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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典漢詩29. 福靈寺(복령사) -朴誾(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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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典漢詩29. 福靈寺(복령사) -朴誾(박은)-

 

伽藍却是新羅舊, 千佛皆從西竺來. (가람각시신라구, 천불개종서축래)

가람은 신라적 옛것이요, 천불은 다 서축에서 모셔온 것.

각시(却是); 이로부터 뒤로 가본다면,

서축(西竺); 천축(天竺), 인도,

 

從古神人迷大隈, 至今福地似天台. (종고신인미대외, 지금복지사천태)

예로부터 신인이 대외에서 길을 잃었거니, 지금의 이 복지도 천태와 같네

(); 잃어버리다,

대외(大隈); 큰 모퉁이, 천지, 대지, 조물주,

천태(天台); 중국의 천태산에는 신인이 사는 복지가 있었다고 한다,

 

春陰欲雨鳥相語, 老樹無情風自哀. (춘음욕우조상어, 노수무정풍자애)

봄 날 흐려 비 오려 하니 새가 먼저 속삭이고,

늙은 나무는 정이 없는데 바람은 스스로 슬프게 하네.

 

萬事不堪供一笑, 靑山閱世自浮埃. (만사불감공일소, 청산열세자부애)

세상 만사 일소에 붙일 것도 못되지만,

푸른 산도 세상을 지나다 보니 절로 먼지 위에 떠 있네.

열세(閱世); 세상을 겪음,

부애(浮埃); 뜬 먼지, 티끌,

 

1. 작자 소개

박은(朴誾)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仲說(중설)이고, ()挹翠軒(읍취헌)이다.

 

해동강서파(海東江西派)의 중심인물로서 시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해동강서파는 진사도(陳師道)의 시풍을 배운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로 박은(朴誾), 이행(李荇) 등을 가리킨다.

 

15세 때에 이미 문장에 능통하여 이름을 떨쳤으며, 경연관(經筵官)까지 올랐으나 모함에 빠져 파직 당하였다. 그 후 유람을 계속하다가 1504년 지열교(知裂敎)로 임명되었는데, 그 해에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 사형 당함으로써 26세에 요절하였다.

 

문집에는 음취헌유고(挹翠軒遺稿)가 있다.

 

2. 작품해제(作品解題)

이 시는 과거와 현재의 연결을 통하여 인생의 허무함과 무상함을 노래하고 있는 것으로서 얽매임이 없이 맑고 웅흔한 박은의 시세계를 잘 드러내 주는 작품이다.

 

기연(起聯)은 신라 때부터 있어온 복령사가 천축에서 온 부처를 모시고 있는 아주 신령스러운 절이라는 것으로 작품을 시작하고 있다. 또한 절이 있는 땅은 옛날의 신인이 길을 잃었을 정도로 기이한 천태산의 경계와 비슷하다고 칭찬하고 있다.

 

승연(承聯)에서는 복령사가 천축에서 온 부처를 모시고 있고, 매우 빼어난 산세 속에 있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지만, 그 속에 숨긴 뜻은 그것이 현재의 우리에게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옛날의 고사가 시인으로 하여금 인생무상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전연(轉聯)은 신()이 아니고서는 쓸 수 없다는 평을 받는 구절이다. 비와 새, 나무와 바람의 엇갈린 풍경모사를 통하여 인생의 무상함을 이야기하려 한다. 새 생명을 틔우려는 봄비와 새의 움직임과는 대조적으로 늙은 나무는 아무 반응이 없고 바람만이 홀로 분다는 표현은 생명의 약동성과 세월의 무상함이 잘 어우러진 구절이라 할 수 있다.

 

결연(結聯)은 세상만사가 한번 웃음거리도 되지 못하니 수많은 세월을 겪어 온 청산에는 먼지만이 있을 뿐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역시 삶의 허무함을 절묘하게 노래한 구절이다.

 

갑자사화 [甲子士禍] :1504(연산군 10) 연산군의 생모 윤씨 복위문제로 야기되어 훈구와 사림이 피해를 입은 사건.

성종 때부터 사림이 중앙정치에 적극적으로 등장하면서, 언론기관을 중심으로 훈구들의 비리를 지적하는 등 새로운 정치 양상을 보여주었다. 이 변화는 홍문관의 언관화에 따른 언권의 강화와 성종이 훈구들의 위세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을 지원하는 상황에서 강화되었다. 이런 변화 위에서 사림의 진출이 강화되었고, 훈구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훈구세력보다는 오히려 사림을 더욱 견제했다. 사림 역시 연산군의 정치성향이 성종과는 달리 유교적인 왕도정치에 입각하지 않은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연산군을 적극 견제하였다. 이와 같이 사림은 훈구와의 갈등관계 위에서 연산군을 견제하는 이중적인 부담을 지게 되었고, 결국 왕과 훈구의 결속에 의한 반격인 무오사화(戊午士禍)에 휩쓸리게 되었다.

