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소현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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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소현세자
1. 소현세자, 눈물을 뿌리며 청나라로 끌려가다
비운의 왕자로 흔히 호동왕자와 마의태자 그리고 소현세자와 사도세자를 꼽는다. 그들은 모두 정치의 희생양이었다.
후금의 홍타이지가 국호를 청으로 새롭게 하고 황제에 즉위하여 조선에 조공과 명나라 출병을 요구하였다. 조선 국왕 인조가 이를 거절하자 숭덕제는 1636년 12월에 직접 군사를 이끌고 조선으로 출병하였고, 조선은 불과 두 달 만에 항복하였다. 인조는 음력 1월 30일에 삼전도(현재 서울 송파구 삼전동 석촌 호수부근)에서 숭덕제를 향해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하며 항복 의식을 하였다.
1637년(인조 15) 2월 8일 아침, 소현세자는 아내와 동생(봉림대군. 후에 효종)과 계수 그리고 그 밖의 신하들을 합쳐 197명을 이끌고 삭막한 북쪽 땅으로 끌려갔다. 막대한 공물을 바치고 명나라 정벌에 적극적인 지원을 하겠다는 구절을 항복문서에 써야만 했다. 이때 인질 · 포로로 끌려간 우리 백성의 수는 헤아릴 수 없었는데, 뒤에 속(贖)을 바치고 풀려난 수만 해도 63만 명이었다.
이리하여 소현세자는 8년이라는 긴 인질생활이 시작되었고, 이것은 조선에 또 다른 비극을 불러오는 꼬투리가 되었다.
인조 때의 이 비극은 반정 때로부터 비롯되었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쫓아낸 서인 조정은 철저한 존명배청(尊明排淸)의 정책을 폈다. 곧 명나라를 아버지와 임금으로 섬기고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깔보면서 함부로 대했던 것이다.
한편 이괄의 난이 진압된 뒤, 그 잔당들은 청나라로 도망가 친청파인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가 왕이 된 것은 부당하다고 꼬드겼다. 이에 청나라는 명나라에 대한 전면 공격을 잠시 중단하고 후방의 적인 조선을 먼저 치기로 했다. 1627년(인조 5) 1월 14일, 3만의 청나라 군대는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구실로 물밀듯이 내려와 11일 만에 황주에까지 이르렀다.
청 태종이 황제의 존호를 선포하고, 그들의 사신 용골대 등을 조선에 보내어 조선에서도 청 태종을 천자로 받들라고 요구해 왔다.
조선의 척화주의자들은 이것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것은 유가적 사대명분론에 결정적인 손상을 입히는 일로 역적이 하는 짓거리에 속한다고 보았다. 하늘에는 해가 둘이 없고 사람에게는 아버지가 둘이 없듯이 신하에게는 임금이 둘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소현세자는 청의 동정을 낱낱이 의주부윤 임경업 등을 통해 조정에 보고했고, 때로는 비밀리에 정보를 보내기도 했다. 그는 여러 가지 일로 바빴다. 곧 임경업이 거느린 군사가 출병하여 명을 치는 데 돕기도 하고, 김상헌 등의 척화파를 잡아 심양에 가두기도 했다. 또한 포로의 송환문제에도 개입했고, 우리의 부녀자들이 그곳 시장에서 매매되는 꼴도 보아야 했다. 이런 일은 세자의 수완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는 하루도 편할 날 없이 시달리면서 이런 일들을 처리해 나갔다. 심양의 관소는 조선의 대사관이었고, 세자는 조선의 대사였던 셈이다.
세자가 처음 우리나라의 군사를 이끌고 북경 함락에 참여했을 때에는 22일 동안 머물렀고, 다시 심양에 돌아왔다가 청의 세조가 같은 해 9월에 북경으로 새 도읍을 정할 때에 따라가 70여 일을 머물렀다. 이때 세자는 북경 시내를 자유로이 왕래하면서 북경에 와 있던 서양의 천주교 선교사들을 만났다. 선교사들 중에는 그 유명한 아담 샬도 있었다.
세자는 아담 샬과 교류하면서 서양의 천주교를 알았고, 서양의 과학문명에 눈을 떴다. 아담 샬로부터 천주상(天主像)과 서양의 역서 및 과학책을 선물로 받은 세자는 그것들을 면밀히 검토했고 또 심취했다. 세자는 특히 역법에 심취했는데, 동양과 서양의 역법이 크게 다른 점을 발견하고 우리의 천문학이 초보단계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3. 병사인가 독살인가 ?
명을 멸망시킨 청나라는 세자 일행을 오랜 인질생활에서 풀어 주었다. 세자는 1645년 2월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나 세자의 귀국은 인조에게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인조는 청나라로부터 철저하게 반청파로 지목되었을 뿐만 아니라 늘 잔병을 앓으며 시달림을 받는 처지였다. 또 조정은 비록 주화파가 일부 있기는 하나 척화파로 꽉 채워져 있었다.
