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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典漢詩40. 咸興客館對菊(함흥객관대국) -鄭澈(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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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典漢詩40. 咸興客館對菊(함흥객관대국) -鄭澈(정철)-

            咸興客館對菊(함흥객관대국)

秋盡關河候雁哀, 思歸且上望鄕臺. (추진관하후안애, 사귀차상망향대)

가을도 늦은 변방 기러기 슬피 울제, 집 생각에 잠시 망향대에 올랐더니,

 

慇勤十月咸山菊, 不爲重陽爲客開. (은근시월함산국, 불위중양위객개)

다정한 손 시월의 함산 땅 국화에, 중양절 마다하고 날 기다려 폈을줄야.

 

[()]; 끝나다, 다하다,

[관하(關河)]; 변방, 국경지대,

[후안(候雁)]; 철을 따라 깃들이는 곳을 찾아다니는 기러기,

[사귀(思歸)]; 돌아가고픈 생각,

[은근(慇勤)]; 은밀하게 정이 깊음, 정성스럽고 다정스러움,

[함산(咸山)]; 함흥, 변방,

[중양(重陽)]; 음력 99, 옛날 명절의 하나로 교외로 나가 국화를 술에 띄워서 마시며 시를 짓고 읊조리기도 하였음,

 

1. 작자 소개

정철(鄭澈)의 자()는 계함(季涵)이고, ()는 송강(松江)이다. 1551년부터 고향인 전라도 평창(昌平)에 거주하면서 성산 기슭에서 약 10년간 기대승, 김인후 등의 가르침을 받았다.

 

1584년에는 대사헌이 되었으나 東人의 논척으로 다음해 사직하고 4년간 고향에 돌아가 지내는데, 이때 지은 것이 동방의 이소(離騷)라고 일컬어지는 <전후사미인곡(前後思美人曲)>이다.

 

정치적인 여정이 매우 복잡하나 주옥같은 우리 시가(詩歌) 작품을 남겨 윤선도와 더불어 가사문학의 쌍벽으로 꼽히며, 문집으로 송강집(松江集)이 전한다.

 

2. 작품해제(作品解題)

 

정치로 인한 인생의 굴곡이 많았던 정철이었던지라 그가 지은 작품에는 임금에 대한 충성과 백성을 교화하기 위한 것들이 많다.

 

그의 시풍은 호방하고 빼어나서 세상에 매인 기운이 없다는 평을 받는데, 이 시도 그런 기풍을 엿볼 수 있다.

 

첫째 구()에서는 시인이 임금의 곁을 떠나 멀리 변방에 홀로 가 있음을 암묵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가을이 끝나가려는 즈음에 변방의 기러기는 남쪽으로 날아가면서 슬피 운다. 임금에 대한 그리움과 변방에 와 있는 시인의 서글픔이 교차되는 순간이다.

 

돌아가고픈 생각에 망향대에 올라가 보았다. 그랬더니 국화는 자신의 슬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은근한 정을 보내는 듯이 함초롬히 피어 있다. 그래서 시인은 중양절에 피지 아니하고 늦가을에 핀 국화가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피었다고 여긴다.

 

변방과 기러기와 가을과 국화가 어우러진 가운데 돌아가고픈 시인의 심정을 잘 나타낸 작품이다.

 

굴원 [Ch'u Yuan, 屈原] 중국 춘추전국 정치가·시인

이름은 평(). ()은 자. 일찍부터 그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그의 시들은 초기 중국 시단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굴원은 양쯔 강[揚子江] 중부 유역의 큰 나라였던 초나라의 왕족으로 태어났다. 그의 친척이었던 회왕(懷王)의 신임을 받아 20대에 벌써 좌도(左徒侍從)라는 중책을 맡고 있었다. 법령입안(法令立案) 때 궁정의 정적인 상관대부(上官大夫)와 충돌해 그의 중상모략으로 면직당하고 국왕 곁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굴원은 제()와 동맹해 강국인 진()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진의 장의(張儀)와 내통하고 있던 정적과 왕의 애첩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왕은 제와 단교했으나 결국 진에게 기만당하고 진의 포로가 되어 살해당하고 말았다. 회왕이 죽은 뒤 큰아들인 경양왕(頃襄王)이 즉위하고 막내인 자란(子蘭)이 영윤(令尹재상)이 되었다. 굴원은 회왕을 객사하게 한 자란을 백성들과 함께 비난하다가 또다시 모함을 받아 양쯔 강 이남의 소택지(沼澤地)로 추방되었다. 어부사 漁父辭는 그때 쓴 작품이다.

 

그는 유배지에서 무속적 민속의식을 관찰하고 그의 작품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전설들을 수집했다. 맨처음 회왕에게 내쫓기어 유배되었을 때 최대 걸작으로 꼽히는 장편 서정시 이소 離騷를 써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만나다'의 뜻이고 '''근심'이라는 뜻이니 이소란 곧 '근심을 만나다'라는 뜻이다. 이소경 離騷經이라 하는 것은 후세 사람들이 높여 부르는 이름이다.

 

"이것은 위로 당우(唐虞) 3(三后)의 성왕을 법을 들어 말하고, 아래로는 걸(((羿()의 패망함을 들어 말함으로써 군왕이 깨닫고 정도(正道)로 되돌아가 다시금 자기를 불러줄 것을 기원한 것이다."

 

위의 글은 왕일(王逸)과 주자(朱子)이소경서문의 한 토막이다. 굴원은 그토록 애타게 자기의 충정을 노래하다가 한 번 용서받은 바 있었으나, 다시금 참소를 받아 경양왕에 의해 멀리 양쯔 강 남쪽 강남지방으로 내쫓기는 몸이 되었다. 애국시인 굴원은 유배에 대한 절망감으로 강가를 하염없이 거닐며 시를 읊조리다가 회사(懷沙)의 부()를 마지막으로 고결한 성품을 그대로 간직한 채 돌을 안고 미뤄 강[汨罷江지금의 汨水]에 몸을 던졌다. 중국에서 음력 55일에 벌어지는 유명한 용선(龍船) 축제는 이 애국시인의 유체를 찾던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굴원의 작품들은 고대 중국의 명시선집인 초사 楚辭에 실려 있다. 이 시집은 후세 시인들이 굴원의 전설적인 삶에 대해 쓴 글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한부(漢賦)에 큰 영향을 주었고, 후대에 높이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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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조항삼님의 댓글

가정회의 신앙과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은 과감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동감합니다.

 

묵묵부답도 큰 문제이고 이현령비현령식으로 종국에는 "참사랑"으로

두루뭉술 하면 점점 더 오염도가 높아 공멸될가 우려되네요.

 

정해관님의 댓글

본글의 내용과 관련이 없는 사적견해를 이곳에 주장하는 댓글 사양!

다시 반복 된다면 홈관리위원장은 제명조치하고, 가정회에서도 참부모님 중심의 원리적 견해에 반하는 주장자는 결국 우리 가정회의 신앙과 명예를 심히 훼손하는 자이기 때문에 강력히 경고조치하고, 그래도 고쳐지지 아니하면 '제명' 절차도 진행할 것을 요청합니다. 여기에 가정회 임원들의 의견도 듣고 싶습니다.

 몰라서 묵묵부답인지, 알고도 '참사랑' 때문에 양해하고 있는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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