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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典漢詩16. 부벽루(浮碧樓) -이색(李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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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典漢詩16. 부벽루(浮碧樓) -이색(李穡)-

 

昨過永明寺, 暫登浮碧樓. (작과영명사, 잠등부벽루)

어제 영명사를 지나다가, 잠간 부벽루에 올랐었네.

 

城空月一片, 石老雲千秋. (성공월일편, 석로운천추)

성은 비었는데 한 조각달이 걸려 있고, 돌은 늙었는데 천년의 구름이 떠있도다.

 

麟馬去不返, 天孫何處遊. (인마거불반, 천손하처유)

기린마는 떠나가고 돌아오지 않는데, 천손은 어느 곳에서 노니는고

[인마(麟馬)]; 기린말, 고구려 동명왕이 탔다는 말,

 

長嘯依風磴, 山靑江自流. (장소의풍등, 산청강자류)

바람 난간에 기대어 길게 휘파람 부니, 산은 푸르고 강물 절로 흐르네.

 



 

1. 작자 소개

이색(李穡)은 고려 말기의 정치인으로 자()는 영숙(穎叔)이고, ()는 목은(牧隱)이다.

 

이곡(李穀)의 아들로 고려 말기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이라는 높은 벼슬에까지 올랐다. 아버지 이곡이 원()에 있었던 관계로 어린 시절을 원나라에서 보냈다. 나중에는 정동성(征東省) 향시(鄕試)에 일등으로 합격하였다.

 

강경파에 의해 고려가 멸망하자 이색은 조선에 벼슬하지 않고 산속으로 들어가 숨었는데 고려 말의 삼은(三隱)으로 꼽힌다.

 

문집으로는 목은집(牧隱集)이 전한다.

 

2. 작품해제(作品解題)

이색은 결단성 있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치적 노선에서도 온건파에 속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시에도 이러한 우유부단(優柔不斷)함이 잘 나타나 있다.

 

성리학을 폭넓게 공부하여 조선시대의 성리학 발달에 끼친 공로는 크지만 고려의 멸망과 더불어 죽지도 못하고 소극적인 대응을 하였다. 즉 시대에 맞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서 갈등을 느낄 따름이지 그것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부벽루(浮碧樓)>는 과거 고구려의 전성시대를 그리워하고 아쉬워하면서 막연히 동명왕을 기다릴 뿐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행동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이색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산 속에 들어가서 세상을 잊고 살고 싶다는 식의 생각을 표현하면서 과거에 대한 무상함과 회고의 정을 풀어내고 있다.

  
김홍도의 <부벽루연회도>

[우리 시조로 푼 한시]     浮碧樓(부벽루)/ 이색

돌은 오래고 구름은 천년을 흐른다

중국 관문이 대동강이었기에 평양은 교통의 요새지이자 문화 중심지였다. 6`25전쟁 때 불타버린 것으로 알려지나 평양 하면 떠오르는 절이 영명사이고 부벽루다. 남북의 허리가 잘려 있는 마당에 가보고 싶은 곳이 평양이 아닌가 한다. 그만큼 문화 유적이 많다. 동명왕이 탔다고 하는 기린마를 떠올리면서 하늘이 남겨놓은 마지막 천손은 어디에서 노니는지 산은 푸르고 강은 저절로 흐른다고 읊었던 율시 전구 한 수를 번안해 본다.

동명왕 기린마는 어디 가고 오지 않고 (麟馬去不返 : 린마거불반)

천손은 지금쯤엔 어느 곳에 놀고 있나 (天孫何處遊 : 천손하처유)

휘파람 불어보지만 (長嘯依風登 : 장소의풍등)

산천은 변함없네. (山靑江自流 : 산청강자류)

 

한자와 어구

麟馬: 기린마, 동명왕이 타고 기린굴로 들어갔다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해진다

去不返: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

何處遊: 어느 곳에서 노는가/

長嘯: 길게 휘파람을 불다/

風石登: 인위적으로 만든 돌다리를 일컬음/

自流: 스스로 흐르다.

 

돌은 오래고 구름은 천년을 흐른다로 제목을 붙인 율()의 후구인 오언율시다.

작가는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으로 고려 말의 문신이다. 1365년 신돈이 등장하고 개혁정치가 본격화되면서 개혁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388년 위화도 회군이 일어나자 문하시중에 임명되었고 조선 왕조가 개창되면서 논죄(論罪)되어 해도에 유배되었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기린마는 가고 오지 않으니/ 천손은 어느 곳에서 노는가/ 돌난간에 기대어 휘파람 부는데/ 산은 푸르고 강물은 절로 흐르는구나라고 번역된다.

 

전구에서 시인은

엊그제 영명사를 지나다가

잠시 부벽루에 올랐더니

성은 비었는데 달은 한 조각이요

돌은 오래 되었고 구름은 천년을 흐른다라고 시심을 쏟아냈다. 우연히 영명사를 지나다가 부벽루에 올랐건만 천년 그림자조차 찾을 길이 없다.

 

그럼에도 시인은 기린마를 상상한다. 동명왕이 탔다는 기린마를 볼 수 없고 아직 천손은 어느 곳에 놀고 있는지 반겨주지 않는다고 회고한다. 그들이 있었기에 고구려를 지킬 수 있었고, 그래서 저 광활한 만주 벌판을 활보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시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가 회고와 시적 소재들뿐이다.

 

화자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대화의 상대를 찾아본다. 돌 난간에서 휘파람을 불어 보지만 그마저 허사다. 대답이 없다. 예나 이제나 변함 없이 산은 푸르고 강물은 말없이 흐를 뿐이다. 어느 시인의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라는 시구를 울컥 떠올려 본다.

 

이색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함께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시호는 문정(文靖). 1341년 진사가 되고, 1348년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國子監)의 생원으로 성리학을 연구했다. 1351년 부친상으로 귀국, 1352년 공민왕에게 전제(田制) 개혁`국방 강화`교육 진흥`불교 억제 등 당면 정책을 건의했다. 1354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가서 회시(會試)에 장원, 전시(殿試)에 차석으로 급제해 국사원편수관(國史院編修官) 등을 지내다가 귀국했다. 이후 이부시랑(吏部侍郞) 등 인사행정을 주관, 정방(政房)을 폐지했고 3년상(三年喪)을 제도화했다.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의 남행(南幸)을 호종, 일등공신이 된 후 여러 관직을 지냈다. 1367년 대사성(大司成)이 되자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김구용`정몽주`이숭인 등과 강론, 성리학 발전에 공헌했다. 1373년 한산군(韓山君)에 책봉된 후에는 신병으로 관직을 사퇴했으나 1375년 우왕의 청으로 다시 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역임했다.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이 강화로 유배되자 아들 창()을 즉위시켜 이성계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으나 이성계가 득세, 유배됐다. 조선 개국 후 인재를 아낀 태조가 1395년 한산백(韓山伯)에 책봉했으나 사양,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가던 중 죽었다. 문하에 권근`김종직`변계량 등을 배출, 학문과 정치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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