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名詩7. 歸園田居 其二 ...-陶淵明(도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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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名詩7. 歸園田居 其二 ...-陶淵明(도연명)-
野外罕人事 (야외한인사) 시골이라 인적이 드물고,
窮港寡輪鞅 (궁항과윤앙) 궁벽한 곳이라 오가는 수레가 드물어,
白日掩荊扉 (백일엄형비) 한낮에도 사립문 굳게 닫여 있고,
虛室絶塵想 (허실절진상) 텅 빈 집은 속세을 끊었네.
時復墟曲中 (시부허곡중) 이무렵 옛 마을로 다시 돌아와,
披草共來往 (피초공내왕) 풀섶을 헤치고 함께 오가네.
相見無雜言 (상견무잡언) 서로 만나서 헛된 말 없으며,
但道桑麻長 (단도상마장) 다만 서로 농사일만 묻는다네.
桑麻日已長 (상마일이장) 뽕잎과 삼줄기는 날마다 자라나고,
我土日已廣 (아토일이광) 나의 밭은 하루하루 넓어져 간다네.
常恐霜霰至 (상공상선지) 다만 걱정은 서리 싸락눈 갑자기 닥쳐,
零落同草莽 (영락동초망) 풀더미와 더불어 같이 시들어버리는 것이라네.
감상 : 이 시는 전원에 살면서 느끼는 마음을 묘사한 것이다. 시인의 전원은 세속의 복잡함을 상징하는 ‘人事’와 ‘輪鞅’(車馬의 뜻)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한낮에도 사립문이 닫혀있는 집과 아무런 잡념도 일으키지 않는 빈방은 시인의 세계가 복잡함과 번거로움으로부터 벗어나 있음을 상징한다. 그가 추구하고 있는 전원생활의 단순성은 농부들과의 대화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농사가 잘 되고 있는지의 여부만 물을 뿐 일체 잡스러운 대화가 없다. 시인의 걱정도 농사에 관한 것일 뿐이다.
2. 作家 陶淵明 (陶潛) :
이름은 잠(潛). 호는 오류선생(五柳先生). 연명은 자이다. 동진(東晉) 말기부터 남조(南朝)의 송(宋:劉宋이라고도 함) 초기에 걸쳐 생존했다.
강주(江州) 심양군(尋陽郡:지금의 장시 성[江西省] 주장[九江]) 시상현(柴桑縣:지금의 싱쯔 현[星子縣])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남방의 토착 사족(士族)으로, 북조로부터 내려온 귀족이 절대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당시의 남조 사회에서는 영달의 길에서 소외된 압박받는 계층이었다. 그러나 도연명이 평생 동경했던 증조부 도간(陶侃:259~334)은 동진 초에 장사군공(長沙郡公)·대사마(大司馬:최고군사령관)까지 승진했고, 할아버지 도무(陶茂)도 무창(武昌)의 태수(太守)로 재임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은둔생활을 했기 때문에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어머니는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환온(桓溫)의 장사(長史:막료장)였던 맹가(孟嘉)의 넷째 딸이었다. 도연명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아들이었던 것 같다.
도연명의 첫번째 관료생활은 29세 때 자기가 살고 있던 강주의 좨주(祭酒:州의 교육장)로 취임한 것이었으나 곧 사임했다. 2번째 관료생활은 35세 때 당시 진(晉)나라 최대 북부군단(北府軍團)의 진군장군(鎭軍將軍)인 유뢰지(劉牢之)의 참군(參軍:참모)으로 취임한 것인데 이것 역시 곧 그만두었다. 3번째는 유뢰지의 휘하를 떠난 직후, 36~37세 무렵 형주(荊州:지금의 장링[江陵]) 자사(刺史) 환현(桓玄)의 막료로 취임한 것이다. 그러나 며칠 안 되어 모친상을 당해 고향인 심양으로 돌아가 3년상을 치렀다. 이후 강주자사·참군 및 팽택(彭澤) 현령(縣令) 등의 관료생활은 고향에서 가까운 심양군 안에서 지냈다.
도연명이 10여 년에 걸친 관료생활을 최종적으로 마감하고 은둔생활에 들어간 시기는 의희(義熙) 원년(405) 11월 41세 때였다. 그는 팽택 현령이 된 지 겨우 80여 일 만에 자발적으로 퇴관했다. 퇴관의 결정적인 동기에 관해서는 다음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해 말에 심양군 장관의 직속인 독우(督郵:순찰관)가 순찰을 온다고 하여 밑의 관료가 "필히 의관을 정제하고 맞이 하십시오" 하고 진언했더니, 도연명은 "오두미(五斗米:월급) 때문에 허리를 굽혀 향리의 소인을 섬기는 일을 할 수 있을 손가"라고 말한 뒤 그날로 사임하고 집에 돌아갔다고 한다(〈宋書〉 隱逸傳). 또 한편으로 이때의 사퇴 동기에 관해서 도연명 자신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취임해서 어느 정도 되자 집에 돌아가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럭저럭 벼가 익거든 빠져나가려고 생각하던 차에 누이의 부음이 들려오자 조금도 참을 수 없게 되어 스스로 사임하고 집에 돌아왔다"(〈歸去來辭〉 序). 이때 나온 작품이 유명한 〈귀거래사〉·〈귀전원거오수 歸田園居五首〉이다.
이리하여 도연명은 이후 죽을 때까지 20여 년 간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고향에 은거한 지 3년째 되는 해에 갑작스런 화재로 생가가 타버리자 그는 일가를 거느리고 고향을 떠나 주도인 심양의 남쪽 근교에 있는 남촌(南村:또는 南里)으로 이사해서 그곳에서 만년을 보내게 되었다. 이사한 후 술을 좋아하던 그는 차츰 빈궁한 생활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이사를 함으로써 잃어버린 것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강주의 장관 왕홍(王弘)을 비롯해서 은경인(殷景仁)·안연지(顔延之) 등 많은 관료·지식인과 친교를 맺을 수 있었다. 그가 후세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후에 남조 송의 내각과 문단의 지도자가 된 왕홍과 안연지를 친구로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연명의 시문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4언시(四言詩) 9수, 5언시 115수, 산문 11편이다. 이중 저작연대가 명확한 것이나 대강 알 수 있는 것은 80수뿐이다. 그 밖의 것은 중년기 이후, 즉 그가 은둔생활을 보낸 약 20여 년 간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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