무오사화의 결과 언론직을 장악하고 있던 사림은 큰 피해를 입었고 언론도 위축되었으며 주도권은 왕과 훈구 재상에게 돌아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과 재상들 사이에는 서로 주도권을 잡기 위한 긴장관계가 형성되었다. 연산군이 언론의 견제가 약화된 상황에서 사치와 낭비를 일삼아 국가재정은 궁핍해졌고, 그 재정 부담을 백성뿐 아니라 훈구 재상들에게 지우자 재상들과 연산군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왕과 재상의 갈등이 심화되자 재상들은 궁중의 경비를 절약하고 왕의 방종을 견제하려 했으나, 외척인 신수근(愼守勤 : 연산군의 비인 신씨의 오빠)을 중심으로 임사홍(任士洪) 등이 연산군을 지원하면서, 오히려 사화를 야기하여 훈구 재상들이 피해를 입게 되었다. 무오사화로 위축되었지만 일정한 기능을 하면서 왕의 방탕을 견제하던 사림이 그 피해에 같이 연루된 것은 당연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일어난 갑자사화의 구체적인 계기는 연산군 생모인 윤씨의 복위문제였다(숙의윤씨). 연산군의 생모인 성종비 윤씨는 질투가 심하고 왕비의 체모에 벗어난 행동을 많이 하자 성종은 1479(성종 10) 폐비하고 다음해 사사(賜死)하였다(색인 : 윤씨폐비사건). 왕과 재상과의 관계가 악화된 상황에서 이러한 사실이 임사홍에 의해서 연산군에게 알려지자, 연산군은 이 사건과 관련된 성종의 후궁인 엄숙의와 정숙의를 죽이고 그의 아들 안양군(安陽君)과 봉안군(鳳安君)은 귀양보내어 사사했다. 또한 윤씨를 왕비로 추존(追尊)하고 성종 묘에 배사하였다. 연산군은 이때 반대한 언관 권달수(權達手)는 죽이고 이행(李荇)은 유배하였다.

 

연산군은 이를 빌미로 자기를 견제하는 훈구들과 사림들을 제거하려 획책하였으므로 더욱 확대되어 폐위 사건 당시 이를 주장하거나 방관한 사람들을 찾아 죄를 묻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윤씨의 사사에 찬성하였던 윤필상(尹弼商이극균(李克均성준(成浚이세좌(李世佐권주(權柱김굉필(金宏弼이주(李胄) 10여 명이 사형되었고, 이미 죽은 한치형(韓致亨한명회(韓明澮정창손(鄭昌孫어세겸(魚世謙심회(沈澮이파(李坡정여창(鄭汝昌남효온(南孝溫) 등이 부관참시되었다.

 

이들은 훈구 재상들을 거의 망라하는 것이었다. 이외에 홍귀달(洪貴達심원(沈源이유녕(李幼寧변형량(卞亨良이수공(李守恭곽종번(郭宗藩박한주(朴漢柱강백진(康伯珍최부(崔溥성중엄(成衆淹이원(李黿신징(申澄심순문(沈順門강형(姜詗김천령(金千齡정인인(鄭麟仁조지서(趙之瑞정성근(鄭誠謹성경온(成景溫박은(朴誾조위(曺偉강겸(姜謙홍식(洪湜홍상(洪常김처선(金處善) 등이 피해를 입었는데 이들은 대다수가 사림이었다. 또한 피해자의 자녀와 가족, 동족까지 연좌되어 그 피해가 무오사화를 웃돌았다. 폭력적인 사화로 견제세력을 제거한 연산군은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으나, 그것은 정당성과 권력기반을 상실하는 결과를 낳았다.

 

연산군의 방탕한 행위가 심해지고 그 폭정의 피해가 심각해지자 훈구와 사림의 결속된 반격으로 연산군은 폐위되었다.무오사화 , 사림파 , 사장파 , 사화 , 연산군 , 윤씨폐비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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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이인규님의 댓글

내가 길을 잃은 것과 같은 형편이기에 신도 인간도 함께 그렇게 된 것으로 추론한 것은 언제나 내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상적인 절경에는 신과 인간이 함께 복락을 누리며 사는 이상촌이 있을 것이라 믿은 천태의 뜻은

모두가 다 신과 더불어 복지를 누리고 싶은 본성이 있기때문에 가능한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상세계는 복지의 세계요 모두가 다 바라는 세상이지요.

말만이 복지가 아니고 공약으로만 복지가 아니고 실재적인 복지사회가 신인이 어울려 사는 천태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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