소박했던 것으로 보통 사람으로서, 보통 사람과 함께 있기를 바라는 삶이었고, 그것 행(行)의 육화(肉化)로 살아온 생이 되게 했는 지 모릅니다. 


기업의 지배구조와 경영권 등을 틀어쥐고, 그것 대물림을 위해 온갖 편법과 탈법은 물론 불법까지를 저지르면서, 그 불법 행위를 포기하지 못한 채 끝내 구속까지를 면치 못하는 어느 재벌가의 행태와 비교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라할 것입니다. 그가 걸었던 길은 정말이지 위대함은 물론, 거룩하고 성스럽다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때문에 막스 베버는 자신의 저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본연의 자본주의적 부의 축적과 사회를 위한 기부는 종교적 정신에 토대를 두고 있는 진정한 자본주의의 정신이고 가치라고 언급하면서, 그와는 반대로 자산 무한축적과 그것 대물림을 위해 오직 틀어쥐기만 하는 축재형 자본축적을 투기적 자본주의라 규정하면서, 그것을 들어 천박(Pariah)한 자본주의라고 일갈했는지 모릅니다. 신성한 자본주의 정신을 망치고 있다면서요.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는 195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고, 그 상을 받으러 가기 위해 열차에 올랐습니다. 그 소식을 뒤늦게 알아차린 기자들은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어느 칸에 타고 있는 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여 그들은 특등칸이나 1등칸, 그도 아니라면 2등칸에 그가 타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 칸들을 샅샅이 뒤지면서 그를 찾아나섰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찾지 못했습니다. 그가 가난한 자들의 전용이라할 수 있는 3등 칸에 올라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그들은 3등 칸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고, 그때 그는 그 칸에서 환자를 치료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만난 그는 칸내 인터뷰를 허용하였습니다.  


바로 그때, 한 기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왜 다른 모든 칸을 놔두고 3등칸을 이용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는 답했습니다. "나는 편안한 칸을 찾아다니는 게 아니고 나의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아다니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 


그러면서 그는 "특등이나 1, 2등 칸은 나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라고 덧붙여 말했다 합니다. 


그들은 그곳에 있었습니다. 높았으나 낮은 곳에 있었고, 부유했으나 가난한 자들과 함께 있었으며, 위하여 살라하신 성현의 말씀이 이뤄지는 그곳에 그들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같은 측면에서 그들의 행적은 아름다움을 넘어 의로움을 바탕으로한 거룩함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존경하지 않을 수 없고,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는 그야말로 성자와 같은 본연의 인간 모습의 한 부분으로써, 그 삶의 실체이고 모습들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라믹 종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는 물론 불교나 그외, 여타 종교의 가르침으로 가르키고 있는 표본 인간상의 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는 것으로 말입니다.                


특등칸과 1, 2등칸, "그곳은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를 필요로 하는 3등 칸에 있습니다." 라고 말한 그 분의 언어와 "돈은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두 켤레의 신발을 한 꺼번에 신을 수는 없다" 라고 말한 또 다른 분의 언어가 아름답고 값지게 들리는 건 바로 그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스스로 기업을 일으킨 당대재산가요 당대기업가로써, 소유 재산의 99%를 기부한 후, 임대아파트에서 부인과 함께 만년의 삶을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그 분,

동화 속에서나 만나고, 그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그분, 정말이지 진정한 자유-자연인이라할 수밖에 없는 그분,  바로 그분의 생생하고 거룩한 행적이었고 언어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때문이 그들의 행적과 언어의 의미를 들여다보면서 새겨보게 했던 것 같습니다. .  


타(他)를 위한 이타정신의 화신(化身)으로 살아온 듯한 그들의 행적을요.


2021년 8월 14일 뉴욕에서 

전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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