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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축구, '깨진 공한증' ---세계일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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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공한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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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아시안게임이 열린 태국 방콕. 죽의 장막에 가려 있던 중국 축구대표팀은 한국팀과 처음 만났다. ‘아시아의 표범’ 차범근의 슛이 골네트를 갈랐다. 중국 축구가 한국 축구에게 진, 첫 패배의 순간이었다. 공한증(恐韓症)은 암처럼 자라났다. 이후 32년 동안 중국 축구는 단 한 번도 한국을 이기지 못했다. 한국 축구는 중국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화가 난 것은 중국의 축구광 ‘치우미(球迷)’들이었다. 한국에 질 때마다 성난 치우미의 글은 인터넷을 도배질했다. 중국팀을 향해 ‘배부른 돼지’라고 비난했다. 중국 프로팀에서 고액 연봉을 받는 선수들이 한국과 만나면 판판이 패하니 울화통이 터질 만했다. 공한증은 혐한(嫌韓) 정서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중국의 치우미들은 한국 축구팀과 심판을 싸잡아 비난하곤 했다.
일본 도쿄에서 한중전이 열린 10일은 ‘공한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 날이었다. 0 대 3. 한국에는 충격의 날이었으며 중국에는 축제의 날이었다. 한국축구는 종이호랑이처럼 갈갈이 해체됐다. 중국 주요 도시에는 11일 하루종일 폭죽이 터졌다. 베이징의 신경보(新京報), 상하이의 동방조보(東方早報) 등 중국의 주요 신문은 ‘설욕 32년, 한국에 첫 승리’라는 기사를 대문짝만하게 실었다.
역사를 돌아보면 중국인에게 공한의 역사는 뿌리 깊다. 약 14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분열의 시대를 끝낸 수나라 문제와 그의 아들 양제, 이어 등장한 당나라 태종은 북방의 강자 고구려를 침공했다. 그러나 을지문덕 군대는 살수에서 수의 30만 대군을 수장시켰으며 연개소문 군대는 대동강변에서 당의 방효태 군대를 전멸시켰다. 당시 중국에는 ‘고구려로 가는 길은 죽음의 길’이라는 말이 퍼졌다고 한다. 당 태종이 아들 고종에게 남긴 유언이 “절대 고구려와 싸우지 말라. 국력만 낭비할 뿐 얻는 것은 없다”는 것이었으니 그 공포심이 얼마나 깊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쫓는 연개소문과 쫓기는 당 태종의 이야기는 중국 최고의 경극 ‘패왕별희’에도 나온다.
기록은 깨지게 돼 있다. 중국 축구의 공한증도 예외일 수 없다. 그렇더라도 한국 축구가 비슷하게도 아니고 그렇게 무기력하게 무너지다니. 허정무 감독은 신발 끈을 다시 매야겠다.
강호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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