척화파는 인조의 대청정책을 오히려 미온적이라며 들쑤셔 댔다.
이때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도 상당히 서로 다른 현실관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현세자는 대청외교를 직접 담당하면서 청나라의 힘을 알았기에 청과의 타협을 추구했고, 청의 문화나 서양의 문화를 수용하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반해 봉림대군은 부왕의 뜻을 충실히 받아들여 반청의 감정을 더욱 다졌고, 전통에 따라 서양의 문물을 거부했다.
소현세자는 귀국한 지 석 달 만에 병이 들었다. 세자는 평소에 몸이 건강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야사에서 보는 것처럼 이때 부왕으로부터 벼루로 얻어맞고 나서 생긴 마음병인지, 부왕으로부터 냉담한 대접을 받고 나서 일어난 울화병인지 모르지만, 어의인 박군은 학질이라고 진단을 내렸다. 임금에게 매일 침을 놓던 이형익이 세자의 열을 내린다고 세 차례 침을 놓았는데, 세자가 병이 든 지 사흘 만에 갑자기 창경궁 환경당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 죽음에 대해 당시의 학자인 택당 이식은 소현세자의 묘지문에 이렇게 적었다.
“환궁 이후 연달아 한증과 열기가 있었는데 의원의 시술이 잘못되어 끝내 죽음에 이르렀다.”
4. 세자빈 강씨, 한을 품고 사약을 마시다
소현세자가 죽은 뒤 그의 장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푸대접을 받았다. 명정을 쓸 때에는 평인과 같이 영구(靈柩)라는 말을 쓰게 내버려 두었고 , 기일을 단축시켜 초상을 치르게 했다. 입관할 때에도 참관 인원을 관례에 따르지 않고 제한했으며 무덤의 터를 홍제동으로 하자는 논의에 반대해 멀리 고양의 효릉 뒤에 쓰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다.
더욱이 왕이나 왕자에게 의술을 잘못 쓰게 되면 의관이 문책을 당하는 것이 관례인데 이 논의마저 인조가 물리쳤다.
뒷날 인조는 자신은 병이 깊으니 새 세자를 정해야 한다고 분부했다. 신하들은 원손(元孫, 소현세자의 첫째 아들)으로 대를 잇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으나, 인조는 왕실의 관례를 어기고 열 살의 세손은 마땅하지 않다고 주장하여 끝내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았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소현세자의 남은 세력을 하나하나 제거해 버렸다. 곧 세자빈의 친정오라비인 강문성 · 강문명 등을 무식하다는 꼬투리를 잡아 멀리 귀양 보내 버린 것이다.
세자빈 강씨는 물론, 강씨의 칠순 노모와 어린 친정조카들까지 얽어 죽여 버렸다.
마지막으로 인조는 세 손자를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 이보다 앞서 청나라에서 소현세자와 강씨의 죽음을 전해 듣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의 안부를 묻고 데리고 가겠다는 뜻을 전해 왔었다. 이때에도 조정에서는 이들이 살아 있음에도 “두 아이가 이미 죽었다”고 거짓으로 답했다.
5. 아버지의 명분과 아들의 실리가 충돌하다
인조는 정치적 방향을 사대모화(事大慕華)에 두었다. 결국 광해군을 몰아낸 명분의 하나도 여기에 있었던 것이요, 병자호란을 자초한 것도 여기에서 비롯한다. 그는 청나라의 힘에 눌려 세자를 볼모로 보내는 치욕을 겪으면서 세자가 끝까지 오랑캐에 저항하여 끝까지 절개를 지키길 바랐다.
그러나 인조의 뜻과는 달리 소현세자는 청나라와 타협했다. 이런 소현세자의 행동은 인조의 정치적 기반을 흔드는 것이요, 조선조의 대명(對明) 사대 질서에 반기를 든 꼴이었다. 게다가 소현세자는 서양의 기술과 학문에 심취하여 돌아왔고, 이것을 우리나라에 전파 · 보급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정통적인 유교 정신에도 위배되는 것이었다. 곧 이단 · 사설을 배격하고 유교의 정학(正學)을 높이는 나라의 근본이념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셈이었다.
6.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다지만..
KBS 역사 토크쇼 <역사저널, 그날>에 따르면, 역사를 잘 아는 역사교사들의 설문 ‘우리 역사에서 가장 재생시키고 싶은 인물?’ 1위가 위의 소현세자라고 한다. 만일 그가 정상적으로 왕위에 올랐다면, 마치 정도전의 ‘臣權論’이 영국의 ‘권리장전’보다 앞선 것처럼, 아담 샬을 만나 배우고 익힌 서양문물을 일본의 ‘명치유신’보다 훨씬 먼저 도입했을 수도 있었다는 가정이 성립되고, 그럴 경우 나라의 근대화는 물론, 극심한 천주교 박해도 없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고양 서삼능 주위의 소현세자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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